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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성지안내



1. 개요
기원전 4세기이래 오랫동안 타민족의 지배를 받은 그리스는 1830년에 터키로부터 독립했다. 그리스라는 국명은 그 나라말로 '명예의 사람' 또는 '귀족'이라는 뜻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헤라스'라 하고 자기 나라 국민을 '헤레네스'라고 부른다. 신화와 태양의 나라, 신전 등 고대유물이 많고 발칸반도에 위치하여,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다. 기원전 2000년부터 도시국가가 나타났고, 기원전 5세기 때는 아테네의 전성기였다.
국기의 청색은 바다를 나타내고 흰색은 하늘을 나타내고 십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리킨다. 청색과 흰색의 9개 줄무늬는 ‘자유인가, 죽음인가’라고 하는 그리스어의 9음절을 의미한다. 청색 바탕에 흰 십자 기(旗)(육지 기)도 있다. 현재의 국기는 「바다의 기」이다.
국가명 그리스 공화국 (The Hellenic Republic)
수도 Athens (인구: 약 350만명)
면적 131,957㎡ (본토 81%, 도서 19%)
인구 1,070만명(2003년)
주요민족 그리스인
주요언어 그리스어
종교 그리스 정교 (Greek Orthodox : 98%), 이슬람교(Muslim : 1.3%), 기타(0.7%)
그리스는 종교국가로서의 성격이 강하며, 국민의 98%가 그리스정교 (Eastern Orthodox Church of Christ)를 신봉하고 있음. 헌법에는 그리스정교를 Prevailing Relegion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사실상 국교와 다름없다.
화폐 유로(EURO)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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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강우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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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성 기후 - 겨울에 온화하고 여름에 습하고 건조하다
주요산업 -
전압 -
시차 -
1. 역사
1. 그리스 문명의 기원
그리스 문명의 기원인 에게(Aegea) 문명은 전기 크레타문명(혹은 미노스문명, 기원전 3000 ~ 1400)과 후기 미케네문명(기원전 1400 ~ 1200)으로 구분되며, 이 문명의 주인공은 아케아인, 이오니아인, 에올리아인, 도리아인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기원전 1000년경까지 씨족공동체를 유지하다가 기원전 8~9세기에 폴리스(Polis)를 형성하였고, 스스로를 「헬레네」인이라고 지칭하면서 선민의식을 가졌다.

2. 고대 국가시대
고대 폴리스(Polis)가 발전하여 형성된 도시국가들 중 가장 일찍 성장한 것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로서 각각 독자적 정부형태를 발전시켰고, 대외적으로 식민도시 건설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였다.
페르시아전쟁(기원전 492~479)후 아테네는 Pericles(기원전 495~429) 황금기를 맞이하였으며, 펠로폰네소스전쟁(기원전 431~404)등 내란이 이어졌으나, 연극, 철학, 역사, 수사학 등 모든 학문 분야에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알렉산더 사후 마케도니아가 삼분되면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안티고노스'가의 지배 하에 들어갔으며 이 시기와 로마 지배 기간의 일부에 해당하는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23~30)에는 폐쇄적, 자기 만족적 폴리스(Polis) 문명에 동방적 요소를 가미시켜 개방적이고 보편성 있는 문화를 발전시켰다.

3. 이민족 지배시대 [ 로마 비잔티움 지배기간 (B.C.2세기~A.D.1453) ]
기원전 2세기경부터 로마제국의 침략을 받아 지배 하에 들어갔으며 로마제국 분열(A.D. 295) 후에는 비잔티움(동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당시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 문명을 보존, 전파시키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

[ 오토만 제국 지배기간 (1453~1830) ]
오토만 제국의 지배 하에서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권장됐다. 그러나 이슬람교도가 되면 지배계층의 특권을 누릴 수도 있었던데 반해, 개종을 거부한 기독교도들은 비잔티움 시대의 농민이나 봉건제하의 농노와 같은 비참한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에 팽배하였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1821~27년까지 Ypsilantis 형제의 주도로 시작된 독립 항쟁이 확산되었고 마침내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1830년 2월 런던의정서에 의해 독립이 보장되어 3월 25일 독립왕국이 수립되었다.



* 근대국가 형성기간 (1830~1913)
독립왕국이긴 했으나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의한 내정간섭이 지속되었고 오토(Otto) 국왕 통치기간(1830~1863)중 3명의 섭정에 의한 개혁도 실패하였다. 1843년 영국, 러시아의 조종에 의한 군부쿠데타 발생 등 정국불안이 계속되었으며, 과거 찬란했던 그리스 회복을 목표로 한 ‘Megali Idea(위대한 계획)’도 주변 강대국에 의해 좌절되었다.
George 1세 통치(1863~1913) 중 1863년 입헌군주국이 되었으며, 1872년부터는 대외 지향적인 Heodoros Deliyiannes와 국내우선주의자인 Charilaso Tricoupes가 주도하는 양당에 의해 정국이 주도되었다.
1878년 사이프러스가 오토만 제국 지배로부터 영국지배로 넘어갔으며 그리스는 1912~1913년에 발생한 제1, 2차 발칸전쟁에서 승리하여 마케도니아의 일부지역을 회복하였다.

* 세계대전 기간 (1914~1949)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불가리아와는 뉘이(Neuilly) 조약을, 터키와는 세브르(Sevres) 조약을 맺어 인근국가와 국경을 확정하였다. 그러나 세브르 조약은 터키의 Mustafa Kemal에 의해 무효화되었고 이에 따른 터키와의 전쟁 결과 1923년 로잔느(Lausanne) 조약이 체결되어 양국 간에 현재와 같은 국경이 확정되었다. 로잔느 조약에 의해 해외로부터 130만의 그리스인들이 입국하게 됨으로써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왕정복귀 갈등 속에 1924년에 공화정이 선포되었으나, 1935년 왕당파의 승리로 왕정이 부활되는 등 정치 불안이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1년 1월부터 1944년 10월까지 독일, 이태리, 불가리아 등 동맹국에 의해 점령당하였으며, 동기간 중 좌익인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과 좌익 공화파인 민족민주연맹(National Democratic League)이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국왕의 전후 귀국에 반대하는 동시에 망명 정부와도 대립하였다. 1944년 10월 망명정부 수반인 George Papandreou는 소수의 영국군과 함께 아테네로 돌아와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무장해제와 해산을 시도하자 내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나 1947년 트루만 독트린에 따른 미국의 군사재정 지원으로 1949년에 내란이 종식되었다.

* 2차대전 이후 내란 종식 후 입헌군주제로 복귀한 그리스는 내각의 잦은 교체로 정정이 불안해지자 1967년 4월 우익군부에 의한 무혈 쿠데타가 발생하여 구주 역사상 최초의 군사정권이 수립되었다.
1974년 7월에는 사이프러스 내 Enosis 운동(사이프러스와 그리스 병합운동)을 지원하여 사이프러스 내 군부쿠데타를 유발시켜 Makarios 사이프러스 대통령을 축출했다. 그러나 터키의 군사개입으로 사이프러스 분단이 초래되었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Androutsopoulos 민간 내각과 군부 세력들이 퇴진한 후 민정복귀가 이루어지고 계엄령 및 언론통제가 해제되어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의 정치활동이 다시 허용되었고, 1974.12 국민투표를 통하여 입헌 군주제가 폐지되었으며 1975.6 공화제 헌법이 선포되었다.
2. 주요 순례지
아테네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전체 인구의 1/3이 모여 있는 대도시이다. 약 2,500년 전에 있었던 페르시아나 스파르타와의 싸움 때 도시국가의 중심 도시로, 중앙에 있는 아크로폴리스의 언덕과 헌법광장은 고대와 현대의 중심지역이라 할 수 있으며, 관공서나 현대적인 건물, 호텔 등이 모여 있는 아테네의 중추이다. 아테네는 아직도 서구문화의 원류를 간직하고 있다.
* 아테네와 아티카의 역사
아티카의 역사는 아테네 역사의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 신화에 따르면 여신 아테네(미네르바)는 신 포세이돈 (넵튠)과의 전투 후 자신이 도시를 지켜줬다는 증표로 도시에 올리브 나무를 주었다고 한다. 그 이후 올리브 나무는 고대 시대에 신성함으로 여겨졌다.
신이 준 또 다른 중요한 선물은 신 디오니소스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준 포도나무였다. 아티카의 끊임없는 역사와 고대에 관한 신화와 전통은 아크로폴리스와 아티카의 주변에서 되찾을 수 있는 선사시대에 관한 연구 결과에 의해 구체화된다. 전쟁을 반영하고 있는 고대신화는 아테네 주위 영토의 중앙집권을 성취하기 위해 아크로폴리스의 지도자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아테네와 아티카 영토는 훨씬 뒤인 기원전 800년경에 완전 합병되었다. 이 사실은 테시어스 (Theseas) 신화를 통해 알 수 있고 아테네 인구에도 영향을 끼쳤다.
아테네는 기원 전 7-8 세기동안 위대한 산업과 해군을 발전시켰다. 아테네의 수출은 그때 시실리, 이집트 그리고 흑해까지 도달했다. 새 기념관들이 세워졌고 도시는 첫 문화와 예술의 도약을 경험했다.
아테네는 또한 페르시아와의 전쟁 이후 민주주의의 출현에 힘입어 그리스의 주요 도시이고 동맹 주들의 중심이 되었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우스 황금시기동안 절정에 다다랐다. 당시 아테네는 전 세계에 힘, 문명, 문화 그리고 과학으로 유명했다. 이 시기는 고대 파괴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막기 위해 Ancient Athenian Wonder가 성취되었던 시대였다. 그 이후 전쟁은 아티카 해군 병력의 파괴와 아테네와 살라미아 섬으로 한정되면서 끝났다.
그 세력범위는 아티카에서 마케도니아 주까지 관할하는 마케도니아 필립 왕 2세(기원 전338)를 피하는데 충분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기원 전 145년경 아테네는 로마에 의해 나머지 그리스와 함께 점령당했다. 비록 로마인들이 정복자였지만 그들은 도시의 매력에 경의를 표했다.
기원 후 1년 후에 고딕부족은 아테네에 파괴적인 침략과 약탈을 자행했다. 비쟌틴 제국과의 단계적인 융합은 철학학교의 폐쇄, 성지에서 기독교 교회로의 변형, 그리고 아테네의 전반적 도시 대립으로 완성되었다.

