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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성지안내



1. 개요
유럽에 속해 있으면서 아프리카와 접해 있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매우 아름다운 나라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성으로 인하여 스페인은 예로부터 동방과 서방이 만나는 길목의 역할을 해오면서 그리스, 페니키아, 유태, 로마, 고딕, 아라비아, 그리고 회교인, 크리스트교인, 유럽인 등 서로 다른 민족, 인종, 문화가 유입되어 그들 나름의 독특하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스페인은 많은 정복을 당하였으나 오히려 외세를 스페인 내부에 융합하여 오늘날과 같은 생명력 넘치는 국가를 이루어 왔다. ‘태양의 나라’ ‘투우의 나라’ 등으로 정열적인 국민성을 가진 플라멩코의 나라인 스페인은 근세 초기에는 세계 최강의 해상제국으로, "스페인의 영토에는 해가 지는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기도 했다. 스페인 국민들은 과거의 찬란한 역사에 자부심을 갖고, 미래 지향적이며 유수한 국제적 협력 사안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활동하고 있다. 오늘날 스페인은 한 때의 고립시기를 벗어나 유럽연합(EU),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경제협력 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스페인은 완전한 자유민주국가이며 정부 형태는 의회중심의 입헌 군주제를 취하고 있다.
국가명 스페인왕국 (Reino de Espana, Kingdom of Spain)
수도 마드리드(500만명)
면적 면적은 504,788㎢로 남북한을 합친 한반도의 약 2.3배이다. 지중해와 대서양을 접하는 유럽 남서부의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하며, 지중해상의 발레아레스 제도와 대서양상의 카나리아 제도, 그리고 모로코 영토 내에 있는 쎄우따와 멜리야를 포함하고 있다.
인구 40,217,413명(2003. 7월 추정)
주요민족 라틴족
주요언어 까스티야어(표준 스페인어 74%), 까딸란 17%, 갈리시아어 7%, 바스크어 2%
종교 가톨릭(99%)
화폐 유로(EURO)
기후
온도/월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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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유럽과 포르투갈에 접경한 북위 36°~ 43。47', 동경 9°18'~11°에 위치해 있으며 크게 3개의 지역으로 나눈다. 제1지역은 비가 많아 숲이 우거진 북구, 서북부의 갈리시아, 레온, 나바라, 카탈루냐의 각 지방이며, 제2지역는 중앙부의 메세타고원, 제3지역은 지중해 동부, 안달루시아, 발렌시아등의 각 지방이다. 이러한 지역 사이를 타오강, 구아디아나강, 에브로강등 스페인의 5대강이 흐르고 있다.
주요산업 -
전압 -
시차 -
1. 역사
스페인의 국기는「피와 황금 기」라고 불리는데, 중앙의 황색은 9세기 고트왕의 용감함을 나타낸다. 좌측 문장은 옛 이베리아 반도의 5개의 왕국, 카스틸리아, 레온, 아라곤, 나바라, 그라나다 왕국의 문장을 합친 것으로 방패 양쪽에 있는 2개의 기둥은 헤라클레스 기둥이라고 하며, 스페인 본국과 중남미 스페인어권 여러 나라를 나타내고 있다. 기둥에 감긴 리본은 이전에는 ‘여기는 세계의 끝이다’라고 쓰여 있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후에는 ‘보다 먼 세상으로’라고 고쳐졌다. * 국화 : 오렌지, 석류, 카네이션 에스파냐(Espaa)라는 국명의 기원, Span은 기원전 8세기경부터 페니키아 식민지였을 때 산과 들에 ‘들 토끼’가 많아서 곡물에 피해를 많이 주었던 곳으로 페니키아어로 들 토끼가 많은 지방이라고 하여 불리어진 것이 그대로 국명이 되었다. 이것이 로마인에 의하여 히스파니아(Hispania)가 되었고, 이어 에스파냐가 되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포함한 반도를 이베리아(Iberia)라고 하는데, 이 이름은 에스파냐 동부를 흐르는 에브로강에서 유래한다. 이베리아 반도 구석기 최고의 인종은 크로마뇽인이며, 그들의 대표적 유산으로는 1만 5000년전의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있다. 기원전 11세기 경부터 페니키아인과 그리스, 카르타고인들이 이 땅에 잇따라 침입하여 지중해 연안에 식민지를 세우고, 상업과 무역에 종사했으며, 기원전 1세기 말에는 이베리아 반도 전체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이베리아어 대신 라틴어가 공용어가 되어 오늘날 스페인어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이어 게르만의 침입 이후의 에스파냐는 서유럽과 공통의 유산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그리스도교이다. 에스파냐의 국토는 800년 가까이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 문화적으로는 이슬람의 영향이 크지만, 에스파냐의 통일국가 형성은 이슬람과의 대항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에스파냐 국민들은 유럽인으로서의 동질성을 의식하고 있다.) 5세기 중엽 게르만의 한 부족인 서고트족이 진출, 로마군을 격파하고 왕국을 세웠으나, 종교문제,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싼 혼란으로 711년 옴미아드 왕조의 침입을 받아 붕괴하였다. 프랑크왕국은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732년 프와티에 싸움에서 패배하여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였다. 이슬람 지배 하에서 산업, 농업, 수공업은 매우 발달하였으며 코르도바, 세비야는 시장, 수출항으로 번창하였다. 이슬람의 통치는 공납, 부역, 인두세 수납과 이를 위한 군 조직 유지 에 역점을 두었으나, 사회, 정치, 종교체계에 대해서는 강제적 재편을 행하지 않고 수평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스도교는 ‘모사라베스’라 불렸으며, 공물 등의 부담을 조건으로 특별자치구의 행정을 승인 받았다. 한편, 이슬람 지배를 모면했던 아스투리아스, 나바라 두 지방의 서고트 귀족은 8세기에 남하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정복군의 전진기지 유지를 위한 그리스도교의 정착 경영을 목적으로, 레온과 카스티야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토지 개간의 허가를 내주는 이민 특허장의 교부와 영주의 무제한적 지배를 저지하는 기능을 가진 배아트리스의 승인이라는 유리한 조건을 내걸고 전선지대로의 이주를 촉진하였다. 또, 국토회복운동은 종교전쟁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이슬람의 종교적, 문화적 유산을 극복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그리스도교가 육성되면서, 교회의 커다란 영향력이 형성되었다. 14세기 후반 스페인은 국토회복 운동을 통해 강대해진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1469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이 결혼을 함으로써 통일이 이루어졌다. 가톨릭 신봉자인 그들은 1492년 스페인에 남아있는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 그라나다를 함락, 국토회복운동을 성공시킴으로써 스페인은 절대왕정시대에 접어 들었다. 이미 13세기부터 카스티야와 아라곤에서 실행해왔던 가신단 회의와 코르테스라는 신분제 의회를 통해 왕권의 도시제휴정책을 계승한 이들 두 왕은 신성도시동맹을 결성하였으며, 동맹도시에 재판권과 경찰권을 줌으로써 시민 출신의 새 귀족층을 낳는 기반이 되었다. 두 왕은 귀족억압정책을 추진하고, 군제와 관료 통치기구를 정비하여, 15세기 말 왕권이 강화되었고 절대왕정의 길은 더욱 굳어졌다. 한편, 이사벨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스페인은 남, 북 아메리카의 정복과 식미지 건설을 독점하며 세계 제패의 길을 열었다. 카를로스 1세 때부터 펠리페 2세 시대에 걸치는 16세기 중엽에는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두 식민지 이외에도 나폴리, 시실리아, 사르데냐, 네델란드 등을 손아귀에 넣어 스페인의 영광은 절정에 달하였으며, ‘태양이 지지 않는 스페인 제국’이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네덜란드가 독립을 하고,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신흥 영국의 함대와 싸워서 전멸한 후에는 그 번영을 영국에게 빼앗기고, 17-18 세기에 발생한 식민지 분쟁에도 패배하여 몰락의 길을 걷게된다. 19세기에는 나폴레옹군의 침략을 받았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에는 페로난도 7세의 반동정치가 들어섰는데, 이 또한 불안한 정세가 계속되어 해외의 식민지들은 하나 둘 씩 떨어져 나갔다. 제 1차 세계대전 때는 중립을 지켜 비약적 발전을 보였으나, 정치, 사회면에서는 불안한 정세가 계속되었다. 1923년에는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정권이 생겨났지만, 1931년 선거에서 패배하여 공화파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 정부 역시 1936년 우익 군부세력의 반란을 맞아, 2년 반에 걸친 내란이 계속된 후 군부의 지도자 프랑코 총통이 권력을 잡게된다. 1939년 이래 프랑코장군이 총통, 수상, 군최고사령관을 겸한 독재 체제를 유지했으나, 1975년 ETA 에 의해 암살되면서 독재정권은 막을 내렸다. 에스파냐의 근대사에서 두드러진 것은 지방분리주의이다. 공적인 국체로서의 에스파냐 외에 민족 중심의 애착을 가지는 것은 갈리시아나 아라곤 등의 작은 민족국가이다. 이 분리주의는 카탈루냐와 바스크 등 언어 또는 민족적인 이질성을 띠고 있는 지방에서는 반(反)카스티야적 감정, 나아가서는 반중앙집권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에도 바스크 독립운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에스파냐는 이웃 나라 포르투갈과 더불어 20세기에 오랫동안 독재정권 아래 있었지만, 두 나라 모두 1970년대에 민주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좌익정부가 출현하였다.
2. 주요 순례지
뮌헨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 주(州)의 주도. 면적 310㎢. 인구 117만 100(2001). 남알프스 산지와 북쪽 도나우강 사이의 고원지대 중앙에 위치하며 알프스산맥에서 발원한 이자르강이 시를 관류한다. 베를린·함부르크에 이어 독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지명은 취락의 기초를 만든 수도사를 의미하는 Monchen에서 유래한다. 19세기 이후 루트비히 1세의 치세와 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남독일 제1의 도시로 성장했다. 기후는 서유럽 해양성기후와 동유럽 대륙성기후의 중간형이며 연평균기온 7.9℃, 연강수량 910㎜이다.
8세기에 수도사에 의해 개척되었고 12세기 벨프가(家) 최후의 바이에른대공(大公)인 하인리히 사자공(獅子公)이 이곳에 시장을 옮겨 화폐주조권, 관세(특히 鹽稅) 징수권을 얻은 이후 도시가 형성되고, 사자공의 뒤를 이어 1918년 11월까지 바이에른을 지배하는 비텔스바흐가(家)의 거성지(居城地)가 되었다. 16세기 이후 바이에른공국의 수도로서, 상업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는 가톨릭교회, 특히 예수회의 거점이 되었으며, 17세기 30년전쟁에서는 스웨덴국왕인 구스타프 아돌프에게 점령되었다. 18세기 에스파냐계승전쟁 때에는 오스트리아에 점령되어 선제후(選帝侯)가 프랑스로 피신하여 루이 14세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 무렵부터 프랑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1805년 나폴레옹 1세가 뮌헨에 들어와 아우스터리츠(슬라프코프) 싸움에서 승리한 뒤, 1806년 바이에른의 영지를 확대하여 왕국을 세웠으며, 대학도 건립하여 독일뿐 아니라 유럽의 문화·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8년 11월 가장 먼저 뮌헨에서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타도되고 아이스너 정부가 성립되었다. 1919년 2월 아이스너는 암살되고 호프만정부가 성립되었으나, 4월에는 레테공화국이 선언되어 백색테러가 횡행하고 뮌헨은 우익화되었다.
1923년 11월 히틀러 봉기가 일어나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35년 <운동의 수도>로 선언되었다. 1938년 9월 수데텐 문제에 관한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 4국협정이 이곳에서 조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정세가 전환되자 뮌헨대학에서는 반나치스 저항운동인 <백장미> 활동이 전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뮌헨의 반이 파괴되고 전후에는 미군의 점령 하에 놓였다.

