국가명 | 오스트리아 공화국(Republic of Austria) | |||||||||||
---|---|---|---|---|---|---|---|---|---|---|---|---|
수도 | 빈(Wien, 약 165만명 거주) | |||||||||||
면적 | 83,857 km2 (한반도의 약 2/5) | |||||||||||
인구 | 약 810 만명 ('2002년) | |||||||||||
주요민족 | 독일계(97.1%), 슬라브계(2.7%), 아시아계(0.2%) | |||||||||||
주요언어 | 가톨릭(85%), 개신교(7%), 이슬람교(8%) | |||||||||||
종교 | 가톨릭(85%), 개신교(7%), 이슬람교(8%) | |||||||||||
화폐 | 유로(EURO) | |||||||||||
기후 |
연평균 기온은 약 8-10℃이며, 여름 평균기온은 22-23℃, 겨울은 1℃정 도이다. 일교차가 심하고 같은 계절에서도 날씨 변덕이 심하며, 특히 4월과 9월의 기후는 아주 변화가 심하다. 북서쪽에서 항상 부는 미풍의 영향으로 한여름에도 저녁에는 늦가을 날씨처럼 쌀쌀 하다. 지중해의 영향은 남쪽 지방에 한정되어 있다. 강수량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를수록 감소되고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증가한다. 비가 많은 서부 지역은 연 강수량이 약 1,000㎜이며, 동부 농업 지역은 다소 적다. |
|||||||||||
주요산업 | - | |||||||||||
전압 | - | |||||||||||
시차 | - |
- 1. 개요
-
수도는 빈(비엔나)이며, 주요 도시로는 그라츠(25만명), 린츠(20만명), 잘츠부르크(14만 명), 인스부르크(12만명)가 있다.
중유럽에 위치한 오스트리아는 북쪽으로는 독일과 체코에, 동쪽으로는 슬로바키아와 헝가리에, 남쪽으로는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 서쪽으로는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에 국경을 접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니더외스터라이히, 오버외스터라이히, 잘츠부르크, 티롤, 포어아를베르크, 케른텐, 슈타이어마르크와 부르겐란트 등의 8개의 연방 주로 구성되어 있다.
최고봉 그로스글로크너(Groclockner, 3797m)를 비롯하여 3000m 정도의 봉우리들이 늘어선 알프스 산지 지역과 호수, 도나우 강변과 보헤미아의 숲들 그리고 동유럽으로 퍼져 나가는 평원으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는 지역에 따라 네 가지 기후를 지니고 있다.
북부는 온대성 기후, 동부는 대륙성 기후, 서부는 해양성 기후를 나타낸다. 사계절 모두 관광하기에 좋다.
오스트리아의 대부분은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알프스는 빈의 남쪽에서 시작되어 포어아를베르크를 지나 니스에 위치한 지중해까지 뻗어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국토에는 1919년 이래로 해안이 없다.
- 1. 역사
-
기원전 800-400년경 인도/유럽계 아이리란(IIIyrian)족들이 오스트리아 지역에 할슈타트(Hallstatt)라고 불리는 문명을 최초로 건설하였으며 이후 Celt족이 동 문명을 계승하였다.
기원 원년 경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알프스 및 다뉴브 연안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로 인정되어, 잘츠부르크(Salzburg) 등을 중심으로 경제/문화면에 있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서기 2세기경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5세기 게르만족의 서진 이후, 오스트리아는 훈(Hun), 아바르(Avar), 슬라브(Slav) 및 마자르(Magyar)족들에 의해 차례로 점령되었으며, 500-700년경에는 게르만계 바바리아(Bavaria)족이 정착하였다. 8세기 말엽에는 카를(Karl) 대제의 프랑크 제국으로 편입되었으며, 880년 마자르(Magyar) 족이 침략하여 약 70년 간 지배했으나, 955년 오토(Otto)대제가 이들을 격퇴함으로써 오스트리아 지역에는 게르만 인들이 항구적으로 정착했다.
중세의 오스트리아는 976년부터 270년간 통치한 바벤베르크(Babenberg) 왕조와 1273년부터 640년간 통치한 합스부르크(Habsburg) 왕조에 의해 지배되었다.