아크로폴리스 (Acropolis)
폴리스(도시국가)의 중심이었던 언덕으로 폴리스의 수호신을 제사 지내는 신성한 지역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전성기에는 많은 예술가의 위대한 작품이 나타났으며, 아크로폴리스 중심에 있는 파르테논은 그리스식의 거대한 궁전으로 기원전 438년에 아테네여신을 제사 지내기 위하여 세워졌다.
아테네 한복판에 솟아 있는 언덕으로 아테네의 상징적인 유적지이자 서양 세계의 가장 중요한 고대 기념물이다.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하여 에렉티온 신전, 니키 신전 등 수많은 신전들이 2,500여 년의 찬란했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제사 지내던 성역으로, 지도층 인사들조차 출입이 제한되었던 곳이다.
아크로폴리스(‘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라는 뜻)에 최초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이다. 최초의 신전들이 미케네 문명 시대에 여신 아테나에 대한 숭배로 지어지기 시작했고, 기원전 6세기가 되어서야 사람들이 아크로폴리스 위에 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10년에 델피 신탁(Delphic Oracle)으로 신의 영역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아크로폴리스의 모든 건물들이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의 전야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페리클레스가 아크로폴리스를 재건하고자 노력하여 아크로폴리스를 신전의 도시로 변형시켰다. 이로써 고대 그리스 복구는 절정에 다다랐다. 이후 아크로폴리스는 다시 수세기에 걸쳐 재난을 겪어야 했다. 오토만 등 외국의 점령 기간 동안의 파괴, 영국 등 외국 고고학자들의 절도, 독립에 따른 부적절한 보수, 방문객들의 훼손, 지진 등. 1687년의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터키 공격은 최악이었다. 이때 아크로폴리스가 폭파되어 전 건물이 소실되었다. 터키로부터 그리스의 독립 이후 아크로폴리스 복원작업이 신생 그리스정부의 첫 번째 과제로 시작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파르테논 (Parthenon) 신전
아크로폴리스 중앙에 있는 가장 큰 환주식 신전이며, 그리스의 수호신 아테네를 제사 지내기 위해 건축되었다. 도리아식 건축의 최고봉이며, 기원전 438년에 완공되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 문화사적 제 1호.

파르테논이란 '처녀의 집'이라는 뜻으로,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졌다. 이 신전은 페리클레스에 의해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를 모시기 위한 것으로, 또 델로스로부터 가져온 조공품들을 보관하기 위한 곳으로 지어졌다.
이 신전은 기원전 479년에 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옛 신전 자리에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지시로 페이디아스(Pheidias)의 감독과 익티노스(Ictinus)와 칼리크라테스(Callicrates)에 의해 기원전 447년에 건축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438년에 완공되었으나, 외부 장식작업은 기원전 432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신전은 기원전 479년에 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옛 신전 자리에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지시로 페이디아스(Pheidias)의 감독과 익티노스(Ictinus)와 칼리크라테스(Callicrates)에 의해 기원전 447년에 건축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438년에 완공되었으나, 외부 장식작업은 기원전 432년까지 계속되었다.

신전의 플랜은 정면 8주식(柱式)의 직사각형 주주당(周柱堂 : 30.87×69.51m)이며, 내부(naos)는 마치 하나의 커다란 방처럼 보인다. 그러나 훼손되기 전에는 동서로 나뉘어 동쪽에 전면 6주의 프로나오스[前室]를 두고 3면을 열주로 둘러싼 도리아식 기둥을 쓴 2층 계단식의 성상(聖像) 안치소(cella)가 있고, 서쪽에는 오피스토도모스[後室]에 이어져 파르테논(처녀의 실)이라 부르는 보고(寶庫)가 있다.
본전에는 높이 12m에 이르는 본존(本尊)인 아테나 파르테노스(처녀 아테나)상이 안치되어 있다. 40피트에 이르는 금과 상아로 만든 아테나 상(Athene Pharthenos)은 페이디아스(Pheidias)의 작품으로,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아테네 상의 투구에 그려진 스핑크스와 그리핀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플루타르크는 페리클레스 편에서 페리클레스가 페이디아스를 신전 건조 자금 유용 혐의로 고발하는데 신상에 사용된 금을 벗겨내서 무게를 달았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일설에 아테나 신상은 기원후 4세기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고 하나 그 후의 자취는 알 수 없고, 로만 카피(Roman Copy)가 현재 국립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파르테논 신전 중 돋보이는 것은 신전의 조각품들이다. 대부분의 조각품들은 위대한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감독한 것으로, 파우사니아스는 동쪽의 페디먼트에 조각된 내용이 아테네가 그녀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설적인 동쪽 페디먼트의 대부분은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달의 여신 셀레네(Selene)의 말 머리를 볼 수 있다. 질주 후 기진 맥진한 모습으로, 마치 태양신 헬리오스(Helios)의 말이 하루를 열기 위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오세아누스(Oceanus)에서 막 떠오르는 것처럼.
서편의 페디먼트는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아팃카 제전을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쟈크 케리(Jacques Carrey)가 1674년에 그려놓았던 그림 덕분에 복원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년 되지 않아 모로시니(Morosini)가 아테나의 전차와 말들을 제거하려다 그것을 파괴하는 우를 범했다. 그 후 서편의 페디먼트는 그리스와 터키 전쟁 중 파르테논 신전에 투하된 폭탄으로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강의 신이라고 전해지는 일리오스(Illios)는 서편 페디먼트의 코너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페디먼트의 귀퉁이는 조각으로 채워 넣기가 아주 힘든 부분이지만 일리오스의 뛰어난 배치는 비효율적인 공간을 효과적으로 살려냈다.