뮌헨은 예로부터 상업도시로서 발전했으며 중세에는 특히 소금교역이 성행했다. 19세기 중반 철도 개통 뒤에는 남독일 최대의 곡물·목재·과일·야채의 집산지가 되었다. 공업은 19세기 초기에는 소수의 수공업만 있었으나 19세기 후반부터 발전하여 현재 바이에른 최대의 공업도시가 되었다. 광학·전기기계·정밀기계·자동차 등의 근대공업뿐만 아니라, 맥주양조·공예·출판·인쇄와 같은 전통공업도 성행하고, 북쪽 근교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1972년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이자르강 좌안의 시벽(市壁;현재 순환도로)으로 둘러싸여 있던 구시가에는 괘종시계탑이 있는 시청사, 양파형 둥근지붕탑이 있는 프라우엔 성당, 독일 르네상스양식인 성 미카엘 성당, 옛 성관(城館), 조폐소, 옛 궁정양조소 등 유서 깊은 건물이 많으며, 각 방면으로 도로가 연결되는 뮌헨의 핵심지에는 은행·보험회사와 대기업의 사무소가 집중되어 있는 중심업무 지구이기도 하고 백화점·전문점·레스토랑 등도 많다.
구시가의 북쪽에 펼쳐진 지구는 19세기 초기 루트비히 1세 시대에 건설된 부분으로 바둑판 모양의 도로망이 특징이다. 여기에는 궁전 외에도 연방·주정부 기관, 학교, 미술관, 박물관 등 바이에른주 중심시설이 모여 있다. 또한 북부의 슈바빙지구는 대학·미술학교와 가깝고, 학생·예술가의 거주지구로 알려져 있으며 카페와 레스토랑이 많은 유행의 첨단지로 <작은 파리>라고 일컬어진다. 구시가의 중앙역 남쪽에는 10월 축제가 열리는 테레지엔비제 광장과 박람회회장(博覽會會場)이 있다. 시의 서부에 있는 거대한 바로크양식인 님펜부르크성은 바이에른 선제후의 여름 궁전으로 1663~1728년에 건축되었다. 부속 건물인 아말리엔부르크궁과 국립도기제조소도 로코코양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예술·문화의 중심지로 독일 최대의 종합대학인 뮌헨대학(1472년 창립, 1826년 뮌헨으로 이전) 및 공과대학. 조형미술대학·음악대학 외에 국립도서관·바이에른국립박물관·독일박물관(자연과학·공학)·국립극장·오페라극장 등이 있다. * 왕궁 (Palacio Real)
부르봉왕조 문화의 대표적 유산으로 일명 동쪽 궁전(Palacio de Oriente)으로 불리며, 유럽의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식 왕궁 중의 하나이다.
1700년 카를로스 2세가 왕위 계승자 없이 사망하자 합스부르그 왕가와 부르봉 왕가의 왕위 계승권 싸움의 결과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손자였던 필립페 5세가 부르봉가의 첫 왕으로 등극한 후, 현대의 왕인 후안 카를로스 1세까지 계속되고 있다.
원래 지금의 왕궁이 있던 자리에 9세기경 아랍인들이 지배할 당시 요새화 된 왕궁을 개조한 합스부르그 왕가(스페인에서는 아우스트리아 왕가)의 왕궁이 있었으나, 1734년 크리스마스 때 화재로 전소되어, 부르봉가 왕가의 시조이며 베르사이유 궁에서 유년시절 보낸 펠립페 5세(Felipe Ⅴ)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하여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돌과 화강암으로만 건축, 26년 간에 걸친 공사 끝에 1764년 완성되었다.
한 면의 길이가 140m에 이르는 장방형의 건축물로서 왕궁 안의 방은 크고 작은 것을 합하여 2800여 개에 달한다. 19세기식 내부장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왕궁은 초기 안달루시아(플라멩코)로부터, 이태리의 르네상스 거장에 이르는 그림(타피스트리와 두에포르의 천정화는 걸작)과 타펫화들로 장식된 프랑스 풍의 르네상스양식과 신고전주의 양식을 혼합한 건축물이다.
1764년 필립페 5세 아들인 카를로스(Carlos) 3세 때부터 살기 시작하여 카를로스 4세, 이사벨 2세 여왕, 알폰소 12세, 후안 카를로스 현 국왕의 조부인 Alfonso ⅩⅢ세가 왕정의 문을 내린 1931년까지 역대 스페인 국왕들의 공식 거처로 사용되었다.
유럽의 수많은 궁전 중에서도 뛰어나게 아름다운 왕궁으로 지금도 왕실이 공식행사에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으며, 공식행사가 없는 날에는 일반 관광객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주위에는 사바티니 정원, 야외 공식행사로 쓰이는 왕실 소속 모로 공원 등이 왕궁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 쁘라도미술관 (Museo del Parado)
스페인이 자랑하는 쁘라도미술관은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콜렉션을 소장하고 있으며, 파리 루브르 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과 함께 세계에서 손꼽히는 미술관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1785년 카를로스 3세 때 건립하기 시작, 원래는 자연사 박물관으로 건축했으나 페르난도(Fernando) 7세에 의해 1819년 11월 19일 왕립 부속 미술관으로써 개관됐다. 1970년까지 왕실 부속으로 귀족들에 의해 관리되었으나 그 이후부터는 국립미술관으로 넘어갔다. 콜렉션의 양이나 내용에 있어서도 최고라 할 수 있는데 특히 회화만 3000점 이상으로 박물관이라기보다는 미술관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엘 그레꼬(El Greco, 1541-1614), 벨라스꿰스(Diego de Velazquez, 1599-1660),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 등 스페인 유명 화가부터 무명화가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회화 외의 500여 점에 이르는 조각들, 4000점에 이르는 고야의 판화, 스케치 등은 빼놓을 수 없는 프라도 미술관의 중요한 콜렉션이다. 작품의 반수 이상이 스페인 화가의 작품이며, 플랑드로 회화(14-16세기 네덜란드와 벨기에 등에서 꽃피운 예술) 661점, 이탈리아 회화 453점, 프랑스 회화 157점, 독일 회화 43점 등이 전시되어 있다.

* 쁘라도미술관 별관 (Cason del Buen Retiro)
쁘라도 본관에서 레띠로 공원으로 가는 바로 가까이에 있다. 1981년에 삐까소의 대작 '게르 니까'가 스페인에 반환되어 여기에 전시되어 있다가 지금은 소피아 왕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 알무데나 성당(Cathedral de Nuestra-Senora de la Almudena) 성모상
1870년 전까지 주요 회교 사원이었던 것을 1880년에 성당으로 개축을 계획, 1883년부터 110년 동안 신 고딕 스타일로 건축, 1993년에 완성했다.
1883년 아랍인 주거지의 성벽을 헐면서 성모 마리아 성상을 발견했고 바티칸에서 그 자리에 성당을 지으라고 명했다. 이슬람 지배시절 가톨릭 주인이 공사에 동원되었는데 성모상의 아름다움을 아랍인이 해칠까 두려워 몰래 벽에 넣고 공사를 했던 것으로 벽을 허무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 대광장(Plaza Mayor)
1619년 필립페(Felipe) 3세 시대에 건설된 100m×200m의 장방형 광장이다.
역사적으로 마드리드시의 중심광장으로 국왕취임식, 종교의식, 투우와 교수형에 이르기까지 각종 크고 작은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해 왔으며, 광장 주위에 136개의 방을 가진 4층 건물이 사각형으로 건축되어 있다. 광장 중앙에 말을 탄 펠리페 3세의 동상이 있다.
광장 주변지역에는 18세기 이후 형성된 식당, 카페, 선술집들이 모여 있다. 이 중 1725년 시작된 보띤(Botin)은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헤밍웨이가 애용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일요일 오전 중에는 우표, 옛날 돈 시장, 연말에는 크리스마스 나무 및 장난감 시장 등이 열린다. 밤이면 이 근처에는 ‘뚜나(Tuna)’라고 하는 학생들의 무리가 독특한 검은 의상에 다양한 색깔의 리본을 달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 뿌에르다 델 솔 광장(Pueta del Sol)
스페인 각 방면의 도로 기점이 되는 ‘Km 0’의 원표가 있는 곳이다. 이 곳으로부터 10개의 도로가 전국으로 뻗어나간다.
푸에르타 델 솔은 ‘태양의 문’이라는 뜻이며 16세기까지 태양이 새겨진 문이 있었다. 20세기 초 그란 비아(Gran Via)가 형성될 때까지 쇼핑의 중심지였다.
눈에 띄는 광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버스나 자동차의 발착이 빈번하며 사람들의 약속 장소로 발걸음이 부산하여 특히 저녁에는 매우 복잡하다. 섣달 그믐에서 신년에 걸쳐 마드리드 시민들이 모여 한바탕 법석을 떠는 것으로 유명하다.

* 스페인 광장(Plaza de Espana)
1930년에 건립되었으며, 스페인의 대표적인 작가인 세르반테스(1547-1616)의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비와 동상, 그리고 돈키호테와 산쵸 동상이 있다.
똘레도 (Toledo)
수도 마드리드 남쪽으로 약 72km지점에 있는 스페인의 옛 수도. 로마 지배의 영향으로 TOLETUM(안전지대, 방어지대)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똘레도는 따호 강이 한껏 굽어 흐르는 부분에 위치하며, 3면이 강에 포위된 상태의 천연 요새를 이루어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거의 500년 동안 스페인의 수도로 번영했던 곳이다. 1986년 12월 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재로 지정됐다.
역사적으로 로마제국의 지배 후 6세기경 서고트족이 들어오면서 똘레도는 서고트 왕국의 수도로 번영했다. 711년부터 1492년까지 780년 간 이슬람 지배 하의 수도였으며, 1085년 알폰소 6세의 탈환이후 1561년 펠리페 2세에 의해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스페인 수도로서 정치, 문화 산업의 중심지였다.
지금도 종교, 역사, 예술에 있어 그 찬연한 빛을 발하는 똘레도는 약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살아있는 유적도시로 고대 로마에서부터 서고트, 이슬람 정복시대와 가톨릭 군주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역사와 문화유산을 남겼다. 특히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가 서로 종교와 언어를 인정해주며 함께 평화롭게 살았던 시대에는 과학과 번역학이 많이 발달되었고, 그리스도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혼재하는 과정에서는 모자라베, 무데하르 등의 예술사조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똘레도의 중앙에 우뚝 솟은 대성당은 똘레도의 명물이다. 이 성당은 본래 회교도 사원이었던 것을 13세기에 개축하였으며 1277년부터 1493년까지 266년을 걸려 완공된 성당이다. 정교한 조각, 역대 주교들의 초상화, 엘 그레코의 작품으로 홍포를 입은 그리스도, 베드로의 참회 초상화, 12사도 초상화 등이 있고 순금의 성체 현시대, 성경의 글자를 금으로 입힌 성경도 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돕고 있는 엘 그레코의 대표작 "오르가즈 백작의 죽음"은 세계 3대 명화 중의 하나라고 한다. * 똘레도 대성당 (Catedral)
본산이다.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성전은 프랑스의 고딕 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266년 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1493년에 완공되었으며, 길이 113m 폭 57m중앙의 높이가 45m로 완공된 후에도 수 차례 증·개축을 했지만 지금도 기본 골격은 변함이 없다. 중앙에는 면죄의 문, 왼쪽에는 시계의 문, 오른쪽에는 사자의 문으로 3군데의 입구가 이색적이다.
중앙 예배당(Capilla Mayor) 제단의 채색 조각이 한층 사람의 눈길을 끌며 중앙을 감싸듯이 22개의 예배당이 각각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햇빛에 눈부신 스테인드글라스는 15-16세기의 것으로, 성기실(Sacristia)의 대천장은 루까 죠르다노에의 프레스코화이다. 다음 방은 화랑으로 되어 있어 그레꼬의 걸작 "성의를 입는 사람"을 비롯해서 고야, 반다이크, 루 벤스 등의 작품이 있다. 중앙 예배당 뒤에는 "토란스하렌테"라고 부르는 대리석의 바로크조의 조각들이 있으며 여기만 밖의 빛이 들어오게 되어있기 때문에 대리석의 무수한 천사는 마치 약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물실에는 금은의 재보가 진열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높이 3미터, 무게 180킬로나 되는 16세기의 "알페의 성체현시대"는 일년에 한번만 성체제대 밖으로 내어와서 성체행렬에 꽃을 바친다.
- 개관시간 (성기실. 보물실)은 10:30-13:00, 15:30-19:00 (겨울에는 18:00)