976년 신성로마제국의 바벤부르크(Babenberg)가는 오스트리아 후작가가 되었으며, 이후 270년 동안 승계된 바벤부르크(Babenberg) 왕조 하에서 오스트리아는 평화 속에 발전을 거듭하였다. 996년에 간행된 문서에서 오스트리아 지역을 가리켜 "Ostarrichi"라고 부른 기록이 있으며 이 명칭은 후에 독일어로 " sterreich"로 개칭됨으로써 오스트리아의 국명이 되었다.
1273년 합스부르크(Habsburg)가의 루돌프(Rudolf)가 신성로마제국내 왕으로 임명됨으로써 합스부르크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640년 동안 20명의 황제들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특히 카를 6세로부터 왕위를 계승한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1740-1780년 통치) 시대에는 행정제도, 교육, 문화면에 있어서 개혁이 단행되었으며 오스트리아의 중흥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뒤처리를 위한 1815년 비인 회의 이후 오스트리아는 반동세력의 주도국으로 위세를 떨쳤으나 1860년대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국내적으로는 자유, 민족주의 세력에 굴복, 이의 극복을 위해 1867년 오스트로-헝가리 2중 제국이 성립되고 입헌군주제의 헌정질서가 도입되었다.
1870년대 이후 독일과의 우호동맹 관계를 배경으로 오스만 터키의 쇠퇴로 힘의 공백상태에 놓인 발칸 진출을 기도, 동 지역 내 슬라브 민족 세력 및 러시아와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으며,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 의한 페르디난트(Ferdinand) 황태자 암살 사건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제1차 대전에서의 패전 후 합스부르크 왕가가 붕괴하고, 1918년 11월 12일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신생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과거 오스트로-헝가리 제국 領土중 약 17%만 점유하고, 나머지 83%는 분할되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신생 공화국의 탄생을 가져왔다.
국내외적 정치위기, 과중한 전쟁배상의 이행, 대공황후 중간 계급의 동요, 주변국가에서의 파시즘 대두는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군인, 귀족, 자본가, 보수중간계층의 지지를 받는 파시스트 세력의 등장을 가져왔으며 1932년 5월 친 이탈리아계 파시스트 독재자 돌푸스(Dollfuss)가 수상에 취임하였다.
돌푸스는 1933년 의회기능과 정당활동을 정지시키고, 1934년 4월에는 권위주의 헌법을 채택, 폭력에 의한 국민탄압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1934년 7월 나치(NAZI) 당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독일에서는 나치당이 세력을 장악,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조종, 오스트리아 합방을 추진하여 오스트리아는 1938년 3월 13일 독일에 합방되었다.
2차 대전 이후 사회민주당 출신 Karl Renner를 대통령을 중심으로 사민당, 기사당 및 공산당 연정으로 시작된 제2공화국은 독립국가 설립을 위한 국민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성립되었다. 제2공화국의 영토는 1938년 오스트리아의 독일 합방 이전의 상태로 복귀되었으며, 헌법도 1920년 제1공화국의 헌법으로 복귀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점령된 오스트리아는 1955년 5월 15일 4대국과 오스트리아간에 주권회복을 위한 국가 조약에 서명하고, 동년 7월 27일 조약이 발효함으로써 동년 10월 29일 모든 점령군이 철수하였다. 1955년 10월 26일에는 영구 중립을 규정한 제2공화국 헌법이 선포되었으며, 12월 14일 유엔, 1995년 EC에 가입했다. - 2. 주요 순례지
- 비엔나(VIENNA)
- 푸른 다뉴브의 본고장 비엔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이며 슈베르트와 요한 스트라우스를 배출한 영원한 예술의 도시이다. 1000년 영화의 자취가 깃들인 고색 창연한 궁전들과 비엔나 숲, 그리고 현대적 감각이 어우러진 고전적인 도시 비엔나는 그곳에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해지는 곳이다.
삼림지대와 도나우 강 사이에 발달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이 역사상에 등장하게 된 것은 1세기 중엽 로마 제국이 요새를 설치한 후부터이다.
빈이라는 명칭이 나타난 것은 10세기이지만 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말 합스부르크 왕가가 이곳에 성을 쌓고 1438년 신성로마제국의 수도가 된 후부터이다. 17세기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거의 폐허가 되었으나 합스부르크 왕조의 번영으로 재건되었고, 18세기 후반에는 하이든과 모짜르트로 대변되는 음악과 연극이 크게 번성하였다.