또한 본전 외벽 상부 4면에는 길이 163m에 이르는 이오니아식 대 프리즈 장식(현존 130m)이 있다. 이 프리즈는 아테나에게 바치는 장대한 파나테나이아의 대제(大祭)를 부조한 것으로, 제전의 절정은 아테나 여신에게 봉헌할 신성한 페플로스(peplos)를 들고 아테네를 행진하는 모습이다. 행진에 등장하는 인물은 신들을 합쳐 총수 360여 명, 말 219필을 헤아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프리즈는 1687년 폭발로 파괴되었다. 그 귀중한 잔존부분 가운데 신전에 남아 있는 일부와 아크로폴리스미술관/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부분을 제외한 여타의 대부분은 대영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이들 대조각군은 거장 페이디아스가 직접 지도하여 아르카메네스 등 뛰어난 조각가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신전의 안정된 비례와 장중함은 고전시대 그리스 정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신전에 남아있는 몇 개의 석판 가운데 일부는 영국의 시인 키이츠(Keats)의 시 "Ode on a Grecian Urn"에서 '하늘에서 울고 있는 어린 소(heifer lowing at the skies)'라는 구절의 동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신전은 사방으로 92개의 메토프(작은 벽)가 있는데, 모두가 섬세하면서도 양각의 정도가 큰 부조로 만들어 졌다. 각각 그리스인들(특히, 아테네)의 페르시아 전쟁 승리를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쪽은 대신전쟁(對神戰爭, Gigantomachy), 서쪽은 아마존 전쟁(Amazonmachy), 남쪽은 켄타우로스 전쟁(Centauromachy), 마지막으로 북쪽은 트로이 전쟁(Trojan War)을 형상화하고 있다.
남서쪽 메토프의 일부는 신전의 건축 특성을 설명하는데 자주 사용되는 부분으로서 물방울 무늬(gutta)가 사용되었다. 남쪽 메토프는 다른 것들과는 달리 상태가 양호하다. 19세기 초 스코틀랜드의 엘긴 경(lord Elgin)은 남쪽 메토프 14개를 가져갔고, 현재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신전의 지붕을 덮었던 바닥기와, 그리고 아크로테리아(akroteria, 막새). 파르테논 신전은 그리스 건축물 중에서 지붕을 포함해서 대리석으로만 지어진 유일한 것으로, 얼핏 보아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바닥 중앙이 약간 솟아 있고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도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기술자들이 사람 눈의 착시현상까지 계산하여 멀리서 바라보도록 설계, 축조한 것이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고도로 치밀하게 건축된 파르테논 신전은 250년 동안 본래의 기능이 아닌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페이디아스가 만든 거대한 조각상이 철거된 이후 5세기까지는 그리스도교 사원으로, 1458년 아테네를 점령한 투르크 지배 때는 술탄의 후궁(harem)으로, 그리고 심지어는 종탑으로 사용되면서 17세기까지만 해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687년 10월 26일 베네치아 군대가 쏘아 올린 포탄이 파르테논 신전에 저장되어 있던 터키군의 화약을 폭파시킴으로써 지붕이 날아가 버렸으며, 내부 공간과 프리즈, 그리고 아직 복원되지 않은 남쪽 기둥 6개와 현재는 복원된 북쪽 기둥 8개가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 에렉티온 신전 ]
파르테논 신전 북쪽에 세워진 이오니아 양식의 작은 신전. 파르테논 신전이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념물이긴 하나 그것은 신전이라기보다는 전시기념물에 가깝다. 아크로폴리스에서 신전 역할을 한 곳이 바로 이 에렉티온 신전이다.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곳에 세워졌으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그의 삼지창을 내던져 꽂힌 곳으로, 지혜의 신 아테나가 올리브나무를 심은 곳이다. 따라서 이 신전에는 이들 신들의 전설을 본뜬 조각상들이 있다.
이 신전은 아테네의 신화상의 왕인 에릭토니우스(Erichthonius)의 이름을 따 붙인 신전이다. 따라서 아테나, 포세이돈, 에릭토니우스를 제사 지내왔다. 2개의 신실(神室)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아테나 신실, 또하나는 포세이돈 신실이다. 이 신전은 아름다운 여인상기둥(女像柱)들로 유명하다.
원래 이 신전은 페리클레스가 아크로폴리스를 위하여 설립 계획을 세웠으나 펠레폰네소스 전쟁으로 그의 생전에 이룩되지 못하고, 그가 죽은 지 8년 후인 기원전 421년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406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아리오스 파고스 (Arios Pagos) ]
아크로폴리스 왼편 아래쪽(북서쪽)에 위치한,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널찍한 바위다. 바울로는 2차 전도여행 때 우상으로 가득찬 아테네에서 회당에서 유다인들과 또 하느님을 공경하는 이방인 유다 교도들과 토른을 벌였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몇몇 철학자들에 의해 아레오 파고 법정으로 간 사도 바울로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설교한 유명한 장소이다.(사도 17, 16-34)]
[ 아고라 (Agora) ]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는 고대 그리스 유적지. 아고라란 광장이나 시장을 뜻하는 말이다. 기원전 6세기경부터 건물과 신전이 들어서고, 광장 주변에는 노점상이 모여 시장이 서기도 했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 철학, 문화, 인생을 논하거나 상업정보를 교환하던 광장이다. 1931년부터 대대적인 발굴작업이 벌어져, 아타로스의 스토아가 복원되어 박물관이 되어 있고, 여기서 발굴된 것이 진열되고 있다.
[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
104개가 있던 돌기둥 가운데 15개만 남아 있는 고린토 양식의 건축으로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그리스 최대의 신전이다. 근처에 아드리아누스문이 있다.
올림포스 산의 제우스에게 봉헌된 신전 유적지. 전설에 따르면 이 곳에 신전이 세워진 것은 신화상의 듀켈리온(Deucalion)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역사시대에 제우스 숭배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515년 아테네의 참주(僭主)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착공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AD 124~125년경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신전 안에는 황금과 상아로 만든 제우스 상이 있다. 아크로폴리스보다 웅장했다는 건물은 4세기에 고트족이 파괴했고 지금은 열 다섯 개의 코린트식 기둥만 남아 있다.
[ 니케 신전 ]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모시는 신전이다. 기원전 420년경에 건축가 칼리크라테스(Kallikrates)에 의해 건축되었다. 이오니아 양식으로 열주가 아름다운 신전이다. 이 신전 역시 1686년 터키에 의해 분해되어 입구에 거대한 대포가 놓여져 있었다. 1836년~1842년 사이에 복원되었다. 1936년에 플랫폼이 다시 붕괴되어 재복원하였다.
[ 디오니소스 극장 ]
아크로폴리스 남동쪽 비탈에 있는 반원형의 극장. 이 극장은 처음에는 기원전 6세기 무렵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해 디오니소스 페스티발이 개최된 이래 목조로 세워졌었다고 한다. 이후 기원전 5세기 황금시대 동안에 매해 페스티발이 이곳에서 열렸고, 정치인들이 공연의 스폰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극장은 기원전342~326년 사이에 리쿠르구스(Lycurgus)에 의해 다시 돌과 대리석으로 재건축 되었다. 이후 로마시대에도 극장은 공연은 물론 국가경사나 의식에 사용되었다. 관객석 맨 앞줄에는 귀족석까지 마련되어 있다. 무대 뒤쪽 한 층 높은 곳은 배우들이 연기하던 곳인데, 그 밑에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일생을 묘사한 뛰어난 조각이 남아 있다.
[ 아드리아누스의 문 (Adrianos's Gate) ]
2세기 초 황제 아드리아누스에 의해 지어졌다. 뒤에 고대 그리스의 가장 큰 신전인 올림피온 제우스 신전의 폐허가 있다.
제우스신전 바로 앞에 있는 신구(新舊) 아테테의 경계선도 겸하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문이다. 신구란 고대 아테네와 로마시대 아테네를 구분하는 개념이다. 개선문 형식의 이 문은 AD 131년에 아테네인들이 아테네문명을 칭송하고 본받고자 노력한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를 칭송하기 위하여 건설하였다. 이 문 양면에 두개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아크로폴리스를 향한 한 면에는 "이것은 테세우스(Theseus)의 고대 도시인 아테네이다."라고, 다른 면에는 신도시를 향하여 "이것은 테세우스의 도시가 아닌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인 아테네이다."라고 씌어 있다.
[ 올림픽경기장 ]
신타그마 광장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원래는 일리소스(Ilissos)강을 끼고 아그라(Agra)계곡과 아르데토스(Ardettos)계곡 사이에 자연스런 홈이 나 있어 이것을 스타디움으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기원전 330~329년에 리코우르고스(Lykourgos)에 의해 '위대한 판 아테나 축제(Great Panathinaea Festivities)'의 운동 경기를 위한 스타디움으로 변형되었다. 그후 AD140~144년 사이에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에 의해 스타디움이 복원되었는데, 이것이 1870년에 발굴된 현재의 모습이다. 즉 길이 204.07m, 넓이 33.35m의 말발굽모양 구조이다. 약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로마시대에는 스타디움이 투기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근대에 와서는 19세기 말엽에 알렉산더 대부호 애버로프(G.Averof)에 의해 스타디움이 복원되었는데, 1896년에 부활된 최초의 올림픽게임이 여기에서 개최되었다.
[ 신타그마 광장 ]
아테네의 중심 광장. 전국으로 뻗은 도로의 기점이다. 일대가 그리스 전체의 핵심이라고 할 만하며, 관청과 비즈니스빌딩, 쇼핑가들이 몰려 있다. 항공사, 여행사도 많이 모여 있고, 엘리니콘 공항을 오가는 공항버스도 이곳에서 발착한다. 광장에는 카페니온(옥외 찻집)이 늘어서 있어 쉬기에 알맞다.
신타그마 광장이란 '헌법 광장'이라는 뜻인데, 1843년 이곳에서 최초의 헌법이 공포된 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또 이곳은 기원전 335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리케이온 학원을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
고린토 * 고린토 역사
아티카의 역사는 아테네 역사의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 신화에 따르면 여신 아테네(미네르바)는 신 포세이돈 (넵튠)과의 전투 후 자신이 도시를 지켜줬다는 증표로 도시에 올리브 나무를 주었다고 한다. 그 이후 올리브 나무는 고대 시대에 신성함으로 여겨졌다.
신이 준 또 다른 중요한 선물은 신 디오니소스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준 포도나무였다. 아티카의 끊임없는 역사와 고대에 관한 신화와 전통은 아크로폴리스와 아티카의 주변에서 되찾을 수 있는 선사시대에 관한 연구 결과에 의해 구체화된다. 전쟁을 반영하고 있는 고대신화는 아테네 주위 영토의 중앙집권을 성취하기 위해 아크로폴리스의 지도자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아테네와 아티카 영토는 훨씬 뒤인 기원전 800년경에 완전 합병되었다. 이 사실은 테시어스 (Theseas) 신화를 통해 알 수 있고 아테네 인구에도 영향을 끼쳤다.
아테네는 기원 전 7-8 세기동안 위대한 산업과 해군을 발전시켰다. 아테네의 수출은 그때 시실리, 이집트 그리고 흑해까지 도달했다. 새 기념관들이 세워졌고 도시는 첫 문화와 예술의 도약을 경험했다.
아테네는 또한 페르시아와의 전쟁 이후 민주주의의 출현에 힘입어 그리스의 주요 도시이고 동맹 주들의 중심이 되었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우스 황금시기동안 절정에 다다랐다. 당시 아테네는 전 세계에 힘, 문명, 문화 그리고 과학으로 유명했다. 이 시기는 고대 파괴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막기 위해 Ancient Athenian Wonder가 성취되었던 시대였다. 그 이후 전쟁은 아티카 해군 병력의 파괴와 아테네와 살라미아 섬으로 한정되면서 끝났다.
그 세력범위는 아티카에서 마케도니아 주까지 관할하는 마케도니아 필립 왕 2세(기원 전338)를 피하는데 충분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기원 전 145년경 아테네는 로마에 의해 나머지 그리스와 함께 점령당했다. 비록 로마인들이 정복자였지만 그들은 도시의 매력에 경의를 표했다.
기원 후 1년 후에 고딕부족은 아테네에 파괴적인 침략과 약탈을 자행했다. 비쟌틴 제국과의 단계적인 융합은 철학학교의 폐쇄, 성지에서 기독교 교회로의 변형, 그리고 아테네의 전반적 도시 대립으로 완성되었다.