* 엘 그레꼬의 집 (Casa de El Greco)
그레꼬는 크레타섬 출신으로, 35세쯤 되었을 때 스페인으로 건너와서 똘레도에 살면서 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레꼬의 집은 그가 살고 있던 그 당시를 재현시키기 위해서 그 때의 가구가 그대로 놓여있다. ‘그리스도와 12사도’, ‘성 베르날도 데 시에나’, ‘똘레도경치’ 등 그레꼬의 작품 외에 16-17세기 경에 활약했던 스페인 화가들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 개관시간 10:00-14:00, 15:30-19:00 (겨울은 18:00) 일요일 오후와 월요일은 휴관

* 뜨란시또 유대교회 (Sinagoga del Transito)
이 교회나 그레꼬의 집이 있는 지역은 옛 유대인마을로 번창했던 곳이다. 똘레도는 원래 유대인이 많이 옮겨 살았던 마을로 12세기 경에는 1만 2000명의 유대인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1492년 가톨릭 두 왕의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 스페인에서 유대인이 사라지면서 똘레도의 문화는 큰 타격을 받았다. 이 교회는 14세기의 보물로써 무데하르 풍이다. 인 접 해 있는 유대미술관(Museo Sefarai)에는 관, 결혼의상, 책, 그 외의 유대에 관한 자료가 진열되어 있다.
- 개관시간 10:00-14:00, 15:30-19:00 (겨울은 18:00) 일요일 오후는 휴관

* 산또 또메교회 (lglesia de Santo Tome)
그레꼬작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명작은 4.8m×3.6m 크기에도 놀라지만 당시의 이태리화풍을 받아들인 그레꼬의 작품 중에서 최고 걸작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성 에스떼반과 성 아우구스티노 두 성인이 14세기경 이 교회에 기적적으로 나타났다는 전설을 엿보이고 있다. 이 명화는 상하 2단으로 나뉘어 있으며 상단부는 천상계를 하단부는 지상계를 상징하고 있다. 중앙에는 천사가 팔을 감싸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이는 오르가스 백작의 혼을 표현한 것이다. 성당은 무데하르 양식으로 14세기의 것이다.
그리스인인 엘그레코는 필립페(Felipe) 2세 왕실 전속화가가 되기 위해 1577년 스페인으로 이주하였으나 그 당시 스페인 왕실의 화풍과 맞지 않자 똘레도에 매혹되어 정착, 작품활동을 하였다. 이 교회에는 엘 그레꼬가 30년간 거주했던 자택이 있다.
- 개관시간 10:00-14:00, 15:30-19:00 (겨울은 18:00) * 산따 그루스미술관 (Museo de Santa Cruz)
16세기의 건물로 옛날에는 같은 이름의 병원이었다. 소장품은 주로 16세기 스페인의 황금 시대에 속한다. 수많은 타피스트리는 알렉산더 대왕이나 구약성서의 아브라함이나 모세, 성모, 성인 등을 테마로 한 것이 특색이다. 그림으로는 뭐니해도 그레꼬의 작품이 많다. ‘성모 수태’, ‘성모승천’ 등을 「그레꼬의 방」에서 감상할 수 있다.
- 개관시간 10:00-18:00

* 알까사르 (Alcazar)
톨레도의 가장 정상에 위치한 이 성은 많은 역사적인 사건을 겪은 대표적인 유적중의 하나이다. 로마제국의 지배, 이슬람의 지배 하에서는 역대 왕들이 살던 왕궁이었고 1706년 전란에 의해 크게 파괴된 이후 까를로스 5세는 대대적인 개축을 했지만 수차의 화재로 손실과 수복을 되풀이했다. 현재의 건물은 1936년도 스페인 내란 때 폭격에 의해 거의 폐허가 되었던 것을 복구해놓은 것으로, 안에는 도서관과 군부대가 있으며, 부분적으로 시민전쟁박물관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 일부에는 1936년도 시민내란 때의 폭격현장이 지금도 그대로 보관되어있다.
장방형의 건물에 붉은 지붕, 네모난 탑이 사방에 있으며 똘레도의 원경을 바라볼 때 대성당과 함께 특징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13세기에 만들어진 성새지만 여기서 최초로 통치한 것은 서정시로 유명한 엘시드이다. - 개관시간 9:30-20:00 (겨울은 13:30)

* 산 후안 데 로스 레예스 교회 (lglesia de San Juan de los Reyes)
가톨릭 두 왕이 트로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교회로 당초의 계획은 두 왕이 여기에 자기들의 묘터를 마련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그라나다에 묻혔다. 교회 내는 아라베스크모양의 기둥이나 팔각천장의 섬유질의 모양 등 아랍 풍이 믹서된 르네상스 고딕 양식이다. 섬세한 장식이 건물 지붕과 안뜰에 면해 있는 아치 등에 새겨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 개관시간 10:00-14:00, 15:30-19:00 (겨울에는 18:00)

* 산 로만교회(lglesia de San Roman)
13세기의 무데하르 풍 건물로써 현재는 서고트 문화 박물관이다. 똘레도는 6-8세기의 서고트왕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당시를 그리는 유품이 진열되어 있다.
- 개관시간 10:00-14:00, 15:30-18:00.
아란후에스 (Aranjuez)
에스파냐 중앙부 마드리드주의 작은 도시로 인구는 3만 6천여 명이며, 라만차로 들어가는 입구, 따호강 남쪽 강가에 있다. 16세기 펠리페 2세 시대부터 왕령지로 되었으며 그곳에 J.B. 똘레도와 J. 에레라가 별궁을 건축했으나 여러 번의 화재로 인해 1778년 완성되었다. 타호강 수로를 이용한 부속 정원 안에는 신고전 양식의 「농부의 집」이 있다. 1808년 이곳에 연금되었던 페르난도 왕자(뒤의 7세)가 아란후에스 민중의 반(反)고도이 봉기에 의해 국왕에 옹립되었기 때문에 그의 부친 카를로스 4세는 스스로 퇴위하였다.
까스띠야 고원의 한가운데 우아한 모습을 들어내는 이궁이 있는 마을, 아란후에스는 로드리고의 명곡 ‘아 란후에스 협주곡’으로 인해 이름을 세계에 알렸지만 스페인사람들에게는 격동의 1808년이었던 나폴레옹군 침입에 앞서 ‘아란후에스의 반란’의 무대로 알려져 있다. * 왕궁 (Palacio Real)
16세기 펠리페 2세에 의해 세워지고 그 후 수차의 증축, 수복이 되풀이되었다. 내부에는 로코코 풍의 ‘도기실’이나 ‘옥좌실’ 등의 장식이나 ‘의상박물관(Museo de Trajes)’에 있는 역대 왕실의 의상이나 소품에 주목하게 된다.

* 섬의 정원(Jardin de la Isla), 왕자의 정원(Jardin del Principe)
두 정원이 다 따호강 끝을 잘 이용하고 있다. 푸른 숲에 분수, 동상, 못 등을 적재적소에 배치했으며 한적한 산보를 즐길 수 있다.

* 농부의 집(Casa del Labrador)
네오 클라식 풍의 소궁전으로 왕자의 정원 쪽에 서있다. 소박한 외관을 보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호화로운 실내는 순례자를 놀라게 한다. 부르봉왕가의 사치를 만족시킨 예술품이라고 도 불리는 건물이다.

* 친촌(Chinchon)
마드리드에서 남동 54킬로의 작은 마을이다. 중심의 마요르 광장을 2, 3층의 집들이 겹치듯이 둘러싸 그 풍경은 ‘아주 스페인적인 마을’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 마요르 광장을 가설투우 장으로 만들어 마을의 투우를 열 때도 있다. 본격적인 큰 투우장과는 다른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이곳의 성당(Iglesia Parroquial)에는 고야의 "성모승천"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친촌의 명물는 뭐니 해도 아니스주이다. 스페인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리큐르주로서 향기나 맛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작은 언덕에 있는 옛 성에서는 아니스주를 만든 일도 있으며 옛날에 이곳의 영주 친촌 백작이 살던 곳이다.
엘 에스코리알 (El Escorial)
마드리드 북서쪽 50㎞, 해발 1000m의 과달라마 산맥 남쪽 기슭에 있는 여름철 피서지로세계 8번째 불가사이라고 한다. 이곳은 2개의 궁전과 교회, 2개의 신전, 웅장한 도서관과 수많은 보물들이 있다.
또한 푸른 산과 고지대의 서늘함, 그리고 장엄한 자연 경관이 피서지로서 손색이 없고 지금은 마드리드의 중산층 이상이 이곳에 별장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월요일에 대부분의 마을이 문을 닫는다.
* 산 로렌조 수도원 (Monasterio de San Lorenzo del Escorial)
과달라마 산속 해발 1500m에 세워진 장엄하고 웅대한 창조물로 스페인 전성기를 상징하는 역사적 유산이다. 마드리드 서북쪽 49㎞ 떨어진 곳에 위치한 수도원으로 필립페(Felipe) 2세가 대 프랑서 승전 기념으로 1563년 착공하여 1584년 완공했다. 과달라마 산맥의 푸른색 대리석 석재로 건축한 이 건물은 남북이 207m, 동서가 161m, 네 귀에는 높이 64m의 탑이 있다.
궁전을 겸한 이 수도원에는 16개의 안뜰, 89개의 분수, 3개의 예배당, 1250개의 문, 2700개 의 창문, 86개의 계단, 300개에 이르는 방 등 거대한 규모로 처음 이곳을 찾는 사람에게는 미로와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3개의 예배당 중 주 예배당 천장에는 천사의 대관을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고 높이 30m의 대리석 제단, 이사벨 여왕상, 카를로스 5세의 청동상, 펠리페 2세상 등이 있다. 주 예배당에서 보물실로 통하는 통로 입구에서 34계단을 내려간 곳에는 직경 10m의 벽옥으로 장식한 아치형의 왕의 영묘(판테온)가 있는데, 카를로스 1세를 비롯한 역대 왕들이 잠들어 있다.
이밖에 성기실의 미술품과 국보급 성기, 희귀본들이 유리상자에 담겨 있는 도서관, 현란한 태피스트리와 미술품으로 장식된 화려한 여름별궁, 박물관, 미술관 등은 이 수도원의 자랑이다. - 개방시간 : 화-일 10:00-18:00