도시의 랜드마크인 성 스테판 성당과 케른트너 거리,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시청, 그리고 광장, 수많은 박물관, 국립 오페라 하우스, 하이리겐슈타트로 잘 알려진 비엔나의 숲은 시의 서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세계적인 여러 음악가들이 잠들어 있는 중앙묘지 등 비엔나의 곳곳은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비며, 일년 내내 콘서트와 오페라가 공연되어 음악 도시의 정취를 흠뻑 맛 볼 수 있는 곳이다.
* 링 도로(Ringstrasse)
1857년 Franz Joseph 황제가 시 중심부를 둘러싸고 있던 성벽을 철거하고 세운 것으로 비인 중심부인 구시가(Inner Stadt)를 둘러싸고 있는 5각형의 환상형 도로로 비인 주요 명소가 밀집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의 진열장(showcase)으로 불린다.
카를 광장, 오페라 극장(Staats Oper), 미술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국회 의사당, 시 청사, 빈 대학, Stadts Park, 시립 역사 박물관 등이 약 4km의 링을 따라 위치해 있으며, 도보 여행이 가능하다.
* 성 스테판 성당 (St. Stephans dom)
성 스테판 성당은 오스트리아 교회의 중심이자, 빈 시민의 정신적 안식처이며, 빈의 상징으로 1147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처음 건축되었으나, 1258년 빈을 휩쓸었던 큰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263년 보헤미아 왕에 의해 재봉헌되었다. 이때 건립된 것이 '거인의 문'과 '이교도의 탑'인데 지금도 당시의 모습대로 남아있다.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식 성당.
그 후 합스부르크가의 영주들이 등장하면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헐어버리고 14세기 초 현재 모습의 고딕 양식으로 개축했다. 그러나 이 성당은 3세기에 걸쳐 부속 건물들이 건축되었기 때문에 현재 로마네스크와 르네상스의 양식을 부분적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성당의 고난은 그치지 않아 1945년에 독일군에 의해 많은 예술품과 지붕의 트러스가 파괴됐다. 심지어 1683년 터키인들의 포위가 끝난 후 남아 있던 대포를 녹여 만들었던 유명한 종 푸메린도 철저하게 부서졌다. 파괴된 성당은 종전 후 다음날부터 복구가 시작되어 현재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내부는 Anton Pilgram이 조각한 설교단과 스테인드 그라스 장식이 유명한데, 고딕양식의 외부구조를 따르지 않고 고딕 후기의 중부 유럽에서 유행한 중앙의 신랑(身廊)을 중심으로 좌우에 측랑을 두었으며, 가느다란 기둥들이 아치를 떠받치고 있다. 지붕은 금빛과 청색 타일의 모자이크 무늬로 되어 있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136미터의 높이를 자랑하는 첨탑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성당에는 마리아와 예수상, 프리드리히 3세의 석관이 있다.
* 카를(Karlskirche) 성당
1713년에 황제 Karl 6세가 당시 창궐하던 흑사병이 물러가면, 그의 수호성인인 가롤로 보로메오를 위해 훌륭한 성당을 봉헌하겠다고 하느님께 서원하였다. 1714년 2월 드디어 흑사병이 퇴치되자 황제는 스페인, 밀라노, 네덜란드 등의 기부금을 받아 위대한 건축가 베른하르트 피셔에게 성당 건축을 맡겼다.
그러나 피셔가 성당 건축 도중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요셉 임마누엘이 부친의 사업을 계승, 부분적인 수정을 거쳐 완공, 1737년 10월 28일 빈의 초대 추기경인 지기스문트가 축성했다.