* 고린토 교회
사도 바울로는 2차 전도 여행(50~52년경)중에 그리스로 건너가서 적어도 4개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우선 그리스 북부 지역 마케도니아에 필립비 교회, 데살로니카 교회, 베레아 교회를 차례로 설립한 다음 남부지역 아카이아로 옮겨가서 고린토 교회를 세웠다.
바울로는 실라와 디모테오를 베레아에 남겨두고 베레아 교우 일행과 더불어 뱃길로 510킬로미터를 남행하여 문화도시 아테네에서 전도했으나 실패하여 교회를 세우지 못했다(사도 17,14-34). 실라와 디모테오가 아테네로 내려오자 바울로는 데살로니카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궁금하기도 하고 또 한편 그들을 재교육하려는 뜻으로 디모테오를 데살로니카로 파견하고(1데살 3,1-5), 바울로 자신은 그리스 남부 지역 아카이아 속주의 수도 고린토로 내려갔다. 이때 실라도 동행한 것 같다.
바울로는 아테네에서 서남쪽으로 89킬로미터 떨어진 고린토로 내려가 무려 18개월간 머물면서 큰 교회를 세웠다(사도 18,1-17). 바울로는 고린토에서도 손수 일을 해서 생계비와 전도비용을 충당했다. 그러나 필립비 교우들이 보낸 물질적 도움만은 기꺼이 받아들였다(필립 4,14-16; 2고린11,9). 바울로는 마침 로마에서 고린토로 쫓겨온 유대계 그리스도인 부부 아퀼라와 브리스킬라를 만나 그 집에 살면서 그들과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고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전도했다(사도 18,1-4). 49-50년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추방한 적이 있는데, 그때 유대계 그리스도인 부부 아퀼라와 브리스킬라는 고린토로 피신해 살던 중 바울로를 만나 함께 생활하고 일하면서 고린토 교회 창립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디모테오가 데살로니카에서 고린토로 내려와서 데살로니카 교우들의 충실한 신앙생활을 전하는 희소식을 전하자(1데살 3,6) 바울로는 데살로니카 교우들에게 편지를 한 통 보냈으니, 이것이 곧 데살로니카 전서이다. 이는 바울로의 서간집 중에서 뿐 아니라 신약성서를 통틀어 가장 먼저 씌어진 글이다.
고린토 전도 후반에 유대인들이 바울로를 아카이아 총독 갈리오의 법정에 끌고 가서 그를 종교 이단자로 고발하였다. 그러나 당대 로마의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로서 네로를 가르친 세네카의 형인 갈리오 총독은 매우 현명해서 종교 문제에 관한 소송을 기각했다(사도 18,12-17). 고린토 유적지에 가보면 레카이온 중앙통 남쪽 끝에 당시 대중 연설도 하고 공개 재판도 한 연단 축대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아울러 이 고발 사건은 바울로의 연표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델피에서 발굴된 금석문에 따르면 갈리오는 51-52년에 아카이아 총독으로 재직했다. 이 무렵에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 창립을 마무리하고, 아퀼라와 브리스킬라를 데리고 동쪽 외항 겐크레아에서 승선하여 에페소에 갔다가, 이곳에서 이 부부와 작별하고 자신은 가이사리아, 예루살렘을 거친 다음, 출발지인 안티오키아로 되돌아갔다(사도 18,18-22).
고린토 교회의 초창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유대인들이 제법 있다.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사도 18,1-4, 18-28; 1고린 1,14; 로마 16,3-5), 회당장 그리스보(사도18,8; 1고린 1,14)와 소스테네(사도 18,17; 1고린 1,1)는 모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다.
그 밖에도 고린토 교회의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고린토에서 제일 먼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바울로에게 세례를 받은 스데파나 집안 사람들(1고린 1,16; 16,15-17), 바울로에게 세례를 받고 나서 자기 집을 고린토 신도들의 집회 장소로 제공한 가이고(1고린 1,14; 로마 16,23), 에페소에서 전도하던 바울로에게 고린토 교회 소식을 전한 여교우 클로에 집안 사람들인데(1고린 1,11) 이들이 유대인들인지 이방인들인지 알 길이 없다. 또한 고린토 동쪽 외항 겐크레아 신도 중 이름이 알려진 이는 여교우 페베인데, 바울로는 놀랍게도 그를 일컬어 “겐크레아에 있는 교회의 봉사자”(이 ‘봉사자’라는 말마디는 ‘부제’(副祭)와 같은 뜻)라고 높인다(로마 16,1). 54년경 스데파나와 함께 에페소에 있던 바울로를 찾아간 포르두나도와 아카이고(1고린 16,17) 역시 고린토 교회의 초창기 신도였다.

바울로는 1년 반 동안 거기 머무르면서 매우 활발히 전도하였다(사도 18, 11). 신도들 대부분은 이방인 출신 입교자들이었다. 또한 신도들은 상류계층에 속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었다(1고린 1, 26-28). 바울로가 고린토 교회를 세워놓고 다음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다계 그리스도인인 아폴로가 고린토 교회에 와서 활약하였다. 그는 개종하기 전에 수사학을 익힌 달변가였던 까닭에 개종한 다음에 당대 교회에서 유명한 설교가로 손꼽혔다(사도 18, 24~28).

