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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성지안내



1. 개요
폴란드는 독일, 체코, 러시아연방과 접경하며, 국토의 대부분이 해발 200m 이하의 폴란드 평원으로 비수아강/오드라강의 유역이다. 남부 국경에 수테티/카르파티아 등의 산맥이 뻗어 있고, 최고봉은 해발 2,499m의 리시봉이다.
폴란드라는 말의 어원은 폴란드어로 폴스카인데, 폴스카란 ‘밭’ 또는 ‘숲 속의 풀밭’, ‘낮은 땅’을 뜻한다.
국가명 폴란드 공화국 (THE REPUBLIC OF POLAND)
수도 바르샤바 (WARSZAWA, 165만명)
면적 312,683 ㎢ (한반도의 1.4배)
인구 3,870만명(123.5명/㎢)
주요민족 폴란드인 (98.7%), 독일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등 - 단일민족 국가
주요언어 폴란드어 (POLISH)
종교 가톨릭 (95%), 신교, 희랍정교, 이슬람교, 유태교 등
화폐 즈워티 (ZLOTY)
기후
온도/월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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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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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성 기후(동부), 해양성 기후 (서부)
연평균 기온 : 7-10℃(겨울최저 : -21℃, 여름최고 : 34℃)
- 강수량은 평야 500㎜, 산악지대 1,000㎜ 정도
주요산업 석탄, 구리, 유황, 천연가스, 은, 납, 소금
전압 -
시차 -

1. 역사
6세기경에 지금의 폴란드 북서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한 서슬라브인은 10세기경에 폴라니족에 의해 통일된다. 이들은 966년, 폴라니족 피아스트(Piast) 왕조의 미에슈코 1세(Mieszko I)가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임으로써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1025년 볼레스와프가 왕위에 올라 피아스트 왕조의 기반을 다지며 지금의 폴란드와 유사한 영토를 확보하였다.

1241년과 1259년에 연이어 몽고의 타타르족의 침입을 받아 폴란드 남부 지방이 황폐화되는 등 피아스트 왕국은 1320년 통일될 때까지 외세의 침입에 따른 국권의 수호에 힘을 쏟아야 했다. 14세기 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카지미르 3세는 문화의 부흥과 개혁에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크라쿠프, 루블린, 포즈난 등의 도시가 이 때 세워졌다.

1410년에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연합군은 그룬발트 전투에서 독일의 튜톤 기사단을 물리쳤고 1454년에 시작된 13년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그들을 완전히 와해시켰다. 이렇게 되자 프로이센은 1525년에 폴란드의 속지가 되었고, 1490년에 카지미르 4세는 헝가리의 왕위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 폴란드는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문화와 종교, 사회 전반에 걸쳐 역사적 부흥기를 맞았다.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저작을 내놓았으며, 종교면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 교조적인 중세의 종교 행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팽창에 대항하여 1569년에 공식적으로 합병하였는데, 이로써 폴란드는 남쪽의 흑해에서 북쪽의 발틱해에 이르는 대국가를 건설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596년 왕 지그문트 바자는 수도를 바르샤바로 옮겼다.
1655년 프로이센은 스웨덴과의 전쟁 패배로 폴란드에 대한 세력 확장을 꾀해 폴란드는 강대국들의 내정 간섭까지 받으며 급격히 쇠퇴해 갔다. 주변 강대국들은 폴란드의 내정에 적극 개입하였고 마침내 1772년에 폴란드 분할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폴란드 영토의 3분의 1이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분할되어 폴란드는 1919년에 독립할 때까지 120년 동안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비운의 역사를 맞게 되었다.

끊임없이 독립에의 의지를 키우던 폴란드는 마침내 러시아 제국의 멸망,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몰락, 그리고 독일 제국의 패망과 함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힘입어 1918년 자력이 아닌 외부의 힘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 폴란드는 소련과 독일 제국 등의 세력 확장으로 또 한 번 위기를 맞게 된다 . 특히 1차 세계 대전 이후 세력 확장을 꾀하던 독일은 마침내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침략하여 일부 영토를 점령하고 1939년 8월에 소련과의 비밀 조약으로 폴란드를 침략하였다. 나치 독일은 유태인뿐만 아니라 폴란드인에 대해서도 무자비한 학살을 저질러 폴란드 전체 인구의 20%인 600여 만 명이 희생되었다.