다뉴브강 지류인 빈강 남쪽에 자리잡은 카를 대성당은 바로크 양식의 현존 최고 건축물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한 서약을 이행한다” Karl 6세의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 피터(Peterskirche) 성당
11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로드마이어가 그린 천장의 프레스코화 「마리아 승천’」과 제단의 조각은 바로크 예술의 백미. 모차르트가 미사곡을 연주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 국립 오페라극장(Staatsoper)
1869년 '궁정 오페라극장'으로 건립된 세계적인 오페라와 발레극장으로 성 슈테판 성당과 함께 비엔나의 양대 상징이다. 수용인원 2,209석(1,642 좌석, 567 입석)의 무대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718m2)이며 매년 300회 이상의 오페라, 발레공연이 상연된다. (7, 8월은 휴관)
* 왕궁(Hofourg)
13세기부터 1918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멸망 때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으로, 현재는 대통령 집무실, 국제회의, 스페인 승마학교, 국립박물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시 속의 도시'라고 일컬어질 만큼 대규모(총 240,000m2)로서 총 10개의 건물이 5차의 대공사를 통해 6세기에 걸쳐 건립됐다.
* 쉔브룬(Schonbrunn)궁전
빈 시의 서남부에 위치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 합스부르크 황가의 여름궁전으로 아름다운 정원과 화려한 실내장식이 유명하며, 빈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명소 중 하나다.
이 궁전은 1696년 레오폴드 황제 때 여름 별궁으로 계획했으나, 공사 도중 사망으로 중단되었다가, 1713년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여왕에 의해 재건축된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18세기 유럽의 최고 권력자로 전제군주였는데 성격이 매우 소탈해 가정주부 같았다. 그녀의 통치 스타일은 계몽주의적 통치의 본보기였으며 프랑스적 취향이 짙었다. 이런 취향과 성격이 쇤브룬 궁전에서 보여진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뜬 이 건물은 고전적 아치가 있는 주랑, 정자를 중심으로 기교를 부린 프랑스풍의 정원은 유연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1200개나 되는 방을 가진 이 궁전은 노란 벽과 기와 때문에 화려하면서도 따스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 시대에는 오스트리아에 테레지아 양식이라는 건축양식이 있었는데 이는 후기 바로크로서 로코코 양식에 대응하는 것이다.
궁전의 외관은 바로크 양식이나 내부의 가구 및 기타 설비들은 그 당시 최신 유행이었던 로코코 풍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바로크 양식의 가장 큰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테레지아 여왕의 딸이자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와네트가 여기에서 소녀시절을 보낸 곳으로 모차르트가 훌륭한 연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곳이다.
또한 1805년 및 1809년 나폴레옹의 빈 점령 시 프랑스군 사령부로 사용되었고, 1814-5년에 Congress of Vienna가 개최되었으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합스부르크 최후의 황제인 카를 1세가 퇴위 선언에 서명했던 곳도 이곳이다. 합스부르크의 전성기에서 멸망까지 600년 역사가 간직된 곳이다.
Hofburg 궁이 합스부르크 황가의 웅장함의 상징이라면 쉔브룬궁은 Maria Theresia의 여성적 취향이 반영된 궁전이다.
Gloriette : 1747년 정원 끝 언덕에 세운 그리스 신전 양식의 건축물로 이 속에서 내려다 보이는 시내 전망이 일품이다.
* 벨레데레(Belvedere)궁전
18세기 빈에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바로크양식주의자들이 전성을 누렸다. 벨베데르 궁전은 바로크양식이 전성을 누릴 때 에를라흐와 힐데브란트에 의해 건축된 것으로, 오스만투르크와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사보이의 황태자 오이겐(Eugene von Savoy)이 1721년부터 2년 동안 중세의 성벽으로 싸여 있던 빈 교회의 목초지에 여름 별장으로 세운 것이다.
외부는 에를라흐, 내부는 힐데브란트의 설계로 된 벨베데르 궁전은 대리석과 금박으로 덮인 돔과 응접실이 있고, 갖가지 석고 장식과 조각상등이 있다. 궁전은 호화롭고 밝아서 귀족적 취향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암살 당한 Ferdinand 황태자가 동 궁전에 거주하였으며 1955년 5월에는 미, 소, 영, 불 4국의 외무장관이 2차 세계대전 10년 간의 신탁통치를 마치고 오스트리아의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부여하는 State Treaty에 서명한 장소다.
현재는 바로크 미술관, 중세미술박물관 및 오스트리아 회화관으로 사용하며 Gustav Klimt, Oskar Kokoschka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 멜크 수도원(Stift Melk)궁전
빈에서 약 79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멜크는 1076~1106년 합스부르크 왕가 이전에 이 지역을 통치한 바벤베르크 왕조의 수도였던 곳이다.