* 전몰자의 계곡 (Valle de los Caidos)
마드리드 서북 54㎞, 엘 에스코리알에서 14㎞거리에 있다. 거대한 암반 위에 십자가가 솟아 있는 이곳의 대성당은 1936년부터 1939까지 이어진 스페인 내전 중 희생된 수많은 무명용사(약 5만 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프랑코 총통의 지시로 거대한 바위산을 뚫어 건설한 것이다. (1940년 착공, 1958년 완공)
직경 42m의 성당 원형 천장에는 영웅, 순교자, 스페인 성인들을 주제로 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총 길이는 262m의 지하성당은 3개 구역(현관, 아트리움, 중간 연결부분)으로 구분된 접근 지역과 높이 22m의 교회의 神廊을 만듦으로써 각 축면 3개 작은 바실리카 성당이 있다. 지하성당 밖은 3만 평방미터의 산책길, 100m폭의 화강암 계단이 있으며, 십계명을 상징하는 두 전사가 그 위를 안내하고, 정면 입구에는 검은 대리석(높이 5m, 길이 12m)으로 조각된 커다란 피에타가 있다.
이곳에는 프랑코 총통 묘소가 있으며, 세계 최대의 초대형 십자가(세로 150m, 가로 46m)가 세워져 있다. 십자가 뒤편에는 수도원과 사회 연구센터가 있다.
- 개방시간 : 화-일 10:00-18:00
세고비아 (Segovia)
카스띠야 레온 자치주 소속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도시중의 하나로 마드리드 서북 100Km에 위치한 역사도시이다. 해발 1000m의 고원에 있고, 녹음이 많으며 배후에는 구아다라마 산맥을 끼고, 에레스마강에서 들어간 부분은 멀리서 보면 마치 선박같이 보인다.
인구 약 5만 5000명 정도가 살고 있는 곳으로 이 숫자는 16세기경부터 크게 줄거나 늘지 않고 있다. 세고비아라는 도시의 이름은 옛 서고트족의 침입당시 'SIEG(시에그)'라는 낱말에서 유래, '승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위에 산업시설, 공장지대가 거의 없기 때문에 공기가 특히 신선하고 맑으며, 자연경치가 아름다워 각 계절마다 가지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이곳은 고대 로마시대에 이미 도시로써 번영했던 곳으로 옛 로마인들이 건설한 약 2000년의 역사를 가진 ACUEDUCTO(로마 수로교)로 유명하다. 아랍시대에는 직물이 성행하는 도시로서 알려졌었고 15세기는 세고비아의 황금시대로서 Isabel la Catolica 여왕이 대관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모든 세계 어린이들에게 꿈과 환상을 심어주었던 디즈니랜드의 백설공주에서 나오는 성의 모델이 되었던 성채(Alcazar)도 남아있다. * 수로교 (Acueducto)
기원전 80년경 로마 Trajano 황제시대 축조한 급수시설로 세고비아에서 떨어져 있는 Acebeda강에서 물을 끌어 올려 도시 안으로 공급해주는 시설이다.
전장 15km, 167개 아치, 높이는 지형관계로 가장 높은 곳이 29m이며, 세고비아 도시위로 지나가는 길이 728m의 수로는 시멘트는 사용하지 않고, 화강암만을 쌓아올린 로마의 토목기술로도 유명하다. 유네스코에서 1987년 인류문화재로 지정.

* 성 (Alcarzar)
크고 작은 언덕으로 이루어진 마을 선단에 세워진 이 성은 13세기에 축조를 시작, 14세기 중엽 완공했다.
1474년 이사벨 여왕이 이 성에서 Castilla 왕국 여왕으로 대관식을 갖고 절대군주제 근대국가 건설을 시작했고, 펠리페 2세가 오스트리아 앤 공주와 1570년 결혼식을 올린 장소이며 스페인 의회 전신인 "꼬르떼"의 무대로서도 역사에 남아 있다. 디즈니는 이성을 매우 마음에 들어, 영화 "백설공주"의 모델로 사용했다.
아빌라 (Avilla)
‘성인의 도시’ 아빌라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85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작은 도시이다. 로마시대에 건설된 도시로 아직도 로마식 성벽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아빌라는 해발 1,131m의 높은 위치로 옛날부터 군사적인 요충지로서 회교도와 그리스도교도 간에 300년 동안이나 공방전을 계속한 곳이며 파괴와 수리를 되풀이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된 때가 1099년이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2,400m, 높이는 12m. 중세적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빈센트 대성당과 성 베드로 대성당, 그리고 13세기부터 르네상스까지의 조각품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궁전 등이 있다. * 성녀 대 데레사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1515-1582)는 「맨발의 가르멜회」를 창설한 성녀로 ‘예수의 데레사’ 로 불려진다. 축일은 10월15일.
성녀 대 데레사는 1515년 3월 28일 신심이 두터운 귀족의 딸로 탄생했다. 그러나 12세 때 어머니를 여윈 데레사는, 성모상 앞에 꾾어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자기의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돌봐주는 어머니도 없고, 또 많은 사람들의 나쁜 표양 때문에 세속적으로 흘러감을 염려한 아버지는 그녀가 14세 때, 아우구스티노 수녀원에 위탁하여 교육을 시켰다. 데레사는 그곳에서 자라며 차차 마음이 바로 잡혀가는 중에 병에 걸려 친가에 요양하러 가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요양하면서 성 예로니모가 성녀 바울라와 성녀 에우스토치움에게 보낸 서간을 읽고 마침내 수녀가 될 것을 결심하고 19세 때 아빌라에 있는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 완덕의 길을 닦기 시작하였다.
성녀는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예수께서 매질을 당하시는 장면을 그린 상본을 쳐다보고 또 성 아우구스띠노의 고백록에서 받은 감명으로 크게 각성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때까지 나의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부터 나의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고 자서전에 적고 있다. 자기 안의 예수의 생활, 이것이 바로 유명한 데레사의 신비 생활의 기본인 것이다. 성녀의 이런 생활은 바울로 사도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 20)라는 말씀과 상통하고 있다.
성녀 대 데레사는 신비신학의 기초로서 신비생활의 기본이 되는 것은 "하느님 없는 나는 무(無)요, 나에게 하느님은 전부"라는 사상이다. 영성적으로 점차 깊은 신비체험을 가져 "영적 결혼"의 상태를 경험하였다. 이렇듯 데레사는 영혼을 신비계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가르멜회의 개혁에 착수하여 마침내 성공을 거두니 다른 수도회의 모범이 되었다.

성녀는 1536년 까르멜 수녀회에 입회하여 다음해 첫 서원을 했다. 1560년 데레사는 개혁 까르멜 창립을 결의하고 그 작업을 진행하여 1567년 8월 15일에 메디나 델 깜포에 드디어 수도원을 창립하게 된다. 이 때 십자가의 성 요한 수사와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다음해인 1568년 11월 28일에는 십자가의 요한 수사에 의해 까르멜 남자수도원이 창립되었다. 성녀는 20년 동안 스페인 전역을 여행하며 17개의 남녀 수도원을 세웠다. 데레사 성녀는 개혁가와 조직가, 영성가로서 교회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1575년부터 까르멜 안에서 개혁파와 보수파간에 분쟁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온갖 박해가 있었는데 강생 수녀원 55명의 수녀가 파문 당하고 십자가의 요한 수사가 감금당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579년 드디어 개혁파가 보수파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얻어 박해도 끝이 났다. 그리고 1581년 개혁파와 보수파가 분리되었다.
대 데레사 성녀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기에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기를 원했다. 고통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생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여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겠나이다.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나이다."고 하면서 극기 수덕의 길을 걷던 데레사 성녀는 1582년 10월 4일 저녁, 기쁨 중에 "주여 나는 성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거듭 말하면서 6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617년 스페인 국회는 데레사를 스페인 주보로 선언하였으며, 사후 40년이 지난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하여 시성되었고, 1970년 9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살라망카 외곽의 '알바 데 또르메스' 수도원의 성녀 대 데레사 성당에는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성녀의 심장과 팔이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성녀 데레사의 저서로는 「자서전」, 「하느님 사랑에 관한 명상」, 개혁 까르멜 「창립사」, 「영혼의 성」, 「완덕의 길」, 「영적 보고」,「하느님께 외침」, 「수도원 시찰방법」 등이 있다. ‘자서전’(천주 자비의 글)과 ‘영혼의 성’ 등이 다수의 책이 번역되어 성녀의 삶과 영성을 소개하고 있다.

* 산타 테라사 수도원 (CONVENTO DE SANTA TERESA)
아빌라가 자랑하는 성녀 테라사의 생가 터에 이 수도원이 기념으로 지어졌다. 이 수도원 내의 바로크조의 「산타 소성당(CAPILLA DE LA SANTA)」은 그녀가 첫 울음소리를 냈던 방 위치에 특별히 세운 것으로, ‘성녀 테레사 여기에 태어나다'가 새겨져 기념되고 있다.
산따 데레사 수녀원은 성곽 안, 성녀의 집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고, 성녀는 성벽 밖에 있는 엔까르나시온 수도원에서 20년 이상 살았다.

* 아빌라 대성당
아빌라 대성당은 1090년 아빌라 성벽 건설과 함께 알바르 가르시아의 설계로 착공하였다. 12세기 착공 14세기 낙성(준공)이라는 연대에서 보아 건축양식은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양식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축조된 성당 벽은 한눈에 구별되는 여러 종류의 벽돌이 사용되었고, 좌측량의 소성당은 후년에 증축된 것으로 르네상스 양식이 완연하다. 정면 출입문 왼쪽에 우람한 종각과 쌍 종각 위에 왕관 탑이 씌워져 있고 오른쪽에는 종탑 부분이 미완성인 채로 있다.
외부의 위엄 있는 느낌과는 달리 내부는 교회다운 분위기로 많은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로마네스크 중앙 제단은 15세기의 거장 페드로 베르게테의 최후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산 비쎈떼 성당(IGLESIA DE SAN VICENTE)
아빌라 동쪽 성벽의 바깥쪽에 위치한 아빌라에서 가장 중요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종탑이 특이하다. 12세기에 지어졌으나 후에 고딕 양식이 첨가되었다. 서쪽 현관은 산띠아고 대성당의 ‘영광의 문’에 비유된다.
성당 내부에는 성 빈센트와 그의 여자 형제들이 순교 당하던 장면을 자세하게 조각해 놓은 그들의 무덤이 있다.

* 산또 도마스 왕실 수도원
아빌라 도심에서 뻗어 나온 길 중 한 곳에 있다. 이 수도원에는 세 개의 회랑이 있는데, 가운데 있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이 회랑에는 멍에와 화살 모양의 가톨릭 군주들의 기장이 조각되어 있다.
이 수도원 성당에는 뻬르난도와 이사벨의 외아들인 후안 왕자의 무덤이 있으며, 성기실에는 또 다른 역사적인 인물화, 종교 재판관이었던 또마스 데 또르꿰마다의 초상화가 있다.