1944년 7월에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얄타회담의 결과로 폴란드는 독일의 일부 영토를 할당받아 국경이 서쪽으로 240km 이동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들어 무리한 중공업 정책은 서방의 기술과 자본에 의존하게 되어 외채가 증가하고 상대적으로 소비재 산업이 낙후하게 되어 심한 소비재 부족 현상을 가중시켰다. 급기야는 1980년 7월, 육류 가격 인상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공산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파업권 등의 권한을 가진 자유 노조 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가 탄생하였고, 이후 1989년 6월 4일에 실시된 전후 최초의 자유 총선에서는 자유 노조가 압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로써 폴란드는 동구 최초로 비 공산 연립 정부가 출범하게 되었고, 이는 동구 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어 자유 노조 정부는 국호를 '폴란드 공화국'으로 바꾸고 헌법의 사회주의 국가 조항을 삭제하여 본격적인 시장 경제 체제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하게 되었다.

폴란드는 2004년 5월 1일 EU공동체에 가입했다.
2. 주요 순례지
바르사바 지역
폴란드 수도. 면적 445㎢. 인구 165만(2002).
폴란드 중동부(中東部) 마조프셰 지방에 있다.
10세기경 취락과 성벽이 형성되고, 15~16세기에는 마조프셰공(公)의 거성(居城)이 있었다. 1526년부터 폴란드 왕국령이 되었으며, 1596년에 지그문트 3세가 이곳을 왕국의 수도로 정한 이후 발전하였다. 17세기에 스웨덴군의 침입과 페스트의 유행으로 한때 발전이 정체되었으나 그 후 급속히 부흥하여 18세기 후반에는 크게 발전하였다. 1807년에는 B. 나폴레옹이 창설한 바르샤바공국의 수도가 되었고, 1815년부터는 빈회의 결과 성립한 러시아령 폴란드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1818년에는 대학이 설립되어 문화·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830년과 1864년에 반(反)러시아봉기가 일어났으며 봉기가 진압된 뒤에는 억압정책이 강화되었으나, 19세기 후반에는 유럽의 여러 도시와 철도로 연결되어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함으로써 인구도 증가하였다.
19세기 말부터는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으나, 1918년 폴란드공화국의 독립으로 그 수도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스 독일에게 점령되자 시민의 저항운동이 일어나 많은 폴란드인과 유대인이 억압·학살되었다.

시가지는 비슬라강 중류 양쪽 연안의 하안단구 위에 형성되어 있다. 비슬라강 유역의 평야는 북독일 평야에서 광대한 러시아평원에 이르는 구조평야(構造平野)의 일부이다. 바르샤바는 비슬라강 중류유역의 농업지역 중앙에 위치함으로써 경제적으로 후진지역 속에 섬처럼 있는 대도시이다. 1월평균기온 -3.3℃, 7월평균기온 18.1℃이며, 겨울은 춥고 여름은 지내기 좋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의 경제성장 거점으로 발전하여 인구는 해마다 급증하였다. 공업은 금속·기계공업을 중심으로 화학·금속가공·식품·섬유 등 여러 공업이 발달했다.
바르샤바는 수륙공(水陸空)의 교통상 요지로서 레닌그라드·모스크바·베를린·파리·빈·소피아 등지로 향하는 국제열차가 바르샤바 중앙역에서 발착한다. 남부의 오켄체 국제공항에서 동서유럽 각 도시로 가는 항공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비슬라강에 있는 하항은 운하망에 의해 드네프르강·오데르강·엘베강과 연결됨으로써 내륙 수운의 중심이 된다.
학술·문화·예술의 중심지이며, 1927년이래 5년마다 개최되는 쇼팽 국제피아노 콩쿠르가 유명하다. 옛 왕궁을 비롯하여 17~18세기의 궁전은 정부관계의 청사로 이용되고 있다. 남쪽 근교에는 소비에스키 3세의 여름철 이궁(離宮)이었던 바로크양식의 빌라누프 궁전이 남아 있다. 시장광장을 중심으로 하여 14세기 고딕양식인 성 요한 성당 등 전통이 오래된 교회가 많이 있다.