* 고린토 교우에게 보낸 시간
신약성서에 바울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오직 고린토 전/후서 두 편만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은 그보다 더 많은 편지들을 써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로는 51-52년경 고린토를 떠난 다음, 3차 전도여행에 올라 54년경 에페소에서 활발히 전도하던 중(1고린 16,8-9) 고린토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신약성서의 고린토 전서다. 그러나 바울로가 고린토 전서에 앞서 고린토인들에게 또 한 편의 편지(A서간)를 써 보냈다고 스스로 확언하는데(1고린 5,9), 불행히도 이 편지는 전해오지 않는다. 고린토전서 5장 9절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는 그 편지에서 음행하는 자들과 상종하지 말라고 교우들에게 지시했다.

바울로가 고린토 전서를 보낸 다음에 그와 고린토 교우들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바울로가 예루살렘 교우들을 위한 모금을 독려코자(1고린 16,1-4) 디도와 협조자 한 사람을 고린토 교회를 파견하였으나(2고린 12,17-18), 고린토 교우들이 순종하기는 커녕 외부에서 들어와 바울로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한 유대계 그리스도교 전도사들의 사주를 받은 나머지 바울로의 사도직을 부정하기에 이른 것 같다. 바울로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몸소 고린토 교회를 찾아갔다. 고린토 교회 창립 때의 방문에 이은 두 번째 방문이다(2고린 13,2). 그러나 이미 사태는 너무 악화되어 고린토 신도들 대부분은 바울로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동조했고, 남자 교우 한 사람은 바울로에게 공개적으로 심한 모욕을 가했다(2고린 2,5-11; 7,12; 12,20-21).

바울로는 에페소로 되돌아와서 “몹시 괴롭고 마음이 답답하여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2고린 2,4; 2,3.9; 7,8.12 참조) 고린토 교우들에게 비통한 편지를 써 보냈다. 아마도 디도가 이 편지 심부름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이를 일컬어 ‘눈물편지’라고 하며, 바울로가 고린토 교회로 보낸 세 번째 편지이다. 이 편지는 자신이 반대파에게 대항하여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고린토 교우들의 맹성을 촉구하는 눈물겨운 서간이다.
디도를 시켜 고린토 교우들에게 ‘눈물 편지’를 띄우고 난 다음 바울로는 에페소를 떠나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를 거쳐 그리스 북부 지역 마케도니아로 건너갔다. 거기서 사도는 노심초사 디도가 고린토에서 돌아오기만 기다렸다(2고린 2,12-13; 7,5).
마침내 디도가 와서 뜻밖의 희소식을 전했다. 고린토 교우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바울로와 화해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요, 전에 바울로에게 불의를 행한 무뢰한 교우들이 처벌했다는 것이다.(2고린 2,5-11; 7,6-16). 이에 바울로는 반갑고 고마워 고린토 교회로 네 번째 편지(화해 편지)를 띄웠는데 이것이 지금의 고린토 후서 1-9장이다. 때는 57년경. 디도는 형제 두 명과 함께(2고린 8,6.17-18.22; 9,3) 이 편지를 가지고 마케도니아에서 고린토로 내려가서 예루살렘 교우들을 위해 모금도 하고(2고린 8-9장; 로마 15,25-31), 바울로의 방문도 준비했다. 곧이서 바울로도 고린토에 당도하여 석 달 가량 모처럼 조용히 지내던 기회에(사도 20,3)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총정리하여 방대한 로마서를 집필하였다. 지금의 고린토 후서에서 바울로는 모처럼 신상발언을 많이 한다. 특히, 고린토 교회에 침입하여 바울로의 사도직을 부정한 사람들을 상대로 일대 논전을 벌이는 10-13장(눈물편지)에서 자신의 과거 행적과 현재의 심경을 거침없이 토론한다. 따라서 고린토후서야 말로 바울로의 인간성과 사고관을 살피는데 더 없이 좋은 보고이다.

* 고린토 유적 - 아크로 고린토
고대 고린토의 아크로폴리스 유적지. 해발 575m. 이 유적지가 있는 산 아래에 고대 고린토 유적지가 있다. 지진과 외부의 침입으로 고린토인들이 아크로 고린토 산으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어 산 정상에 요새를 지어 살게 되었다. 이 요새는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짓기 시작하여, 그 기초 위에 로마, 비잔틴, 프랑크족, 베네치안, 마지막으로 투르크(터키)까지 각종 유적과 요새를 건조하였다.
유물도 대부분 로마시대의 것들인데, 예외적으로 기원전 5세기의 도리안 스타일의 아폴로신전이 그리스양식이며, 고대 고린토 유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이다. 이 아폴로 신전은 아고라 북쪽 끝에 있는데, 기원전 6세기경에 태양신 아폴론을 위해 축조했는데, 현재는 도리아식 일곱 개의 기둥만 남아 있다. 그리스 신전 중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다음으로 오래되었다.
산의 서쪽 면에서 아크로 고린토로 들어가는 갈 수 있는데, 삼각 면의 돌 벽과 3개의 문으로 연결된 길이 있다. 고대시대에는 이 산 비탈에 많은 사원과 신전이 있었으며, 이 중 가 장 주요한 신전이 이 산의 2개의 정상 가운데 더 높은 곳에 있었던 아프로디테 신전이다. 이 신전의 유적은 중세와 투르크(터키) 지배시대에 지어진 건물들로 없어졌다.
이 신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페이레네 샘(Upper Peirene Fountain)이 있었다. 고대 고린토 유적지의 페이레네 샘(Lower Peirene Fountain)과 쌍을 이루는 샘이다. 전설에 의하면 페이레네는 여자였다고 하는데, 아르테미스(Artemis)가 살해된 그의 아들을 위하여 눈물로 마술을 걸어 페이레네를 샘으로 변하게 했다고 한다. 아크로 고린토 정상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장관이다.
이 샘의 서쪽에는 레케온 거리(Lecheon Road)로 통하는 계단들이 있으며, 이 거리의 동쪽 면에는 아폴로의 안뜰(Peribolos of Apollo)이 있는데, 측면에 이오니아 양식의 열주(列柱)들이 있다. 이 근처에 공중 화장실(Public Latrine)이 있다. 이밖에도 코린트식 기둥 양식을 잘 나타낸 로마시대의 옥타비아신전(Temple of Octavia)과 오데이온(Odeon) 등이 있다. 이 유적지에는 코린트박물관이 있는데, 신석기시대부터 미케네시대에 이르기 까지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으며, 이밖에도 로마시대의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로마시대 유물 중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이 로마 빌라에서 나온 모자이크이며, 성 베드로가 연설한 연단 등이 있다.