* 성벽(MURALLAS)
중세 성벽은 유럽 각지에서 볼 수 있는데, 이처럼 완벽하게 같은 모습으로 현존하는 것은 드물다. 주위의 전장 2.5Km, 탑수 90, 출입문이 9개소이다. 성벽일부는 로마시대의 요새의 흔적이 라고 하는데,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은 11C 말이다. 성벽 내측에는 대성당, 산타 테라사 수도원, 산 후안 교회, 빠라도르 등이 있다. 돌 성벽은 높이 12m, 폭 3m이며 위로 올라가는데는 카르보 소테로 광장 부근이 좋다. 성벽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황색과 적색으로 변화하여, 색다른 정경을 자아낸다. 이것을 멀리서 바라보기 위해선 사라망카 방향 2.5Km 지점의 로스 쿠아토르 포스텔 전망대가 좋다.
살라망카 (Salamanca)
에스파냐 살라망카주(州)의 주도. 마드리드 북서쪽 180km에 있는 바야돌리드 남동쪽 70 km지점, 해발고도 803m에 위치하며 도루강(江) 지류인 토르메스강 우안에 있다.
농산물·가축의 거래 중심지로, 비료·피혁·양조·제분업이 활발하다. 한니발의 점령이래, 로마의 군사도시였으나, 고트와 이슬람의 지배를 거쳐 1085년 그리스도교도의 지배로 되돌아갔다.
13세기에 알폰소 대주교에 의해서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살라망카 대학은 옥스퍼드·파리·볼로냐와 함께 제1급의 대학으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유럽에서 손꼽히는 학술·문화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오늘날에는 중세의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는 역사적 도시로서, 12세기 로마네스크양식의 옛 성당과 16세기 고딕양식의 새로운 성당이 서로 인접해 있고, 중세의 대학건물이 남아 있다.
이 밖에도 로마시대의 다리와 극장 등 수많은 역사적 명소와 유적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18세기에 만들어진 마요르 광장은 에스파냐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꼽힌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 신.구 대성당(CATEDRAL NUEVA & VIEJA)
비에하 대성당(구)은 12세기에 건축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누에바 대성당(신) 정면 현관 안쪽 우측으로 들어간다.
이탈리아 화가 쁠로렌띠노가 그린 제단 그림과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 둥근 천장의 프레스코화를 감상할 수 있다. 가운데는 살라망카의 수호 성인인 12세기의 「베가 성모상」이 있으며, 성모상에는 리모헤스 에나멜을 입혔다. 또한 비에하 대성당 남쪽의 가요 탑은 스페인에서 가장 조화가 잘 이루어진 탑이라고 한다.
누에바 대성당(신 성당)은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건조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이 건물의 자랑은 현과 정면의 조각으로, 서쪽으로 향하고 있고 이 문에 석양이 비치면 신앙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아름다움에 끌려 들어간다고 한다. 내부에는 제단 화가 없고, 현재 성모 마리아의 승천상과 살라망카의 수호성인 산 후안 데 사군을 모셔놓았다.

* 산 에스데반-성당, 수도원
도미니꼬 수도원에 있는 16세기의 산 에스떼반 성당은 화려하게 장식된 퍼사드 때문에 많은 관심을 끈다. 1610년에 후안 안또니오 쎄로니에 의해 완성된 중앙 패널의 양각은 이 수도원이 기념하는 스테파노 성인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 위의 작은 띠 장식에는 어린이와 말의 모습이 정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화려하게 꾸며진 제단 후위 장식에는 포도나무 덩굴로 장식한 비틀어진 황금색의 기둥이 있는데, 1693년 호세 추리게라가 만든 작품이다. 그 아래에는 스테파노 성인의 또 다른 수난 장면을 표현한 끌라우디오 꼬에요의 마지막 그림이 있다.

* 알바 데 도로메스
살라망카에서 동쪽으로 20km 떨어진 작은 마을로 '알바 데 또르메스' 수도원의 성녀 대 데레사 성당에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심장과 팔이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두에냐스 수도원
산 에스떼반 수도원 맞은편에 있는 도미니꼬회 수녀원이다. 이 수녀원에는 이중으로 된 르네상스 양식의 회랑이 있다. 이 회랑에는 타일로 덮인 아랍 양식의 아치가 있다.

* 마요르 광장 (PLAZA MAYOR)
이 광장은 펠리페 5세가 왕위 계승 전쟁 때 자신을 도와준 살라망카시에 감사의 뜻으로 지어준 것으로 1729년 추리게라 형제에 의해 설계되어 1755년 완성된 아름다운 광장이다.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과 흡사하지만 살라망카의 마요르 광장이 훨씬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광장 북쪽의 시계탑이 있는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시청사이며 남쪽 건물 벽에 있는 흉상은 펠리페 5세이다. 날씨가 좋으면 광장의 바와 카페테리아의 테라스에서 휴식하기 좋고 특히 밤에 불빛이 비치는 광장이 아름답다.

* 조가비의 집 (CASA DE LAS CONCHAS)
15세기 후반에 지은 고딕 양식의 건물. 외벽을 조가비를 이용한 무늬로 장식했기 때문에 ‘조가비의 집’이라고 부른다. 이 조개 껍질의 집은 ‘산띠아고 교단’의 상징이며, 16세기초 산띠아고의 기사였던 로드리고 말도나도가 지었다. 현재 건물 내부는 주립미술관을 되어 있다. 조가비의 집 건너편에는 클레레시아 교회가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
에스파냐 갈리시아주(州)의 주도(州都). 12사도(使徒)의 한 사람인 성 야고보(에스파냐어로 산티아고)의 순교지로 알려져 있다. 9세기에 에스파냐의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 그리스도교를 포교한 사도 야고보의 유체(遺體)가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별이 나타났다고 믿은 알폰소 2세에 의해 이 곳에 성당이 건설되었으며, 아울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시(市)가 형성되었다. 이후 예루살렘·로마에 이은 유럽 3대 순례지의 하나로 번영했다. 갈리시아지방 중심도시의 하나로, 옥수수·포도 등을 집산하며, 은세공(銀細工)·칠기 공예·양조·주조(鑄造)·섬유·가구 등의 수공업이 성하다. 12세기에 건설된 성 야고보를 모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비롯하여 성 프란치스코회·성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 성당·대학 등 중세의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서부 유럽의 메카??라고도 불린다.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스페인의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종교 도시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산티아고(성 야고보)가 순교한 후 유해의 행방이 묘연하던 중, 별빛이 나타나 숲 속의 동굴로 이끌어 가보니 산티아고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그곳을 ‘별의 들판’이란 뜻으로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유래로 이곳의 지명이 정해지고, 산티아고의 무덤 위에 대성당이 건축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교황 레오 3세가 이 곳을 성지로 지정함에 따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유럽 3대 순례지의 하나로 번영하였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1078년 알폰소 2세 때, 디에고 페라에스 주교(主敎)에 의해 기공되어 1128년 미완성인 채 헌당식을 가졌다.
대성당은 라틴 십자 플랜의 5랑식(廊式) 바실리카 건축으로 툴루즈의 생세르낭 성당과 비슷한 로마네스크의 순례로(巡禮路) 양식을 취한 전형적 성당이다. 대성당은 갈리시아 지방의 화강암으로 지었는데, 좌우에 있는 두 개의 탑의 높이는 각각 80미터이다. 대성당 앞의 마름모꼴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면 오브라도이로 문이 있고, 그 안으로 들어서면 ‘영광의 문’이 나타난다. 영광의 문에는 12세기 초에 거장 마테오가 신약성서의 요한 묵시록을 근거로 조각한 200여 개의 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로마네스크에서 고딕 양식으로 전환과정을 드러낸 에스파냐의 채색조각을 대표한다. 대성당의 금빛 찬란한 중앙 성단에는 야고보(에스퍄냐어로 산티아고)의 좌상이 있으며, 천장에는 샹들리에와 향로가 달려있다. 대성당의 지하묘소에는 순은을 입혀서 조각한 야고보(산티아고)의 유골함이 안치되어 있다. 대성당의 후면에는 면죄의 문이라고도 불리는 거룩한 문이 있고, 성당의 탑에서 울리는 時鐘소리는 사방 20㎞까지 들린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Barcelona)
바르셀로나는 2천년의 역사를 지닌 뛰어난 무역항으로 마드리드에 이어 스페인 제2의 도시이다. 바르셀로나는 기원전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부락이 형성되었으며, 기원전 3세기까지 카르타고인들이 지배(당시 바르셀로나 지역 통치자의 성이 Barca였으며, 하니발 장군 부친)를 받았다.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퇴함으로써 스페인에 대한 패권도 로마에 넘어갔다.(로마인들이 이 부락을 Barca 씨족이 통치하던 곳이라는 의미로 이 지역을 Barcino 부르기 시작).
바르셀로나는 까딸루냐 지방의 중심으로 흔히 “헤라클레스에 의해 세워지고, 페니키아에 의해 확장되고, 로마에 의해 다듬어지고, 서고트에 의해 빛이 났다”고 일컬어진다.
바르셀로나의 전신은 기원전 1세기에 세워진 ‘바르시노’란 마을로 2천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중세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 전체와 버금가는 부를 가지고 있었다.

까딸루냐지방은 이베리아반도의 북동에 있으며 지중해에 면해 있다. 삐레네 산맥으로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으로, 바르셀로나주 외에 레리다주, 헤로나주와 따라고나주가 있으며, 스페인 제1의 상공업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까딸루냐인의 특징은 근면, 정직하지만 개인주의에 철저하다. 까달루냐어는 독립된 언어로써 스페인어와 함께 이 지방의 공용어다.
기후는 지중해성으로 일년 내내 따뜻하다. 평균 기온은 겨울이 11도 정도이며 여름은 24도 정도이다. 12월과 1월이 가장 추운 달이며 가을과 봄은 일반적으로 우기에 해당한다.

바르셀로나는 띠비다보(Tibidabo)와 몬쥬익(Montjuich)이라는 두개의 높은 언덕 사이에 있으며 중세를 그대로 멈춘 구시가와 현대적인 빌딩이 늘어선 신시가로 갈라져 있다.
구시가는 고딕지구로 불리며 뿌에르따 데 라 빠스 광장(Plaza Puerta de la Paz)에서 까딸루냐광장(Plaza de Cataluna)까지로 대성당을 중심으로 수많은 고딕건축이 있으며, 부분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도 복합되어 있다. 람브라스(Las Ramblas) 거리는 특히 번화한 곳으로 고색창연하며 카페테라스나 꽃집이 늘어서 있다.
신시가는 19세기에 건설이 시작되어 정돈된 거리와 현대적인 빌딩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명성을 떨친 조각가 가우디(Gaudi)의 건물이 많아, 바르셀로나를 가우디(Gaudi)의 도시라고도 한다.

바르셀로나는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고 지중해를 사이에 끼고 이태리와 마주 보고 있는 지리적 환경의 영향으로 스페인에서 가장 서구적인 분위기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
세르반떼스는 바르셀로나를 ‘유럽의 꽃’이라고 했다. 스페인적인 정열 속에 프랑스적인 분 위기가 잘 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면한 까딸루냐인들은 무역을 중심으로 많은 부를 축적해왔고, 그 부를 바탕으로 예술에 대한 심미안을 길러 피카소, 미로, 달리 등 특출한 예술가를 배출했다. 많은 미술관이 있으며 리쎄우 대극장은 유럽에서 스칼라좌에 이어 그 규모를 자랑하는 극장이다. * 고딕지구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인 고닥 지구는 시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 근처에는 바르셀로나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까딸루냐광장이 있다. 람브라스거리는 까딸루냐광장에서 항구의 콜롬부스 전망대까지 이어진다. 항구앞의 Avinguda del paral-lel이라는 도로는 피라 데 바르셀로나 경기장이 위치한 스페인광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빈구다 레이나 마리아 크리스티나에서 1992년 올림픽경기를 위핸 건설된 여러 스포츠 시설이 있는 몬쥬익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파라우 나시오날이 보인다.

* 리베라 지구
고딕지구에서 비아 라이에타나로 분리되는 첫 번째 성벽 바깥지역이 리베라 지구이다. 이 지구는 원래 중세시대의 상인들이 거주했던 산 페레지구와 뱃사람들이 거주했던 산타 마리아 델 마르 지구로 분리되어 있다. 특히 15번지에는 정원과 장식 창문, 야외 계단이 특징적인 15세기 건축물인 피카소 미술관이 있는 아길라 저택을 볼 수 있다.