주요관광지는 와젱키 공원, 바르샤바 왕궁, 빌라노프 궁전, 무명 용사비, 국립 미술관, 퀴리부인 박물관, 구시가(Old Town), 쇼팽의 생가, 젤라조바 볼라 등이 있다.
크라코프 Krakow
폴란드 남부 비슬라강 상류 연변에 위치한 도시. 인구 75만 1,300명(1992). 크라코프시(Krakow)라는 지명은 600년경 Wawer 구릉에 요새를 구축하고 Vistula 강 출입을 통제하던 한 슬라브 종족의 전설적 지배자였던 Krak이라는 이름에서 유래.

수백 년 동안 세계적으로 명성이 이어져온 이 곳은 경제와 문화적인 면에서 폴란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오는 곳이다. 비스와 강변에 세워진 크라쿠프는 오랜 세월 동안 폴란드의 중심 도시였으며 수천 개의 유적이 있는 도시로서 6세기 이상 전통을 지닌 활기찬 문화의 중심지이다.
중세기 초, 이곳은 ‘비슬라니에’ 종족의 중심지였다. 서기 1,000년에 크라코프에 로마 가톨릭의 주교구가 설치되었다. 11세기에 ‘카시미르’왕이 크라쿠프를 폴란드 수도로 정하면서 바벨성 자리에 건물을 세웠다. 타타르족(중앙 아시아 지역에 살던 몽고족)에 의해 파괴(1241년)된 이후 정방형의 광장을 만들고 그 것을 중심으로 한 체스판 모양의 거리구조를 가진 도시가 탄생되었다. 오늘날까지 그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
1320~1609년 폴란드 왕국의 수도였으며, 1815~46년 크라쿠프 공화국의 중심지였다.
카시미르 대왕이 집권시기인 14세기는 크라쿠프 전성기로 고딕 양식으로 바벨성과 도시를 지었으며,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크라쿠프 아카데미(야기엘론 대학의 전신)를 창설했다. 야기엘론 왕조의 마지막 시기에 ‘지그문트 3세 바자’가 17세기초(1609) 폴란드의 왕궁을 바르샤바로 옮겼다. 그러나 크라쿠프는 여전히 왕국 수도의 명칭을 유지하면서 대관식과 왕실 장례식, 그리고 왕실 묘를 안치하는 도시로 남아 있게 된다.
17세기 중반과 18세기 초에 스웨덴 군대에 의해 크라쿠프는 파괴 되었다.
그 후 폴란드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그리고 프러시아에 의한 3차례 국가 분열 을 겪게 되는데 제 3차 분할 때 크라쿠프는 오스트리아에 넘어가고 만다. 나폴레옹 패전 이후 빈 회의에서 크라코프는 자유도시로 선포하게 된다.

1978년 유네스코는 크라쿠프 구시가지를 세계문화 유산으로 선정했다. 주요관광지로는 바벨성, 중앙 광장, 마리아 성당, 야겔로니안 대학, 아우슈비츠 나치수용소 등이 있다