* 고린토 운하
사로니코스만과 코린시아코스만을 연결하는 운하. 운하 위로는 열차와 버스가 다니는 다리가 가로 놓여 있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배를 육지로 끌어 올려 궤도를 이용해서 이동시킨 듯한 흔적이 남아 있다.
운하를 파서 코린트 지협과 이오니안해와 에게해를 연결하겠다는 아이디어는 고대 고린토의 페리안더(Periander)에 의해 최초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사업의 방대함으로 당시에는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 사이 많은 지도자들, 즉 알렉산더대제, 칼리귤라 등이 운하 계획을 가졌으나 실현하지 못하였고, AD 67년 네로황제 때 실제 작업에 들어가 6,000명의 유대인 노예를 동원하여 건설하기 시작하였으나 곧 갈리아인들의 침입에 의해 중단되었다. 마침내 19세기(1883~93)에 가서야 프랑스 엔지니어회사에서 이 운하를 완성시켰다.
운하는 단단한 암석을 깎아 만든 것으로 길이 6km, 넓이 23m, 깊이 90m이다. 이 운하로 피레우스(Piraeus)항이 주요한 지중해 항구로 성장할 수 있었다.
네아폴리스 (카발라 Kavala)
* 그리스도교 유럽전파의 시발지
흔히 그리스도교를 서양 종교라고 한다. 가톨릭 교회의 본산은 로마에 있고 역대 교황님들도 예외 없이 서양인들이었다. 동방 정교회도 희랍(그리스) 정교회라고 불릴 만큼 그 중심은 유럽의 희랍(그리스)이다. 종교 개혁을 일으켜 개신교 역사를 연 루터나 칼벵도 모두 서양인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서양 종교인가? 그 시발점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정답이다. 성경의 현장인 성지 이스라엘은 아시아 대륙에 속하는 중동지역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혈통인 셈족은 결코 유럽인 계보가 아니다. 사도 바울로가 태어난 다르소도, 그가 전도 여행을 하면서 세웠던 초대 교회들도 대부분 아시아 땅인 터키에 있다. 그렇다면 아시아에서 발원한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서양 종교가 되었을까? 그리스도교 복음이 유럽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뿌리내리고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것은 교회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다. 세계 교회사에 새로운 장을 연 이 사건은 사도 바울로의 두 번째 전도 여행 때 일어났다. 바울로는 첫 번째 전도 여행 때 주로 오늘날 터키 남부지역에 복음을 전했다. 두 번째 전도 여행 때 그의 목적지는 터키의 북부지역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전도 활동은 순조롭지 않았다.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전도계획은 난관에 처하게 되었다.
실망과 좌절이 겹친 바울로는 발길을 서편으로 돌려 트로아스에 다다랐다. 트로아스는 소아시아 서쪽 끝에 있는 항구였다. 호머의 작품 ‘일리아드’의 토리이 전쟁으로 유명한 트로이와 지척인 곳이다.
트로아스(오늘날 터키 땅)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이 곳으로 옮기려고 계획했을 만큼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요한 항구였다.
만일 카이사르가 암살 당하지 않았더라면 트로아스는 세계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트로아스에 남아있는 로마 시대의 유적(10km에 달하는 성벽, 야외 원형극장, 로마식 수로 등)은 당시 이 항구도시의 중요성을 잘 말해 준다. 트로아스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면 마케도니아 지역(그리스 북부지역)에 도달하게 된다. 로마 제국은 오늘날의 그리스를 북부의 마케도니아 지역과 남부의 아가야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 사도바울의 전도여행
좌절을 딛고 바울로는 에게 바다 건너편 마케도니아 지역을 바라다보는 트로아스 항구에서 밤에 하나의 환상을 보게 되었다. 마케도니아 사람이 바울로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하며 간청하는 환상이었다(사도행전 16.6-10). 바울로가 선교 사명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당시 바울로의 선교는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장애와 난관은 범인을 좌초시키는 암초가 되지만 확신과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미래로 날아오르는 도약대가 된다.
바울로는 유럽 선교의 새로운 꿈을 안고 트로아스 항구로 달려가 마케도니아로 가는 배에 올랐다. 기독교의 복음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트로아스에서 가장 가까운 마케도니아 지방의 항구는 네아폴리스였다. 바닷길로 185km쯤 떨어진 곳이다. 바울로가 당시 하루만에 갈 수 있는 뱃길은 아니었다. 마침 중간 지점에 사모드라게 섬이 있어 쉬었다 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바울로가 탔던 배는 일단 사모드라게 섬에 기항했다. 현재 이 섬의 북서쪽에 있는 가마리오티사 항구였을 것이다. 오늘날도 이 섬에서 제일 큰 항구인 가마리오티사에는 이 해역을 다니는 배들이 빈번하게 드나들고 있다. 항구에서 내륙을 바라다보면 해발 1,650m의 펭가리 산이 위엄있게 서 있다. 에게해는 3,000명의 어민들이 살고 있다.

* 바올로 기념도로
바울로가 탄 배는 사모드라게 섬을 출발하여 100km 쯤 더 항해한 끝에 마침내 네아폴리스에 닻을 내렸다. 서기 50년경이었다. 네아폴리스 항의 유럽 대륙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울로가 첫발을 내디딘 항구로서 교회사에서 영예로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해변 부두를 지나는 길 이름도 ‘바울로 로(路)’로 되어 있다. 위대한 전도자의 도착지점을 기념하고 있다.
바울로가 도착했을 당시 네아폴리스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중요한 교통 요지였다. 로마로 향하는 에그나티아 대로(Via Egnatia)가 이 곳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아시아에서 배를 타고 네아폴리스 항구에 도착한 사람들은 에그나티아 대로를 따라 목적지로 흩어져 갔다. 사도 바울로도 네아폴리스에 도착한 후 이 대로를 따라 16km 떨어진 필립비로 향했다.
사도 바울로의 제 2/3차 전도여행 때 드나든 유럽 전교 기착지 네아폴리스. 그러나 투르크(터키) 통치시대부터 이르러 카발라(Kavala)로 변해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오늘날 인구 7만명 정도의 활기찬 항구도시이다. 현재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데살로니카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이 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바울로의 네아폴리스 도착을 기리는 바울로 기념 성당이다.
필립비
* 역사
지금은 어지간한 지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도시로 데살로니카 북서쪽에 있는 카발라에서 20km 떨어져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 당시에는 꽤나 번창한 도시였다.
필립비 교회는 바울로가 제2차 전도여행 때 마케도니아의 주요 도시 필립비에 세운 유럽에서의 첫 번째 교회다. 이 도시는 원래 크레미데스(Kremides, 작은 샘들)라고 불리었는데, 기원전 385-354년 경 알렉산더 대왕이 부친 필리포스 2세가 은과 금광으로 부유해진 이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필립비’라고 명하였다.
기원전 168년 로마인들이 도시를 점령한 그로부터 20년 후에 로마의 속주 도시가 되었다. 기원전 31년 필립비시는 이탈리아의 도시들처럼 자치권, 면세권, 절대사유권 등 로마의 권리를 누리는 자치시로 승격되었다.
주민 구성은 로마 군인의 파병 등으로 인구의 절반이 로마인이었고, 유대인들도 소수의 그룹을 형성하여 살았다. 주민 분포상 종교도 여러 가지 혼합되었으며 경제적으로 윤택하였다.

* 바올로 사도의 필립비 전도
사도 바울로는 2차 전도 여행 시기인 50-52년경 실라와 디모테오를 데리고 오늘의 터키 서해안에 자리잡은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에 이르러 교회를 세운 다음(사도 16,8-11), 거기서 내륙으로 15km 떨어진 필립비에 이르러 유럽 땅에서는 처음으로 이곳에 교회를 세웠다. 필립비인들은 바울로에게 있어 “유럽에서 얻은 맏아들”이었다. 바울로는 이 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제3차 전도여행 때도 두 번씩이나 방문하였고, 그곳의 신자들도 사도 바울로에게 감사와 애정의 표시로 물질적 도움을 주었다. 복음 선포에 장애가 될 것을 꺼려 어느 곳에 가서든 손수 노동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바울로도 필립비 신자들의 도움만을 기쁘게 받아들인 것은 극히 예외적이다. 따라서 바울로가 필립비 신자들을 얼마나 친근하게 대했고, 서로간의 신뢰가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알 수 있다.
바울로는 다른 지역의 선교 활동 중에도 필립비 교회와 계속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어떤 교회보다도 이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였다.(사도 16,12-40; 1데살 2, 2; 1고린 7,5-7; 필립 4,15-16). 또한 필립비 신자들 역시 바울로를 스승으로 믿고 따랐으며 데살로니카와 고린토에 있는 바울로를 여러 차례 도왔다.
필립비에서는 바울로는 먼저 유대인의 기도소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는 유대교 개종자요 옷감 장수인 리디아의 집에 머물렀다(사도 16,14-15).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반대자들의 고소로 투옥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난 뒤 치안관들의 요청으로 이 도시를 떠난다(사도 16,16-40).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를 떠나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카로 갔다.(사도행전 17,1) 현재 필립비에는 바실리카 회당, 리디아의 기념교회, 바울로가 갇혔던 감옥 등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바울로는 제3차 전도여행 중 에페소의 로마군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는데, 필립비 교우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고 고마운 마음에 편지를 썼으니, 이것이 곧 필립비 서간이다.(필립비 1, 12-26)