이곳에는 유럽 최대의 바로크식 수도원인 멜크 수도원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무대였던 곳으로도 유명한 이곳은 바벤베르크 왕가가 1106년 베네딕토회에 기증한 왕궁을 1702~1726년에 개축한 것이다.
전략적 요충지로서 산꼭대기에 요새처럼 건축되었고, 수도원 내에는 수많은 회화와 조각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9만여 장서가 보관된 도서관과 호화로운 성당, 보물전시실이 있으며,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멜크 구시가의 풍경도 아름답다.
- 잘츠부르크 (Salzburg)
- 오스트리아의 중심. 알프스의 북쪽에 있는 잘츠부르그 주의 주도.
비엔나에서 서쪽으로 300km 거리에 있는 모짜르트의 고향 잘츠부르그는 높은 성들로 인하여 잘 정돈된 박물관을 연상시킨다.
7세기경 가톨릭의 사교의 거리로 번성해서, 소금생산 (잘츠: 암석사이에서 나는 큰 덩어리 의 소금이라는 뜻)으로 부유해지고, 15-16세기 경에는 호엔 잘츠부르그 성을 건립. 교회 음악이 번영하여 모짜르트 출생이후 예술성 높은 도시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잘츠부르그는 신시가와 구시가, 그리고 시교외 지역의 잘츠카머구트 3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진다.
그 중 구시가의 게트라이데 거리에서 세기의 위대한 음악가였던 모짜르트가 1756년 1월 27일 태어났다. 모짜르트의 생가에는 악보와 피아노 등 그와 그의 가족들의 유품들이 1층부터 4층까지 전시되어 있다.
레지덴츠 광장에는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잘츠부르그 대성당이 있다.
그리고 모차르트가 죽은 지 51년이 되던 해 잘츠부르그는 모차르트 광장에 모차르트 동상을 세우고 기념 음악회를 계획했으나 1887년에 이르러서야 연주회가 열렸다. 1920년 8월 20일에는 소규모로 개최되던 음악회가 대성당 광장에서 열렸고 지금도 해마다 7월과 8월 사이에 열리는 잘츠부르그 음악제에 성당 계단에서 '예더만'이 공연된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이기도 했던 아니프 성이 있는 호수와 아름다운 꽃길 등 수많은 음악가를 탄생시킨 이 도시의 아름다움과 자연과의 조화는 모든 관광객들을 감동시킨다. 모차르트 생가, 미사벨 정원, 레지덴츠 광장, 호헨잘츠부르그 성곽, 모짜르테움, 성 피터 교회 등과 시내에서 가까운 헬브룬 궁, 오벤도르프, 암염굴(소금광산) 등의 관광은 또 다른 잘츠부르그의 감동이다.
* 잘츠부르그 대성당
780년에 이 자리에 성 버질(st.Virgil)과 성 루페트(st. Rupert)에게 봉헌한 성당이 세워졌었다. 1200년경에 불에 타서 성당이 없어졌다가 로마네스크 바실리카를 지었다.
지금의 모습은 대주교 ‘마르쿠스 시티쿠스’에 의해 “헬부룬 궁전??을 만든 이태리 건축가 "Santino Solari산토니 솔라리"에게 건물을 짖도록 명하였다.
성당은 파리스로드론 대주교 때인 1621년에 엄숙히 봉헌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도 했으나 복구를 하였다. 성당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말기적 성격을 띤 바로크 양식의 거대한 건축물이다.
서유럽 최대의 성당으로서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6,000여개의 파이프로 만든 파이프 오르간이 성당 입구 쪽 위층과 같은 높이 벽면을 따라 있다. 두 개의 균형 잡힌 탑 옆의 서쪽 면은 밝은 색채의 잘츠부르크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이 두 탑 사이의 박공벽에 '그리스도의 지배'라는 작품과 ‘모세와 엘리야’의 조각상 등이 있다. 들어가는 정면 입구 쪽에 3개의 청동 문이 있는데 이 현대적인 청동 대문에는 믿음, 소망, 사랑 등의 주제가 양각되어 있다.
특히 성당의 내부는 크고 풍부한 대리석과 스티코(Stucco: 치장벽토), 풍부한 회화로 인해 인상적이다.