* 레산프레지구와 현대 건축
레산프레 즉, "확장" 지구는 다이아몬드 형태의 교차로로 된 격자구조의 도로로 형성된 바르셀로나시의 중심지역이다. 이곳은 19세기 후반에 도시 확장계획에 기초하여 도시가 확대된 것을 반영하고 있다. 그라시아 대로 왼편으로 가면 Luis Demenechi Montaner의 작품인 레오 모레라 저택으로 꽃을 주제로 한 현대적 양식의 현관이 특징적이다. 또한 다채색의 자기로 현관이 장식된 신고딕 양식의 아마트렐 저택과 용을 주제화한 모자이크 현관이 아름다운 가우디 작품의 바트요 저택을 볼 수 있다.

* 람브라 지구
람브라라고 칭하는 거리는 7개 의 각각 다른 이름을 가진 구역을 되어 있으며 람브라지구에서 가장 특색있는 곳은 보케리아 시장으로 신선한 야채와 육류, 생선으로 끝없이 연결된 가판대와 한잔의 술을 즐길 수 있는 바가 늘어서 있다.

* 골동품 벼룩시장
대다수의 골동품상점도 역시 레산프레에 있다. 그라시아 대로에 있는 쇼핑센터의 1층에 73개의 골동품 상점이 있는 골동품 거리가 있다. 대성당 광장에서는 매주 목요일골동품 벼룩시장이 열린다.

* 벨항구
바르셀로나의 새로운 오락단지 이다. Juan de Borbon거리와 Rambla de Mar거리는 산책하기 좋은 코스로서 항구의 장엄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 가우디
안토니오 가우디 코르네(1852-1926)는 레세우스에서 태어나 초등교육 기관인 베렝게르 학교를 거쳐 바르셀로나 대학 이공학부에 진학한 후 따로 건축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여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 학교에 입학한다. 이 시기에 가우디는 호세 폰세레 메스뜨레스(Jose Fontsere Mestres, 1829-1897)라는 건축가 밑에서 제도사로 일하면서 폰세레의 작업에 참여하였다.
폰세레는 시우다델라 공원 조성계획에 착수하면서 금속제 급수조의 설계를 가우디에게 일임하였다. 가우디가 고안해낸 급수조가 너무나 독창적이었기 때문에 폰세레는 설계도면을 들고 시립 건축 학교를 찾아가 교수 과르디오라에게 자문을 구했다. 과르디오라는 그 계산의 완벽함에 감탄하며 “나는 가우디라는 학생을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이미 합격점을 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성 가족 성당은 가우디가 처음부터 착수하지도 않았고 그의 생전에 완성을 볼 수 있었던 작품도 아니었지만(현재도 공사 중) 가우디 최고의 작품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가 이 과업에 쏟아 부었던 열정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작업장에 가기 위해 광장 근처를 지나던 가우디는 전차에 받혀 심한 타박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3일만에 74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가우디는 소박하고 수줍으면서도 매우 예민한 사람이었다. 건축에 대한 천직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전 일생동안 건축 이외에는 한 것이 없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글도 많이 쓰지 않았으며 여행도 별로 하지 않는 편이었다. 정치에도 관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건축에만 관심이 있었다.
현대 건축사상 이변적인 천재 건축가 가우디는 초현실주의적인 세계에 몰입, 자연에 영감을 받아 살아있는 생생한 리듬을 추구했다. 그는 "독창성이라는 것은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라는 말로 모든 것의 근원은 신이 창조한 자연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가우디 사상의 씨줄이 종교였다면 날줄은 자연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모든 형태는 자연물에서 얻어 온 것이다.
그는 꽃과 나무를 관찰한 뒤 건축적 형태와 완벽하게 결합시켜 가장 새로우면서도 스페인의 자연과 어울리는 예술품을 만들어냈다. 곤충의 곡선, 파도의 굴곡, 나무껍질의 질감, 잎이나 꽃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인상깊게 받아들이고 변화시켜 또 다른 신비로운 건축 세계를 형성해 갔다. 건물의 각을 당연시하던 사람들에게 누구도 상상 못했던 자유로운 곡선을 가진 집을 보여 주었다.
가우디의 작품들을 보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건축물 하나 하나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큰 저택이나 교회건물들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공원의 벤치와 가로등, 의자 하나하나가 완전히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반영하고 있다. 그가 만든 구엘 공원의 벤치는 도시 위를 물결치듯 자유롭게 흐르는 바람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며, 레알 광장의 가로등은 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몽환적인 조각으로 만들어져 바르셀로나라는 도시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가우디의 작품은 건축가의 자유로운 예술적 감성과 이를 수용하는 사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예로서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주고 있다.

* 성 가정 성당
성 가정 성당은 바르셀로나의 명물로 스페인이 낳은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작품이다. 그는 성당의 완성을 위하여 자신의 전 재산을 공사자금으로 털어 넣었고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오다가 전차에 치여 사망할 때까지 가우디가 골격을 완성하였다.
현재 성당의 지하에는 가우디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지하 박물관에는 앞으로 200년 후에나 완공될 건물의 착공 때의 모습부터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해둔 사진과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
성당은 가우디의 기본 설계와 디자인에 따라 1882년 네오고딕 양식으로 시작(건축가 Frances de Paula Villar) 되었으나 1884년 가우디가 총지휘를 맡으면서 전체적으로 수정되어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가우디의 설계대로 완성된다면 버팀 벽이 없는 5개의 본당, 육각형 방사상의 본당 앱스, 경사진 지주에 의해 지탱되는 타원형의 천장을 가지게 된다. 또 이 건물은 복잡한 쌍곡면을 그리게 되고 앱스 위의 둥근 천장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게 된다. 그리고 출입구는 3개의 거대한 문(Fachada)으로 구성되어있다. 1891년 만든 동쪽문(Fachada del Nacimiento)만이 가우디가 직접 만든 것으로 가우디 자신의 생전에 이 성당이 완공되지 못할 것을 알고 후계자들에게 예로써 이 Fachada를 건설했던 것 같다.
동쪽 문은 십자가의 오른쪽 끝에 있고, 그리스도의 탄생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4개의 첨탑이 완성되었다. 서쪽 문은 십자가 반대편 끝에 있는데,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완성단계에 있다. 남쪽 문은 영광과 부활을 상징하는 가장 큰 문으로 계획단계이다. 이 문들이 모두 완성되면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전부 12개의 첨탑을 가지게 되는데, 돔 주위의 4개의 높은 첨탑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을 상징하며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170미터 높이의 중앙 탑 주위를 둘러싸게 되며,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140미터의 탑도 건설될 계획이다.

아랫부분은 땅으로 가라앉는 듯하고 위 부분은 하늘로 솟구치는 불꽃을 연상시키는 이 거대한 성당은 성서에 나오는 상징들로 물결치듯 이어져있으며 각각의 면은 보는 사람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종 탑의 끝 부분은 가우디가 즐겨 사용했던 도자기 모자이크로 마감됐다.
기능주의적인 건축물에 익숙한 우리에게 ‘성 가정 성당’은 참으로 놀라운 인상을 준다. 사실 스페인 안에서도 적잖은 이 비현실적인 건축물에 조소를 퍼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가우디는 이 건 물을 돌과 종교와 예술로 지탱해 나갔는데 스스로 「속죄사원」이라 칭함으로써 건축을 자기희생의 과정으로 여겼다.

* 대성당(catedral de Barcelona)
서기 559년에 "Cruz" 성녀와 "Eulalia"성녀를 추모하여 세운 성당으로 서기 985년에 무어족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045년에서 1058년 사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 건축되었다. 그 이후 14-15세기에 걸쳐 고딕 양식으로 증축되었으나 "San Ivo" 문과 성당의 일부분은 아직도 로마네스크 양식대로 보존되고 있다. 1929년에는 국보로 지정.

* 몬쥬익(Montjuic)성
몬쥬익 언덕 꼭대기에 위치하여 전망대에 서면 시내와 지중해를 끼고 있는 항구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이 성은 1640년 농민전쟁(Segadores) 당시 30일만에 세운 건물이 기원이 되어 왕의 소유로 넘어간 후인 1694년에 확장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년-1704년)시에는 전투 기지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전쟁 후 펠리페 5세는 성을 부분적으로 철거하라고 명령하기도 했으나 군사적 중요성을 인정하여 전체적으로 보수, 수리되었다.

* 바르셀로나 구엘 공원
구엘 공원은 바르셀로나시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시 외곽 북서쪽의 20hr 면적으로 넓게 퍼진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1900년부터 14년에 걸쳐서 카탈라니안의 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에 의해서 이루어진 이 공원은 그의 열렬한 후원자이며 오랜 친구이기도 한 구엘(E.G ell)의 사유지에 이상적인 전원도시를 계획하고 시작하였다. 하지만 예정과는 달리 계획했던 60여 개의 주택 중 단지 2개의 주택만이 건설되고 그 후 소유자가 바르셀로나 시로 바뀌면서 당시 공공시설로 계획했던 지역과 공지로 남아 있던 부분이 1922년부터 시립공원으로 바르셀로나의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UNESCO가 1984년에 "인류전래 문화자산"으로 지정했다.
가우디는 당시 주거지역과 휴양지역으로의 완벽한 조합을 이룰 수 있는 주택단지를 구상하고 시장 터와 같이 모든 주민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계획의 중심으로 삼았다. 현재 그리스식 극장, 도리아식 신전 혹은 열주의 회랑으로 불리우는 지역의 시장터로 모든 주민의 친교가 이루어 지고 야외극장으로도 이용될 수 있도록 계획된 곳이다. 현재에도 역시 많은 사람들의 모임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 인공과 자연의 조화 ]
가우디가 계획한 휴양지역 및 공공의 장소는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조성되어 있고 반면에 원래 계획했던 주거 단지는 공지에 소나무, 야자수 등의 나무를 심어 공원전체가 마치 인공과 자연이 조화된 거대한 조각품과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이 공원의 두 가지 특징은 모자이크로 장식된 부분과 전체 단지의 경사를 극복하기 위해 비스듬하게 세운 장벽과 기둥으로 이루어진 동굴형태의 산책로라고 할 수 있다. 실질적인 이용과 미적인 효과의 종합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다른 작품과 비교해서 구엘 공원에서 가우디의 천재성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 가우디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모자이크 장식 ]
모자이크로 장식된 부분은 주 출입구의 계단 부분과 뒤로 이어지는 도리아식 신전의 천정 그리고 도리아식 신전 위에 만들어진 커다란 광장의 거대한 뱀의 형태를 취한 의자 등이다. 입구 계단의 중앙부분은 커다란 도마뱀과 카탈라니안의 문장과 뱀의 머리를 조합한 모자이크 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시에 분수로도 이용되고 있다. 85개의 도리아식 기둥으로 구성된 도리아식 신전 혹은 열주의 회랑은 원래 시장터로 계획된 곳이었다.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은 공원의 다른 모자이크와 함께 가우디의 동료 건축가인 J. M. Jujol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도리아식 신전 위의 86m×40m의 커다란 광장은 가우디가 흔히 그리스식 야외극장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는데, 광장의 반은 도리아식 기둥으로 받쳐진 지붕처럼 되어 있고 나머지 반은 직접 지상과 연결되어 있다. 이 광장의 거대한 뱀의 형태를 취한 의자는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과 인체에 정확하게 맞는 편안함으로 유명하다. 가우디가 이 의자를 제작할 때 직접 사람이 앉은 상태에서 석고 틀을 만들어 나중에 그 형태를 그대로 이용했다고 한다. 이 야외의자는 모자이크 재료의 특성 때문에 비가 온 후에는 항상 청결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 동굴형태의 산책로 ]
계속해서 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동굴형태의 산책로가 이어지는데 지형을 극복하려고 비스듬하게 세운 벽이나 기둥, 그리고 자연의 형태에서 응용된 기둥장식은 구조미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멀리서 구한 재료가 아니고 바로 공원 내에서 취한 막돌을 이용하여 가우디가 즐겨 사용한 자연적, 유기적인 형태로 구성된 벽이나 기둥은 장식의 화려함과 경사를 극복하기 위한 기능적인 형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 전통과 현대화의 과정 ]
가우디의 가장 중요한 건물 가운데 하나는 「귀엘(G"ell) 궁전」(1885~89)이었으며, 잇따라 「귀엘 공원」(1900~14)이 있었다. 이 건물에서 가우디는 첨탑과 부조로 장식된 벽과 같은 전형적인 무어 양식의 요소를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철재 장식의 세부는 순수한 아르누보 양식이다. 일례로 현관과 철재로 된 문들은 소용돌이와 율동적인 것들 그리고 추상적인 형상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들은 파리에서의 카스텔 베랑제(Castel Beranger)를 위한 귀마르의 금속세공품 디자인이나 뮌헨의 엘비라 아뜰리에를 위한 엔델의 활기찬 구성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1905~10년의 「카사 밀라. Casa Mil'」 건물을 볼 때, 정면은 일련의 굽이치는 수평선으로 분할되어 있어 놀랄만한 잔물결의 형태를 창출해낸다. 이같은 아르누보 건축의 성공적인 사례는 장식적인 디테일에서 뿐만 아니라 율동적인 디자인으로 귀결되는 전체구조로서의 양식에서 파악된다.