* 바올로의 감옥
필립비의 유적들은 거의 다 로마 시대 또는 비잔틴 시대의 것이다. 필립비산 동남쪽 기슭에 3세기 반원형 노천극장이 복원되어 있다. 거기서 서쪽으로 한참 걸어가면 역시 산기슭에 5세기 대성당터가 있고, 그 끝 국도변에 사도 바울로가 갇혔다는 바울로 감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감옥이 아니고 로마 시대 저수조였다고도 한다. 바울로는 제2차 전도여행 때 여기서 전도하다가 잠시 옥고를 치렀고 그 기회에 간수 가족을 입교시키게 된다. * 리디아 입교 기념 성당
네아폴리스에서 내려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지금의 알바니아 디라키움에 까지 뻗은 에냐시아 대로 남쪽에 로마시대 광장이 있고, 그 아래쪽에 미완성 대성당 전면 벽이 솟아있다. 필립비 폐허 북쪽 2km지점의 지각티스 강변에는 1972년에 세운 리디아의 입교를 기념하는 그리스 정교회 리디아 경당이 있다.
리디아 고향인 티아디라, 곧 지금의 아키사르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작은 도시이지만 바울로 시대를 전후해서는 자색 옷감 생산지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자색 옷감이 무척 비쌌기 때문에 리디아 부인은 고향인 티아디라에서 고급자색 옷감을 수입해서 필립비 일대에 팔았다.
성서는 리디아를 ‘하느님을 공경하는 부인’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는 핏줄로는 이방인이지만 종교적으로는 유대교로 개종은 하지 않았지만 유대교에 동조하는 부인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유다인의 집회에 참석했다 바울로의 설교를 듣고 유럽 땅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리디아는 필립비 교우들이 바울로를 돕는데 앞장섰을 것으로 보인다.
암피볼리스 (Amphipolis)
암피볼리스는 필립비에서 남서쪽으로 약 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옛 마케도니아의 두 번째 도시로서 드라게 지방의 성읍이자 무역의 중심지로 명성이 있었다. 원래는 스트리몬(Strimonas)강의 동쪽 유역에 위치했던 ‘엔네아호니’(아홉 길)라고 알려진 드라게 성읍 중 하나였으며, 성읍이 굴곡진 지형으로 거의 완전히 스트리몬 강에 둘러싸여져 있기 때문에 ‘강과 강 사이의 도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암피볼리스에 처음으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36년경 하그논(Hagnon) 치하 때에 아테네 식민주의자들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기원전 423년에는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Brasidas)의 강화로 다시 아테네 사람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기원전 357년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의 지배를 받다가 마케도니아가 로마에게 패한 후 168년에는 일시동안 마케도니아의 수도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그곳은 당시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었던 곳으로 자유 성읍의 혜택을 누렸다. 또한 가까운 곳의 비옥한 지대는 좋은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 목재 및 모직물의 산지였고, 또한 채광되는 금의 양이 대단히 많아서 ‘금마을’(Chryspolis)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경제적인 이유로 암피볼리스는 전략상 아주 주요한 도시였다.
사도 바울로는 제2차 전도여행 때(50-52년) 실라와 디모테오를 데리고 필립비를 전도한 다음 에냐시오 국도를 따라 데살로니카로 가는 도중에 이곳 암피볼리스를 지나갔다. 성서에는 이곳에서의 바울로의 선교 행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그의 복음 전파로 인해 이 도시는 692년까지 주교가 거주하는 관할 구역이 되었다고 한다.
암피볼리스에서 발견되는 유적들 가운데 네 개의 그리스도교 회당들(Christian Basilicas)과 대리석으로 장식된 예배 장소(Early Christian Churchs, 그리고 궁궐 같은 주교관(Episcopal Palace)을 볼 때 두드러진 그리스도교의 중심 도시로 발전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8-9세기 도시 전체가 거의 파괴되어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마지막 비잔틴 시대인 13-14세기에는 새로운 거주자들이 몰려와 스트리몬 강변과 성벽에 2개의 큰 망대를 세우고 도시 재건에 힘을 모았지만, 현재는 인구 1천명 내외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에 불과하다. 지금도 암피볼리스는 그리스제국, 로마제국, 그리고 비잔틴 시대를 거치면서 고린토 양식의 원주기둥의 주랑들과 채색 모자이크, 목욕탕, 공회당, 전차 경기장,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국립묘지, 비잔틴 성벽과 망대, 시장 터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헬레니즘 시대에 세운 큰 사자상이 지금도 국도변에 웅크리고 있다.
아폴로니아 (Apolonia)
아폴로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는 여러 곳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곳은 일루리에 있는 아폴로니아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폴로니아는 에그나티아 길의 다른 쪽 끝, 즉 암피볼리스에서 서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그리스의 북쪽 지방 마케도니아의 수도 데살로니카에서 동쪽으로 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동일지명으로 2개의 아폴로니아가 6km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하나는 신아폴로니아이고 다른 하나는 아폴로니아이다. 아폴로니아라는 지명의 유래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폴로 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현재 암피볼리스보다 더 작은 마을로 5백명 내외가 살고 있다.
사도 바울로와 실라는 필립보에서 데살로니카로 가는 길에 이 마을을 통과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바울로 기념교회가 세워져있고, 마을 중앙의 오래된 고목 앞 샘터에는 바울로의 강단과 그가 들러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의 대리석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데살로니카
* 지리, 역사적 배경
데살로니카는 네아폴리스(지금의 카발라)에서 남서쪽으로 166km 떨어진 해안에 있는 그리스 최대의 항구 도시다. 바울로가 제2차 전도여행 때 그리스로 건너가 두 번째로 전도한 도시로 그 지리적인 특수한 환경으로 인해 처음부터 급속히 발전하였다. 기원전 315년에 마케도니아 임금 필립포스 2세의 사위 카싼드로스가 이 도시를 세우고 자기 부인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누이인 데살로니케의 이름을 따서 데살로니케라 불리었다가 1937년 다시금 데살로니카로 불리게 되었다.
이 도시는 동서간의 상업이자 군사도로인 에냐시아 도로(Via Egnatia)에 처한 교통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좋은 항구로 활발한 상업도시였다.
기원전 168년에는 로마의 지배에 들어갔고, 146년에는 마케도니아 주의 수도가 되면서부터 이 도시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기원전 46년 필립비시의 살육사건이 있은 이후부터는 로마에 속하면서도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총독이 다스렸다. 한때는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305-311 재위)는 데살로니카를 로마 제국의 수도로 정한 적도 있었다. 그 후 데살로니카는 1430년에 오스만 제국(투르크 제국, 터키)의 영토에 합병된 후부터 1912년까지는 이곳을 지배하였다.

* 성서상의 데살로니카
두 번째 선교여행 때 바울로는 실라와 디모테오를 대동하고 필립비에서 전도한 다음 에냐시아 국도를 따라 데살로니카에 방문하게 된다. 데살로니카의 주민 소수는 마케도니아인 이었고, 대부분은 그리스인들이었다. 유대인들도 상당히 많이 살았으며 유대인 회당도 있었다.(사도17.1). 그러나 주민들 중 대부분은 잡신을 섬기는 형편이었다.(사도 17.4).
바울로는 처음 얼마 동안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설교했으나 불과 소수의 유대인들이 개종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유대교의 예배에 참석했던 상당수의 외교인들이 개종하였기 때문에 데살로니카 교회의 신자들 대부분이 이방인계 그리스도교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울로는 데살로니카에 3주간 머물면서 그리스에 두 번째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사도 17, 1-9). 그때 야손이라는 유대인이 바울로 일행을 자기 집에 맞아 들였다가 동족들로부터 곤욕을 치렀다(사도17, 5-9).
이런 이유로 바울로 일행은 데살로니카 유대인들에게 쫒겨 데살로니카에서 서남쪽으로 75km 떨어진 베레아(지금의 베리아)로 피신하여 거기에 그리스에서의 세 번째 교회를 세웠다. 그런데 데살로니카의 유대인들이 베레아에까지 찾아와서 괴롭히자 바울로는 실라와 디모테오를 남겨두고 홀로 아테네로 가서 전도했으나 거의 성과가 없었다(사도 17,10-34).
얼마 후 실라와 디모테오가 아테네로 내려오자 바울로는 디모테오를 다시 데살로니카로 올려보내고 바울로 자신은 실라와 함께 아테네에 머물다가(1데살 3, 1-3) 고린토로 내려가서 활발히 전도하게 된다. 데살로니카로 올라갔던 디모테오가 고린토로 내려와서 바울로에게 데살로니카 교우들의 충실한 신앙생활을 전하자(1데살 3,6) 바울로는 반갑고 고마운 나머지 편지를 써 보내게 되는데, 곧 데살로니카 전서이다. 이 편지는 신약성서를 통틀어 가장 먼저 씌여진 작품이다. 분량도 적고 초창기 작품이라 신학적 성찰은 깊지 않지만, 50년경 바울로계 교회의 생생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자료이다.
서간의 주제는 종말론으로, 입교한 후 죽은 교우들이 종말에 구원받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데살로니카 교우들에게 바룰로가 답변한 내용이다. 관련 성서 : 1데살로니카 2, 1-16