이 성당은 모차르트가 영세를 받았던 곳이며, 그가 어릴 때 미사에 참석, 오르간과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몇 작품이 여기에서 초연 되는 등 그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17세기에 지어진 이 성당은 알프스 북부지역에 있는 건물 등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최초의 건물로 주일 미사에 아름다운 오르간 소리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돔 오른쪽 계단 쪽에는 대성당의 보물이 전시된 박물관이 있다.
대성당 정면의 광장에선 매년 7월 말에 ‘마리아 호프만스틸’의 연극 ‘예더만(everyone)’ 공연을 시작으로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시작한다.
* 피터버러 성당 [Peterborough Cathedral]
이 성당은 700년경 베네딕토회 수도사들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처음 지었으나, 17세기와 18세기에 갑작스럽게 회랑을 추가로 넣고 돔을 올린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한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로마네스크 건물의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본 당에 들어가려면 바로크양식의 아름다운 철문을 통과해야 한다. 본당의 둥근 천장에는 성 베드로의 생애를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고 양쪽 벽 큰 아치 위에는 십자가를 진 예수가 갈보리로 올라가는 모습이 있으며 창문 아래에는 회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남쪽 면엔 성 베네딕토의 생애를 그린 그림이 있고 북쪽 면을 보면 St. Rupert의 생애 그림이 있다. 주 제단 장식과 본당의 붉은 대리석 기둥, 금박 조각상이 조화를 이룬다. 서쪽으로 이 교회를 나오면 백, 적색 잘츠부르크 대리석으로 만든 로마네스크식 대문이 있다.
그 양쪽에는 로마네스크식 아치가 있는데 12세기 교회의 흔적이다. 수도원 마당을 가로질러 오른쪽에 지붕이 있는 통로를 따라 가면 로마네스크식 옆문이 있고 그 옆에 프란치스코 성당이 있다.
* 피터 공동묘지
이 공동묘지는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곳으로 묀크스 산(Monchsberg)의 자갈과 모래가 굳어서 생긴 "역암"벽과 접해 있으며 역암엔 동굴 무덤(카타콤베)이 뚫려 있다.
게트라데 거리를 연상하게 하는 쇠로 만들어진 무덤 표식들이 인상적이며 좁은 공간을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폰 트라프 대령 가족이 합창대회 도중 축제극장을 빠져나와서 나치의 추격을 피해 숨어들었던 아름다운 묘지가 바로 이 곳이다.
* 논베르크 수도원
호엔잘츠부르크 성보다 조금 낮은 동쪽 언덕빼기에 숨겨진 듯 자리한 논베르크 수도원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가 있던 수녀원의 배경이 되엇던 곳이다. 영화에 나왔던 언덕과 주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으나 수도원으로 들어 갈 수 없고, 정원만 둘러 볼 수 있다.
* 호엔잘츠부르그
잘차흐 강에서 120미터나 높은 곳에 위치한 하얀 성 호엔잘츠부르크 성은 중세의 성 모양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중요한 성이다. 1077년부터 짓기 시작해 1681년에 완성했다. 성의 발코니에 서면 잘츠부르크 시내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데, 정말 아름답다.
* 헬브룬 궁전
1615년에 지어진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여름 궁전으로 잘츠부르크 남쪽 약 10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이 궁전은 유럽 최초의 바로크식 정원과 물의 힘을 이용한 수많은 분수(Wasserspiele)로 특히 유명하다. 장난기가 많았던 대주교 마르쿠스 지티쿠스(Markus Sittikus)는 성안 곳곳에 혼자만 아는 분수를 만들어 놓고 초대한 손님에게 물벼락을 주며 즐겼다고 한다. 궁전 내부는 18세기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음악회와 연회장으로 사용되던 팔각형 돔이 있는 방이 있는 방이 특히 아름답다.
* 모차르트 생가
게트라이데 거리로 들어서서 조금만 가면 나오는 환한 노란색 건물, 모차르트 생가는 1756년 모차르트가 태어나 1773년 신시가의 모차르트 하우스로 이사가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집안에는 모차르트의 가계도와 그가 어린 시절에 사용하던 여러 가지 물품들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의 머리카락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외에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지은 최초의 바이올린 교본과 모차르트와 그의 누이 난네를(Nannerl : 엄청난 음악성을 가졌다고 전해지나,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활동하지 않았다고 함)이 사용하던 악기들도 전시되어 있다. 모차르트 집안사람들이 이 집에 살기 시작한 것은 1747년부터이며, 4층에 전세를 내어 살았다고 한다.