* 몬세라트(Montserrat) 수도원
스페인 동북부 카탈루냐(Cataluna) 주에 있는 산지(山地)로, 산 중턱 723m 지점에 베네딕도회의 산타 마리아 데 몬세라트(Santa Maria de Montserrat) 대수도원이 있고 순례자가 많은 순례지이다. 만레사(Manresa)시 남쪽, 요브레갓(Llobregat)시 동쪽에 위치한 몬세라트 산은 지중해 연안 산악 지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해발 1,235m의 성 예로니모 봉이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몬세라트는 ‘톱니 모양의 산’(Mons serrtus)이라는 뜻으로 첨봉(尖峰)이 연이어 있고 톱으로 썰은 듯한 거대한 바위 기둥들이 기묘한 형상을 이루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역사 ]
몬세라트에 대한 가장 명확한 기록은 888년 십자군 전쟁 때 이 산에서 아랍인들과 전투를 벌인 위프레도(Wifredo) 백작이 산타 마리아 데 몬세라트 은수처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그 후 1023년 위프레도 백작의 증손자 리폴(Ripoll) 신부가 은수처를 확장하여 수도원을 설립하였으며, 12세기에는 목각(木刻) 성모상을 모신 성당이 건축되었다.
성모상은 어두운 얼굴색으로 인해 ‘흑인 성모’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 성모상은 루가가 조각한 것으로 사도 베드로가 스페인으로 가져왔다고 하며, 무어인이 지배할 때 동굴 속에 감춰져 있다가 880년에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12세기경 몬세라트 수도원에서 성모 발현과 기적이 있었다는 소식이 당시 스페인 서북부에 있는 야고보 사도의 묘소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의 순례객들에게도 알려진 이후 남유럽 각지에서 많은 순례객들이 찾아왔다는 기록이 전해 오고 있다.
13세기 이후 카탈루냐 지방을 지배한 아라곤(Aragon) 왕국이 지중해 유역의 해상 패권을 차지하자, 몬세라트의 성모는 아라곤 왕국의 전 영토 내에서 국가의 수호자로 받아들여졌으며, 1409년에는 몬세라트 수도원이 대립 교황 베네딕도 13세 교황에 의해 독립된 수도원이 되었다.
15세기 들어 카탈루냐 지역의 정치 상황이 혼란스러워지자 몬세라트 수도원은 카탈루냐 독립군을 지원하였는데, 카탈루냐 독립군을 진압하고 스페인을 통일한 이사벨(Isabel)과 페르난도(Fernando) 국왕 부처는, 1943년 이 수도원에 거주하던 카탈루냐 출신 수도자들을 축출하고, 수도원을 왕립 발라돌리드(Valladolid) 수도원의 관리 하에 두었다.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수도원은 정치적 갈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네로스(Garcia Jimenez de Cisneros) 같은 뛰어난 수도원장이 배출되어 수도원은 더욱 번창하였고, 순례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자 국왕은 몬세라트의 성모에 대한 신앙을 스페인의 새로운 식민지를 통치하는 구심점으로 활용하였고, 특히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자 몬세라트 출신의 보일(Bernardo Boil) 신부를 그곳에 파견하여 신앙 전파에 힘쓰게 하였다. 보일 신부는 중남미에 파견된 첫 선교사였으며, 이후 몬세라트의 수도원은 중남미를 선교하는 중요한 거점 중의 하나가 되었다. 1811년 프랑스의 나폴레옹군이 스페인을 침공하였을 때 저항 거점이었던 몬세라트 수도원은 파괴되고 말았는데, 이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파견된 문타다스(Muntadas) 수도원장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1936년 스페인 시민 전쟁 때에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약탈되면서 다수의 수도자들이 살해당하기도 하였는데, 수도원의 기능이 정상으로 회복된 것은 1939년 1월 공산당이 패망한 뒤였다. 다시 옛 영화를 되찾은 몬세라트 수도원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사라고사의 필라르(Pilar) 성당과 함께 스페인의 3대 순례지로 손꼽히고 있다.

몬세라트 수도원을 거쳐간 성인, 국왕, 그 외의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은 수없이 많다. 대부분의 스페인 국왕들이 이곳에 순례하였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오스트리아의 페르난도 3세 등이 다녀갔으며, 카탈루냐 출신의 대학자 룰리오(Ramon Llullus)와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 그리고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그 외에 괴테, 실러, 바그너 등 예술가들도 몬세라트의 성모에게 참배하였다. 그 중에서 수도원과 가장 깊은 인연을 맺은 사람은 성 이냐시오 데 로요라(Ignacio de Loyola)이다. 그는 전쟁에서 부상당한 후, 이곳에 와서 차논(Juan Chanon)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받은 뒤, 세속의 기사도를 버리고 성모의 기사가 되기로 맹세하였다.
세비야 (Sevilla)
마드리드에서 동남쪽으로 538Km 위치. 현 안달루시아 자치지역의 수도로 스페인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다. 똘레도 이전 로마시대의 중심도시였으며 Visigodo 왕국의 수도였고, 11-12세기 Muslim 왕국의 대표적 도시로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 교도의 공방전이 무수히 벌어졌던 곳이다.
구아달끼비르 강을 끼고있는 세비야는 페니키아인들 시대부터 문명이 있었던 도시로 페니키아인들은 금을 찾아 구아달끼비르 강을 거슬러 올라와 세비야에 식민도시를 건설하였는데, 나무와 흙으로 도시를 둘러가며 성벽을 쌓았다. 그 뒤를 이어 카르타고 인들이 기원 5세기경 세비야의 주인이 되었다.
로마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오면서 세비야는 이베리아 반도의 주요한 로마의 거점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시저도 두 번에 걸쳐 세비야를 방문했으며 폼페이우스와 대결했을 때 세비야 거주 로마인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로마인의 뒤를 이어 비시고도 족이 한때 세비야의 주인이 되었으며 711년 이슬람 인들의 이베리아 진주 이후 세비야는 1248년 다시 기독교인들에 의해 탈환될 때까지 약 500년 이상의 세월을 아랍인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스페인에 아랍인들이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비시고도 왕국의 내분 때문이었다. 처음엔 용병으로 건너왔으나 곧 비시고도 족을 몰아내고 반도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세비야는 1500-1600년대 중남미와의 교역의 중심지로써 황금기를 누렸으며, 중남미의 막대한 금과 은이 세비야를 통해 들어와 한때 '황금의 도시'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한편 1646년에는 세비야를 휩쓸었던 페스트로 전체인구 30만 명중 20만 명이 죽는 참사를 겪기도 하였다.

세비야는 1492년 콜롬부스가 신대륙 발견을 하러 떠날 때 출발지이며, 마젤란의 빅토리아호도 세비야에서 출발하였다. 세비야는 엑스포와도 인연이 깊은 도시로 1929년 세비야에서 스페인어권 국가들의 엑스포가 열렸고 1992년에는 콜롬부스 신대륙 발견 출항 500주년을 기념해서 세계 엑스포가 세비야에서 열리기도 했다.
세비야는 비제의 <카르멘> , 모짜르트의 <돈 후안> ,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등의 무대가 되었던 도시로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외국문물과의 잦은 교류를 통해 학문과 예술이 발달했다. 세비야의 황금기에는 벨라스케스나 무리요 같은 스페인 회화의 거장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세비야는 스페인 플라멩코의 본 고장으로 유명하다. Santa Cruz 구역에는 15-16세기 도시형태를 보존하고 있으며 플라멩꼬 관람명소인 ‘Los Gallos??에는 플라멩코 무용수들과 그들의 공연장인 선술집 형태의 따블라오가 모여 있다. 4월의 부활절 대축제가 유명하며 지금도 이 지방에는 카르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가씨들이 많이 남아 있다. * 세비아 대성당
고딕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유럽의 3대 성당중의 하나다.
이슬람교도를 몰아내고 기독교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회교사원을 부수고 그 자리에 지은 것(1396년 세비야에 지진으로 당시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세비야의 회교사원을 헐고 성당을 건축)으로 폭 116m, 내부 길이 75m의 세계에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다음으로 큰 성당이다. 1402년부터 200년에 걸쳐 고딕양식으로 건설하였고 성물실에는 예수 면류관의 조각이 있다.
그라나다 (Granada)
안달루시아 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달루시아 주 정부가 있는 곳이다.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432Km 지점.
1236년 스페인의 기독교 세력에 의해 꼬르도바가 함락 당한 후 Muslim 왕국의 안달루시아지역 수도가 되었다. 1492년 이사벨 여왕의 기독교군에 의한 그라나다 함락과 함께 이베리아 반도가 통일될 때까지 번영을 구가하였다. 지리적 위치와 다양한 자연환경이 특징적인 곳으로 온화한 기후인 해안지대와 광활하고 비옥한 평야, 한랭기후의 산악지대가 있다.
그라나다는 크게 두개의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알바이신과 알함브라가 있는 구시가 지역과 그랑비아 데 콜론 거리와 레이스 카토리코스 거리가 교차하는 신시가지역이다. 산책과 휴양에 적합한 도시로 좁은 골목과 널찍한 정원들과 대조를 이루며 수많은 유서 깊은 건축물과 화려한 플라멩코 쇼가 관광객을 끈임 없이 매료시키고 있다. 알함브라 궁정, 성(Alcazaba)과 훼네랄리페(Generalife)
시 중심에서 "red hill" 이라고 불리우는 언덕에 위치한 스페인 회교 양식의 가장 매력적인 건축물인 알함브라궁전은 현존하는 아랍문화양식 건축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궁전의 하나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기타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으로 유명하며 14-15세기 Muslim족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알함궁전에 가려면 그라나다의 다른 거리와 마찬가지로 성문 "푸에르타"에서 끝나게 되는 고메레스를 따라가야 한다. 14세기에 스페인에 최후까지 남아있었던 Muslim통치의 Nasrid왕국이 붉은 색의 성(La Alhambra)을 세웠는 데 이 성은 El Generalife의 성들과 같이 아름다운 연못과 수영장이 있는 매혹적인 정원과 커다란 Patis(스페인 안뜰), 포르트칼 정자 등이 있는 정교하고 세련된 양식의 성이다.