* 데살로니카의 유적지
데살로니카와 베레아에서 바울로와 관련되는 동시대의 유적은 찾을 길은 거의 없다. 하지만, 교회사적으로 가치있는 기념물들은 찾아 볼 수 있다
[ 성 디미트리오스 정교회 대성당 (Hagios Dimitrios) ]
성 디미트리오스는 303년 디오클레시아누스 치세 때 혹은 306년 막시미아누스 치세 때 헝가리 시르미움(Sirmium)에서 순교한 분으로 데살로니카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5세기에 지은 성당은 7세기에 재건되었으나 이것도 1917년 화재로 타버리고 그 후 지금의 성당이 재건되었다. 제대칸 입구 기둥들 위에는 7세기 모자이크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정교회 대성당이다.
[ 게오르기오스 성당 (Hagios Georgios) ]
이 성당은 원래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가 자신의 묘소에 세운 원형 건물이었는데, 5세기에는 성당으로 개조되고, 16세기에는 모스크로 개조되었으며,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데살로니카 박물관 ]
이곳에서는 여러 가지 유물들을 볼 수 있는데, 특히 1977-1978년 베르기나에서 발굴된 마케도니아 왕족 고분군 출토품을 감상할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황금 장신구들의 찬란함을 확인할 수 있다.
메테오라
그리스에는 정교회 수도원 집성촌이 두 곳 있는데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수도원 집성촌은 메테오라다. 13세기부터 수도자들이 메테오라에 모여들었고 14세기부터는 수도원들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전성기에는 큰 수도원 13개에 작은 은수처 20여개가 있었다고 한다. 18세기부터는 사양길에 접어들어 지금은 남자 수도원 다섯 개에 수녀원 한 개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각 수도원 성당에 있는 오래된 이콘들과 벽화들이 일품이다. 수도원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비를라암 수도원
예수, 마리아, 베드로, 바울 로, 싯소이스 벽화들이 일품이다.

* 성 스테파노 수도원
사마리아 여자(요한 4장), 물고기잡이 기적(요한 21장) 벽화들이 제법이다.

* 성 니콜라오스 아나파프샤스 수도원
절벽 위 매우 좁은 터에 집을 지었다. 성모님의 임종, 가나의 혼인잔치 벽화들이 돋보인다.

* 룻사노 수도원
성 니콜라오스 아나파프사스 수도원과 바를라암 수도원 사이에 있는 엄청난 절벽 암벽에 붙어 있다. 성모님의 임종,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성녀 헬레나, 예수 탄생 벽화들이 볼 만하다.

* 성 삼위 수도원
매우 높은 절벽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다. 1925년 이전에는 밧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거나 사람을 광주리에 담아 끌어올렸으나, 1925년에 돌을 쪼아 140계단을 만들었으므로 지금은 걸어서 올라간다.

* 큰 메테오른 (일명 변모 수도원)
가장 먼저 창건되었고 규모도 제일 크며 메데오라 수도원 집성촌의 모원이다. 수도원을 세운 두 성인 성 아타나시우스와 성 요아사프, 예수 세례,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안티오키아의 주교 성 이냐시우스의 순교, 물고기 잡이 기적(요한 21장), 성 바실리우스와 성 아타나시우스,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와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 변모 벽화들로 유명하다.
밧모섬
사모섬으로부터 남서쪽 4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섬으로 면적은 34km, 남북의 길이는 16km, 동서의 폭은 가장 넓은 지점이 10km, 해안선의 길이는 63km이다. 현재 밧모섬의 인구는 약 2,500명이다.
로마제국시대 밧모섬은 정치, 종교범을 귀양 보내는 유배지였다. 사도 요한은 도미시안 로마 황제 때 이 섬으로 귀양와서 약 18개월 동안 이 섬에 있다가 네르바 황제의 즉위로 유배에서 풀려나(96년경) 에페소로 돌아갔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의 항구 마을인 스칼라와 이 섬의 중심지인 호라 마을 사이에 있는 '요한의 동굴'에서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였다고 전승된다. * 비를라암 수도원
밧모섬의 중심지인 호라 마을 정상에 세워진 성 요한 수도원은 1088년 성 크리스도둘로스에 의해서 세워졌다. 해적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수도원을 마을 정상에 요새성과 같은 구조로 건축하였다. 이 수도원의 도서관은 많은 희귀 성서 사본을 소장하고 있다.
이 수도원 근처에는 1713년에 세워진 밧모 신학교(Patmian Theological School)가 있다. 이 신학교는 희랍정교의 신학교 중 명망이 있는 신학교다.
사모섬
면적 476km, 동서의 폭 45km, 남북의 길이 약 20km가 되는 비교적 큰 섬으로 현재 인구는 4만명이 된다.
사모섬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이집트를 통치했던 프토레미 왕가의 해군기지가 있던 곳이다.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사모섬 출신이다.
사도 바울로는 제3차 전도여행의 귀로에 사모섬에 들렀고 이곳으로부터 밀레도스로 향해 갔다(사도행전 20, 15).
델피
그리스인들의 마음의 고향. 그곳은 파르나소스 산맥의 연봉인 키르피스(kirfis)산 가파른 절벽 아래 자리 잡은 델피다. 아테네에서는 육로로 서북쪽으로 176km 떨어져 있고, 고린토에서는 북쪽에 있는 고린토 만을 건너 이테아(ltea)포구에 내려서 19km 북상하면 델피에 닿는다. 아테네가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요, 올림피아가 범그리스 운동 경기의 개최지였던데 비해, 델피는 온 그리스의 신심 중심지로서 줄잡아도 미케네 문명시대(기원전 1650~1050)부터 그러했다.
델피는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고고학 유적지이다. 아테네에서 180km 떨어져 있으며, 델피의 성역(sanctuary)은 그리스 경치 중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인 곳 중의 하나인 포키스(Phokis)에 위치해 있다. 델피의 고대 유적은 고대에는 얌페이아(Yampeia) 그리고 나우플리아(Nauplia)로 알려진 거대한 파이드리아드(Phaidriad) 바위 아래 파르나소스(Parnassos)산의 남쪽 경사면 위에 펼쳐져 있다. 델피는 고린토만을 바라보고 있으며 계곡에는 올리브나무와 사이프러스나무가 가득 차 있다. 델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의 델피는 세계의 중심(옴파로스)으로 생각되었으며, 천국과 지상이 만나는 곳으로 생각되어졌다. 즉 신에 가장 가까운 지구상의 장소라고 여겨졌다. 신화 상으로 델피는 제우스가 풀어놓은 두 마리의 독수리가 만나는 장소였다. 이 독수리가 만나는 곳이 지구의 중심이었다. 델피는 제우스의 아들인 아폴로 신에 대한 숭배의 센터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아폴로와 관련짓기 이전부터 지구의 여신 게(Ge), 테미스(Themis), 데메터(Demeter) 그리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 등과 같은 신들을 숭배하는 성역이었다. 미케네 시대의 말엽에 아폴로가 이러한 신들을 대신하였으며 신탁(Oracle)의 수호자가 되었다.

19세기 말엽에 프랑스 고고학회가 이 지역에 대한 발굴에 착수하였고, 이 유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1892년에 호모레(Th.Homolle)의 지휘 아래 시작되었으며, 다른 발굴자들에 의해 상당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들의 발굴로 아폴로 성역, 아테나(Athena) 성역, 카스탈리안 샘, 김나지움, 스타디움 등이 빛을 보게 되었다. 또한 발굴에서 고대 그리스의 주요 도시국가를 나타내주는 5,000여종이 넘는 금석문(金石文)과 조각상, 여러 종류의 소품들, 건축 장식물, 정교한 예술품 등이 나왔다. 특히 델피는 38개의 도리스식 돌기둥으로 된 지금의 신전은 기원전 366~329년에 세 번째로 지은 거대한 아폴로신전, 오 천명 수용 규모의 극장, 경기장, 박물관 등이 볼거리다. 델피 아폴로 성역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 델피박물관
델피 성역 입구에 있는 박물관. 비록 규모는 작으나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중의 하나이다. 최초의 델피박물관은 1903년 프랑스 건축가 투르네르(Tournaire)의 계획으로 세워졌으며, 1938년에 확장 재건축 되었다. 전시의 재배열이 점차 수행되어 마침내 1980년에 완성되었다. 1974년에 델피 성역에서 발견된 황금과 상아 전시를 위한 새로운 방이 추가되었다. 박물관 건물의 확장 및 유물 전시를 확대할 박물관 확장 프로젝트가 문화부(Ministry of Culture)에 의해 이미 승인되어진 상태이다. 델피박물관은 사실상 델피 성역의 절대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오로지 델피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만 소장하고 있는데, 대부분 델피 성역과 아테나 프로나이아 성역의 건축물에서 나온 주목할만한 조각물과 건축 유물들과 봉납물, 비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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