도시 중심부는 크지 않기 때문에 걸어서 다니기에 충분하다. 차토리스키(Czartoryski)박물관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담비를 안은 여인' 이라는 불후의 명화가 소장되어 있으며 아시아의 수공예품과 무기뿐만 아니라 인상적인 유럽 예술품도 전시되어 있다. * 비알리츠카 소금광산
크라코프 동남쪽 15Km에 위치하고, 세계 12대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1978년 유네스코 최초로 자연 및 문화 유산에 선정되었다. 전통적인 인사말인 ‘신의 영광(God Bless You)’은 오래 전부터 이 비알리츠카 소금광산 인부들이 서로 지나갈 때 쓰던 인사말이다. 비알리츠카 소금층은 180만년에서 200만년 전에 형성된 자연이 만든 경이로움이다. 오랫동안 바다였던 이곳은 물이 증발한 후 소금(염화 칼슘)만 남았고 암염이 되기까지 약 1만 5천 년이 걸렸다. 그 뒤 발생한 지각변동은 이 소금 층이 복잡해진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진흙과 점토로 쌓인 소금은 지하에 흐르는 물에도 씻겨 나가지 않고 남아 있게 되었다. 소금 층은 서에서 동으로 약 10km정도 뻗어 나갔으며 두께는 500m에서 1.5km에 이른다. 가장 깊은 소금 층은 340m를 내려가야 한다. 비알리츠카 소금광산은 약 5,000년이 넘게 존재해 왔다는 것을 11세기에 알게 되었다. 그 뒤 괄목 할 만한 발전이 뒤따랐으며 1996년까지 소금을 채취했었다. 지금은 소금 채취를 중단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14세기 현명한 카시미르 대왕은 소금에 대한 일반법을 성문화했는데 이 것은 ‘회색의 금??을 캐는 광부들의 법과 특권을 규정한 것이기도 하다. 항상 국가 권력자들의 소유였던 소금 광산의 경영은 오로지 ‘믿을 수 있는 측근??에게 위탁하든지 임대하였다. 크라코프의 전성기인 야기엘로 왕조 때에는 국가 제정의 1/3이 소금무역에서 얻을 정도였다. 광부들은 소금광산에 대해 천천히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알게 되었고 광산의 비밀과 부를 알게 되었다. 소금을 캐고 난 뒤 남은 공간은 나무를 세워 버티게 하였고, 안으로 흘러 들어온 물은 소금을 얻기 위해 끓였다. 700년이 넘게 존재해 오는 동안 소금 7,500만 톤을 캐내었는데 화차에 싣고 열을 세우면 적도의 1/5길이에 해당한다.
오시비엥침 Oswiencim (독, 아우슈비츠 Auschwitz)
* 독일의 폴란드 침공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암호명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로 명명된 작전명령이 떨어지자 숙달된 히틀러의 정예부대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친선방문으로 위장한 독일 연습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호의 모든 포문은 폴란드의 단치히 동쪽 해안을 향해 일제히 열렸다.
바야흐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사전 밀약에 따라 폴란드 국경의 서쪽은 독일이, 동쪽은 소련이 쳐들어와 폴란드 영토를 절반씩 차지해 버렸다. 개전 꼭 한 달 5일 만에 폴란드에서는 총성이 그치고 절반의 영토가 독일 제3제국에 편입되었다.

* 전략적 요충지 아우슈비츠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할 때 가장 먼저 작전을 펼친 곳은 오시비엥침-브레제진카(Oswiencim-Brezezinka)였다. 독일은 이곳을 점령하고 난 후 지명을 독일식 발음으로 고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라고 명명했다.