- 잘츠캄머굳 (Salzkammergut)
- 잘츠부르그 남동부 일대의 지역으로 알프스의 빙하가 이룬 크고 작은 76개의 호수와 2000m급의 산들로 수놓인 절경이 펼쳐진 표고 500-800m의 구릉지대다. 이 일대는 오스트리아 자연미의 극치로 하계 휴양지로 찾는 사람이 많다.
수백만 년 전 바다 속에 있었던 알프스산맥은 계속해서 융기하고 있다. 이유는 아프리카 대륙 판이 유럽대륙 밑으로 파고들며 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판이 부딛히고 있는 터키지역엔 지진이 자주 발생하고 있고 이태리남부 시칠리 섬엔 활화산이 강하게 활동하고 있다. 언젠가는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보다 높아져서 1만 m가 넘는 산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지각이 융기한 이후에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남겨진 소금은 다시 지각변동에 의해서 지층에 남게 되었다. 그 후 빙하기를 거치면서 알프스산은 빙하에 의해 눌리고 깎이고 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소금은 암염으로 굳어 졌고 산은 험준한 모습이 되었다.
빙하기가 걷히면서 녹은 얼음은 수많은 호수를 형성했다. 우연히 산에서 흘러나오는, 소금기 머금은 물을 발견한 사람들은 소금을 찾아냈으며, 계곡 깊숙이 정착해서 소금을 캐기 시작했다. 그 후 세계최초의 소금 광산을 계발하게된 이곳은 일찍부터 문명의 꽃을 피워 왔다.
소금의 중요성을 알게된 로마 교황청은 일찍이 이 지역을 차지하였고 주교들을 보내어 잘쯔캄머구트(소금창고지역)를 관리하게 하였다. 세월이 흘러 무역상인들이 잘츠부르크에 모여 살면서 도시가 발전했으며 이곳 호수가 주변에도 사람들이 모여들어 발전하게 되었다.
중세 이후엔 소금을 이용한 건강법을 알게 되면서 온천을 계발하였고 오스트리아 황실에서까지 이곳 발전에 한 몫을 거들었다.
자연이 준 경이로운 선물인 소금이외에 자연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곳은 가장 오스트리아를 대표하고 알프스를 대표하는 곳이며, 알프스의 다른 지역에 없는 동굴 속 얼음이 발달한 특이한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 잘쯔캄머구트 지역에서 가장 높은 다크슈타인 산에는 얼음동굴을 보러 오는 전 세계 관광객들이 끊이질 않으며, 역사 깊은 소금광산 또한 관광객들이 즐길 수 있는 시설을 잘 갖추어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 인스부르크 (Innsbruck)
- 12세기 인(INN)강을 잇는 다리라는 뜻을 가진 인스부르크는 8백년이나 된 티롤의 수도로서 잘츠부르그에서 기차로 3시간 거리에 있다.
예로부터 알프스를 넘기 위한 교통의 요지로 발전했으며 상업과 관광의 도시로 번창하였다. 천혜의 수력을 이용한 섬유, 식품 등의 산업이 활발했었다.
1964년과 1976년 두 차례의 동계올림픽과 1988년 페럴림픽이 열린 스키의 고장인 이곳은 교육의 도시로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대학생이고 4명의 대학교수가 노벨상을 탄 학구적 도시이다.
북쪽의 쇠사슬이라 불리는 노르드케테(Nordkette) 산줄기가 동서로 놓여있어 시내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압권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그림 같은 전원주택이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며 크리스탈의 대명사 스와롭스키는 티롤지방이 자랑하는 또 다른 세계적인 명소이다.
알프스 전경이 감싼 유서 깊은 고도(일명 알프스의 장미)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최초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막시밀리언 1세가 바로 지금 같이 만든 도시로 수많은 역사적 유물들이 있다. 황금 지붕, 왕궁, 대성당, 왕실 교회 등이 있는데 특히 왕실 성당 안에 있는 "어둠의 친구들"이란 청동 동상은 유명하다.