* 구아딕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 중 하나이다. 언덕 위 경사면에 있는 동굴 주거형태가 독특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11세기의 알카사바 요새, 16세기와 18세기 중에 세워진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성당, 산티아고 교회와 같은 무데하르 건축물등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
꼬르도바 (Cordoba)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400Km 지점에 있다. 옛 로마시대(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의 중심지이며 세네카(네로 황제의 스승)의 출생지로 로마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711년 무어족이 안달루시아를 침입하면서 시작된 아랍민족의 스페인 지배시 Muslim 왕국의 수도(758년)가 되었다.
대표적 명소로는 8세중반 건축되고 추후 증축된 Mezquita-Catedral(아랍 회교사원)이 있다. 850개에 이르는 기둥과 말발굽 형태의 아치를 가진 독특한 건축물로 UNESCO에 의해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됐다.
발렌시아
역사적으로는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 고트, 아랍 등의 지배를 받아 왔으며, 1094년에 국민적 영웅 엘시드가 정복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자 다시 엘아랍의 발렌시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1238년에야 아라곤왕(王)이 탈환하였다. 19세기에는 프랑스의 지배와 이에 대한 저항운동, 시민전쟁, 때로는 공화파의 철저한 저항으로 파괴가 심했으나, 성당을 비롯하여 역사적 건조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현재는 상공업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 종교, 교육, 문화의 중심지이며 후스티시아 궁전, 예술 및 도자기박물관, 식물원, 고생물 박물관 등이 있다. 또한 기후가 쾌적하여 관광객이 찾는다.
사라고사 (ZARAGOZA)
사라고사는 아라곤(ARAGON)의 중심도시이며, 이곳은 리오강 유역의 비옥한 제방 위에 위치하는 스페인의 다섯 번째 큰 도시이다. 또한 이곳은 로마시대나 아라비아시대에는 중요한 도시였다.
원래 이곳은 살두바라고 하는 켈트족의 거주지였다. 그러나 쎄싸라우구스따라고 하는 로마인들의 거주지로부터 '사라고사'라는 이름이 유래한다.
삘라르의 성모 성당은 화려하게 타일을 붙인 11개의 둥근지붕으로 유명하다. 성당 내부에 있는 ‘산따 까비야’는 벤뚜라 로드리게스의 작품으로 빛나는 은과 꽃들 사이의 기둥 위에 작은 성모상이 있다.
쌍두아리오 데 로욜라 (Santuario de Loyola)
* 로욜라(lgnatius de Loyola 1491~1556)
[ 생애와 활동 ]
이냐시오는 1491년 스페인 기푸스코아(Guipuzcoa) 지방의 아스페이티아(Azpeitia) 읍 위쪽의 로욜라 성(城)에서 스페인의 명문 귀족 바스크 가문인 아버지 벨트랑 아녜스 데 오녜스 이 로욜라(Beltran Yanez Onez y Loyola)와 어머니 마리아 사엔스 데 리코나 이 발다(maria Saenz de Licona y Balda) 사이에서 태어난 11남매 가운데 막내였다. 그는 1506년에 당시 귀족 집안의 관습대로 스페인의 왕실 재무상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Juan Velasquez de Cuellar)의 집에서 위탁교육을 받았는데, 이때부터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명예를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머리와 옷 등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며 허영과 사치를 일삼았다. 벨라스케스가 사망한 후인 1517년에 이냐시오는 군에 입대하였다. 1521년 나바라의 팜플로나(Pamplona)에서 프랑스군과의 교전 중에 다리 부상을 입었는데, 이때 그는 생애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성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그의 용감함에 탄복하여 그를 치료해 주었고, 로욜라의 가족들에게 후송해 주었다.
이냐시오는 부상으로 인한 치료를 마치고 회복기에 접어들자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평소 즐기던 낭만적인 기사 이야기를 실은 책을 읽고 싶어했다. 그러나 성(城)에는 그러한 책이 없었고, 대신에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책을 읽어 가면서 기사로서의 공상들이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뿐이며,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면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는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그는 전자는 세상에 속한 것이며, 후자는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깨달았다.
이런 내면적인 체험을 할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하였다. 이 환시에서 그는 크나큰 위안을 받았고 지난날의 생활 전체, 특히 육을 따르던 행실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회심의 길로 들어섰다.

[ 영적 성장 및 연학(硏學) ]
회심 후 이냐시오는 로욜라를 떠났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명확한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막연히 책에서 읽은 대로 성인들이 행하던 모든 고행을 따르고 싶은 갈망을 안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가 최초로 행한 회심의 행동은 몬세라트(Montserrat)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머물고 있던 1522년 3월 24일 밤중에, 몰래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주고 그토록 입고 싶었던 순례자의 의복을 입었고, 기사의 상징인 장검과 단도는 순례 성모성당에 있는 유명한 검은 성모제단에 봉헌하였다. 그 때부터 그는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느님은 이냐시오 마음의 중심이었으며 그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상 생활의 사소한 일까지도 하느님을 위한 봉사로 바치고자 했다.
1522년 3월 25일 그는 몬세라트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Manresa) 마을 근처의 동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기도와 극기와 명상에 몰입하였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 갔다.
평화를 얻으려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지난 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고행을 하였다. 그의 저서로 유명한 「영신수련(靈神修鍊, Exercitia Spiritualis)」은 바로 이 시기에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 당시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도와 보속의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철저히 따르고자 하였던 것이다. 1523년 2월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은 그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각고의 고통을 체험한 끝에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당시 성지 관리를 담당하고 있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은 그에게 본국으로 되돌아갈 것을 명하였다. 이냐시오는 남고자 하였으나 그들이 교황으로부터 받은 권한으로 그에게 명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발길을 돌려, 1524년 3월에 바르셀로나로 되돌아왔다.
이냐시오는 예수살렘을 떠나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회심 이후 약 11년 간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526년에는 알칼라 대학, 1527년 살라망카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1528년 3월 14일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1535년 봄 스페인으로 돌아가 요양하였다.
그의 연학 시기는 수많은 시련이 있었던 시기였다. 그의 지나쳐 보이는 열성과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열정은 많은 이들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켰으며, 이는 여러 가지 곤경을 가져왔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두들겨 맞는 일을 겪기도 했으며, 알칼라에서는 이단이란 오해를 받고 종교 재판관에게 심문을 당했으며 급기야 감옥에 두 달 간 갇히기도 하였다. 이 사건 때문에 살라망카로 옮겼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그는 동료와 함께 사슬로 발이 묶인 채 감옥에 갇혀 있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오히려 이냐시오를 더욱 굳건히 단련시켜 주었다. 파리에서도 시련은 계속되었다. 성 바르나바 대학의 학장에게 공개적으로 매질을 당하였으나, 후의 그의 설명을 들은 학장은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였다. 파리에서 그는 종교 재판에 제소되어 빈번히 곤경에 빠졌으나, 그때마다 무혐의로 풀려났다.

[ 수도회 창립 ]
그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을 파리에서 만났다. 즉 사보아 출신인 파브르(P. Faber), 나바라 출신인 사베리오(F. Xaverius), 스페인인 라이네스(J. Laynez)와 살메론(A. Salmeron)과 보바디야(N. Bobadilla). 포르투갈인 로드리게스(S. Rodriguez) 등이다. 후에 사보아 출신인 르 제이(C. Le Jay)와 프랑스인인 코뒤를 (J. Codure)와 브뢰(P. Broet) 등 세명이 더 가담하였다. 그들은 이냐시오처럼 외적 고행·구걸·단식·맨발로 다니기 등으로 단련하였다. 그러나 만레사 같은 조용한 시골에서는 이런 일들이 가능하였지만, 도시에서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파리에서는 의복이나 관습 등이 대도시에 맞게 적응해야 했으며, 단식 등을 줄이고 공부와 영적인 훈련에 더 관심을 기울였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한 후원금을 모으는 일도 가능하였다.
그 당시 이냐시오 주위에 모든 동료들은, 이냐시오에 대한 신뢰와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이 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이냐시오의 생각을 따르려고 하였다.
1534년 8월 15일에 그들은 몽마르트의 수도원의 순교자 성당에서 가난과 정결, 그리고 공부가 끝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세 가지 서약을 하였다. 하지만 6개월 후 이냐시오는 건강의 악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 돌아간 그는 건강을 회복시키면서 동시에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영혼 구원을 위한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1537년 1월 베네치아에서 9명의 동료들이 모였다. 그러나 당시 터키와의 전쟁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황의 허락을 기다리며 1년 간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냐시오는 1537년 6월 25일 동료들과 함께 베네치아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7년 겨울 이냐시오는 동료 파브르와 라이네스와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갔다. 로마 근교의 라스토르타(La Storta)라는 마을의 경당에서 이냐시오는 환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부께서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자리에 있게 해주시는 환시를 보았는데,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Ego vobis Romae propitius ero)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Compania de Jesus, 예수의 동반자라는 뜻)라 불렀으며,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사실 그때까지 그들은 장상·규칙·전통 없이도 열심히 생활하고 있었다. 교황은 그들을 이곳 저곳으로 파견하기를 원하고 있었고, 이것은 그들도 원하는 바였다. 그러나 그들이 했던 서원들에 더하여 순명 서원을 함으로써 자신들을 수도 단체로 만들어야 할지, 아니면 교구 사제로 남아야 할지 등 다양한 의견들을 진지하게 나누었다. 여러 주간의 논의 끝에 결국 순명 서원 아래 자신들의 삶을 맡긴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냐시오는 다섯 부분으로 된 「예수회 기본법(Formula Instituti)」을 작성하여 1539년 9월 3일 교황으로부터 잠정 인가를 받았고, 1540년 9월 27일에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의 교서 「레지미니 밀리탄티스 에클레시에(Regimini militantis Ecclesiae)」가 발표되었다. 이듬해 4월 이냐시오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4월 22일에 그와 동료들은 로마의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 서원을 하였다.

이냐시오의 말년은 예수회 총장이라는 사명 때문에 그가 좋아하던 활동적인 일을 할 수 없었다. 1551년에 건강이 더욱 악화되자 그는 회원들에게 처음으로 총장직에 대한 사의 표시하였으나 거부되었다. 이냐시오는 로마에 머물면서 세계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는 회원들을 세심하게 이끌었으며, 6,000여 통의 당시 편지들이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1556년 여름 로마에서 열병에 걸린 그는 7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 저술 ]
이냐시오는 그리스도교 영성사에 큰 영향을 끼친 두 개의 저술을 남겼다. 「영신 수련」은 1521년 로욜라에 있을 때의 체험에서 출발하며, 핵심적 뼈대는 1522년 만레사에 있는 동안 완성되었다. 만레사에서 그는 「영신 수련」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 도움을 주기 시작하였다. 「영신 수련」은 1548년 교황 바오로 3세의 칙서 「파스토랄리스 오피치(Pastoralis Officii)」로써 인준을 받았다. 예수회의 「회헌」은 이냐시오가 동료들로부터 1541년부터 쓰도록 위임받았으나, 그 당시에는 개요 정도만을 작성했고, 1547년 폴랑코(Polanco)신부가 이냐시오의 비서가 되면서, 그의 도움으로 「회헌」의 초안이 1647~1550년 사이에 작성되었다. 이 초안이 모든 회원들에게 보내져서 면밀한 검토를 거쳐 수정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작업은 이냐시오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이후 첫 총회에서 인준되어 「회헌」이 처음으로 인쇄된 이후 한 번도 수정되지 않았다.

[ 시성 ]
이냐시오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622년 3월 12일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오 15세(1621~1623)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그의 시신은 로마에 있는 예수 성당(Santissimo Nome di Gesu)에 안치되었다. 예수회가 설립된 지 16년 만에 예수회는 1,000명이 넘는 회원들과 100개 공동체, 10개가 넘는 관구들로 성장하였다. 심종혁 집필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한국가톨릭대사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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