독일이 오슈비엥침을 제일 먼저 점령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오슈비엥침은 폴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중화학공업 지역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데 중화학공업의 필요성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전쟁 중 폴란드가 군비를 정돈하여 재 반격할 수 없도록 오슈비엥침을 제일 먼저 점령해야만 했다.
둘째, 이곳은 폴란드의 야전군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야전군 사령부가 힘을 쓰지 못하게 하려면 개전 초 전광석화와 같이 빨리 점령하여 야전군 사령부의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밖에 없었다. 셋째, 오슈비엥침은 지형적으로나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다. 오슈비엥침은 주위에 강이 흐르고 있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섬과 같이 보이는 외딴 지역이었다. 나중에 이곳에 수용소가 만들어지고 난 후 경비도 철저했지만 지리적인 자연 조건이 탈출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했다.
또한 유럽 지도를 펴놓고 볼 때, 아우슈비츠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 영국과 러시아 모스크바를 포함하여 유럽 모든 나라들이 원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북쪽의 스칸디나비아 끝에서 아우슈비츠까지는 약 2,100㎞, 남으로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까지는 약 2,200㎞인 것으로 보아 전 유럽의 중심이 바로 이 아우슈비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일이 아우슈비츠를 점령한 후 수용소를 만들기는 1940년 초였다. 처음에는 폴란드의 정치범을 수감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이곳에 수용된 사람은 폴란드 지하단체 활동가나 지식계급, 국가의 지도자급 인물들이었다. 여기에서 처형된 폴란드의 정치범들은 10만 명가량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나치는 유럽 각국에서 국적을 얻은 유태인 집시, 소련군 포로 들을 이곳에 보내오기 시작했다. 수감된 사람들 중엔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구 유고슬라비아인, 프랑스인, 오스트리아인 그리고 독일인이 있었다. 이와 같은 수용소는 전 유럽에 1천여 곳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시설투자를 가장 많이 한 곳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 수용소 설립
1939년 9월 전쟁이 일어난 후 오시비엥침市(아우슈비츠의 폴란드식 이름)를 포함해 그 일대는 독일 제3제국의 일부에 편성되었고 동시에 이름을 아우슈비츠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바로 1939년 말 폴란드의 브로츠와프市 의 SS사령부(SS : Schutzstaffel 나치 독일 친위대)와 경찰국에 의해서 수용소 계획이 수립되었는데, 그 이유는 실레지아 지방(지금의 폴란드 남서부)의 형무소가 수감자로 가득 찼고, 실레지아 지방과 총독관구(독일의 폴란드 점령지)에서 폴란드 주민의 대량체포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수용소 부지 선정을 위한 몇 번의 특별회의 결과 전쟁 전 오시비엥침시의 폴라드군 기지가 있었던 곳이 선정되었다. 그곳은 인구밀집지역과 떨어져 있고 증축과 격리가 용이했다. 게다가 오시비엥침은 철도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유럽각지에서 수송이 편리한 이점이 있었다.

1940년 4월, 설립명령이 내려 졌고 수용소장은 루돌프 회스(Rudolf Hoss)가 임명되었다.
첫 번째 수감자는 1940년 6월 14일 폴란드 타르누프市 에서 정치범 죄목으로 체포된 728명의 폴란드인이 호송되어 왔다. 설립 당시 20동(단층 16,동 2층 4동)이 있었다. 수감자들이 노동력으로 1942년까지 모든 동을 2층으로 개축하고 새로 8동을 증축했다. 취사장과 관리동을 제외하고 모두 28동의 건물이 수용소로 사용되었다.
1942년 한 때 28,000명이 수용된 적이 있었지만, 평균 13,000-16,000명이 수감되었다. 수감자가 늘어남에 따라 수용소의 크기도 확대되었고, 수용소는 거대한 살인공장으로 변해 갔다. 오시비엥침의 아우슈비츠 제1 수용소는(KL Auschwitz I)는 새로운 수용소 건설 계획의 기본이 되었다.
1941년 오시비엥침 시에서 3km떨어진 브졔치카(Brzezinka, 비르케니우의 폴란드식 이름)라는 마을에 제2 수용소 건설작업이 시작되는데, 그 후 아우슈비츠 제2 수용소 (KL Auschwitz II)라고 명명되었다. 그리고 1942년에는 오시비엥침 가까운 모노비체(Monowice)라는 마을의 염색공장이 있던 자리에 아우슈비츠 제3 수용소를 세웠다.
1942년부터 1944년에는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 관리 하에 약 40여 개의 소규모 수용소가 세워 졌는데, 그 수용소 대부분의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이용한 공장, 철공소, 탄광들이 근처에 있었다.

* 나치스의 광적인 인종 청소
[ 제1조 ]
1항 유태인과 독일인의 피 또는 이와 유연(類緣)의 피를 지니고 있는 독일 국민과의 결혼을 금지한다.
2항 무효의 고소는 검찰관만이 이를 제기할 수 있다.
[ 제2조 ]
유태인은 독일인의 피 또는 그 유연의 피를 지니고 있는 독일 국민과 내연의 관계를 맺는 것을 금지한다.
[ 제3조 ]
유태인은 독일인의 피나 또는 그 유연의 피를 지니고 있는 45세 이하의 여자 독일 국민을 하녀로 고용할 수 없다. 그 하녀에 대해서 과거에 폭력 또는 감언으로써 정교(情交)를 강요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이 법률의 시행으로 유태인 아내나 남편이 있던 독일인은 당장 이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유태인들은 공개장소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되고, 지금까지의 지위와 주거를 버리고 지정된 유태인 거주구(게토)로 옮겨, 유태인끼리만 모여 살아야 했다.