* 성 제임스 대성당
황금 지붕이 있는 건물을 끼고 오른편에 나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우뚝 솟은 대성당아 갑자기 나타난다. 대성당은 1717년에서 1724년 사이에 고딕에서 아주 웅장하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으로 바꿨다.
주 제단은 독일에서 온 거장 루카스 크란치 형제 중 형이 만든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로 유명하고, 천장과 벽공은 아삼(Asam) 형제가 만들었다. 그리고 인스부르그 편종을 달아서 평온함을 가미시켰다.
대성당 내부 왼쪽 앞면엔 튜톤 기사단(Teutonic Order)의 최고 대표인 ‘대공 막시밀리언 3세’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1620년에 카스퍼 그라스(Casoer Gras)가 만들었다. 이 무덤을 자세히 살펴보면 청동으로 된 장식이 아주 화려하고 섬세함을 알 수 있다. 곤충과, 도마뱀, 과일 같은 작은 조각들이 거대한 청동 관을 수놓고 있다.
1993년 2년 간의 공사 끝에 대성당은 다시 문을 열었다.
* Goldenes Dachi (작은 황금지붕)
도금한 동판기와 2천여 장을 올린 발코니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상징물이다.
* Hofburg
Maria Theresia 여왕이 아들 Joseph 2세 결혼식 때 유럽 왕가의 하객들을 맞기 위해 15C 왕궁을 로코코 스타일의 화려한 호텔식 건물로 개조한 것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Maria Theresia Strasse(거리)
Innsburck의 모습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명소로 성 안나 기념탑 및 파리 개선문을 축소해 만든 개선문이 있다. 기차 역에서 길을 가로질러 정면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Holidayinn 호텔을 지나 개선문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오른쪽 방향이 구시가지로 이어진 길인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다. 이 활기 넘치는 곳은 2334m 높이의 노르드케테(Nordkette :북쪽의 쇄사슬) 돌산 경관을 감상하기에 좋은 거리이다. 다양하면서 매력적인 오래된 집들이 즐비해 있고 길 중간쯤에 서있는 성 안나 기둥과 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이 아름답다.
* Triumphoforte 개선문
이 문은 1765년 마리아 테레지아와 남편 프란츠 1세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레오폴드가 스페인 공주와 결혼한 것을 축하해서 세웠던 것이다. 이것은 세운 것에는 합스부르그 왕가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다. 막시밀리언 황제가 이곳에서 통치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 카를 5세가 스페인 공주와 결혼해서 스페인 왕이 된 적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아들 역시 비슷한 경우에 해당된다. 때문에 결혼 정책을 통해 합스부르그의 영역을 확장 시켜나간 전통과 동일한 의미를 부여해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곳 인스부르그에 기념 문을 세웠다. 남쪽 면은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조, 왼쪽에는 혼인한 두 사람의 조각상, 오른쪽에는 왕녀 자매의 조각상으로 꾸며져 있다. 북쪽 면에는 결혼식이 있고 나서 1년 뒤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프란츠 1세의 죽음을 애도는 죽음의 천사와 슬퍼하는 여성이 조각되어 있다. 마치 인생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기쁨과 슬픔을 모두 표현했다.
* Anna 기둥
이 기념비적인 기둥은 1703년 7월 26일을 기념해서 1706년에 만들었다. 그 날은 스페인 계승 전쟁 때 이곳을 정복했던 남부 독일의 바바리아 공국 사람들이 물러간 날이며, 7월 26일은 성 안나의 생일이기도 하다. 기둥 꼭대기에 성모마리아가 서있고 성 안나는 기둥 밑부분 성 게오르게(George) 옆에 있다. 성 게오르게는 한때 티롤의 수호성인 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성인 St. 비길리우스(Vigilius) 와 St. 카시아누스(Cassianus)는 순찰을 도는 성인들이다. 이 주교들 동상이 있는 이유는 티롤지역을 결속시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그라쯔(Graz)
- 오스트리아의 주도. 오스트리아의 심장(Austria's queen of Hearts),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오스트리아의 두 번째로 큰 도시다. 합스부르그 왕가의 휴양도시로 사용되었지만, 또 역시, 현대화와 개혁을 추진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오스트리아 국경 확장을 위한 무기고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인구는 약 25만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