* 국립 오시비엥침 박물관
[ 제 1수용소 정문 ]
이문을 통해서 매일 강제 노동에 끌려 나간 수감자들은 하루 12시간이상 씩 일을 해야만 했다. 수감자들이 강제노동에 나가고 들어올 때에는, SS대원이 몇 천명이 나 되는 수감자들의 행진을 용이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취사장 옆 조그만 광장에서 수용소 오케스트라가 행진곡을 연주했다.

[ 제 4블록 ]
<1층 1호실>
수용되었던 사람들은 감금, 굶주림, 중노동, 의학실험, 사형집행 등의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 수용소는 1942년부터 유럽 최대의 유태인 학살지가 되었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도착하자마자 명부에 등록도 하지 않고 곧바로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정확한 희생자의 수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각국에서 수용소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약 15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 1호실에는 브졔진카(제2 수용소)에서 발견된 사체를 화장한 재가 용기에 담겨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1층 2호실>
SS사령관인 하인리히 히믈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유태인 학살지로 선택했다.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회고록에 히틀러의 말을 인용한 기록이 있다. "이곳보다 동쪽에 위치한 학살지에서는 대규모 행동이 불가능하다. 그 점으로 미루어보아 나는 그 목적을 위해 아우슈비츠를 선택했다. 교통 입지조건도 유리하고, 또한 주위로부터 격리, 차단하기가 용이하다."
곧이어 1942년 1월에 유태인 대량 학살이 이루어 시작되었다. 최초로 사형선고를 받은 유태인들이 실레지아 지방(폴란드 남서쪽)과 총독관구(독일군 폴란드 점령지)에서 호송되어 왔다. 다시 봄이 되자 슬로바키아,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북부, 리투아니아, 그 외 독일군 점령국에서 유태인이 연행되어 왔다.
독일 나치가 구 소련을 공격 할 당시에 아유슈비츠에는 12,000명의 소련군 포로도 수용되었는데, 그 중에 8,320명이 5개월 안에 목숨을 잃었다. 그 중 일부는 독가스로 독살 당하고, 일부는 총살당하고, 나머지는 쇠약해져서 죽었다.
그 범죄 행각의 증거가 되는 것이 사망자 명부이다.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5-10분만에 죽음을 당한 포로들의 사인을 거짓으로 적어놓은 명부인데, 몇 장의 복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이 곳은 또한 21,000명이나 되는 집시들의 학살 장이기도 했다. 그 증거의 하나는 수감자에 의해 훔쳐져 감추어 졌던 집시수용소의 죄수명부인데, 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1층 3호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처형을 위해 끌려온 유태인의 대부분은 동유럽으로 이주된다고 믿고 있었다. 특히 그리스와 헝가리 유태인들은 나치에게 속아서 존재하지도 않은 농장, 토지, 상점 등을 구입했고, 자신의 재산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왔다. 강제로 체포당해 끌려온 사람들 중에는 아우슈비츠에서 2,400km떨어진 곳에서 끌려오나 사람도 있었다. 이 사람들은 밀폐된 화물열차에 움직일 틈도 없이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밀어 넣어진 상태로, 식료품도 없이 7-10일간의 긴 여행 끝에 도착했다.
열차는 오시비엥침 화물역, 그리고 1944년부터는 브졔진카에 특별히 건설된 철도 끝에 있는 특별 하차장에 도착했다.


[ 제 2수용소 죽음의 문과 철로 ]
그곳에선 SS장교와 SS의사인 요제프 멩겔레 박사와 마주치게 된다.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병자와 노약자, 그리고 키 작은 어린이(이때 살기 위하여 어린이들은 발뒤꿈치를 들고 지나가기도 한다)들은 왼쪽으로 분류되었다.
이곳 병원에서 생체실험에 몰두했던 멩겔레 박사는 엄지손가락으로 왼쪽, 오른쪽을 표시하여 유태인의 생사를 갈라놓았다.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증언에 따르면 운송되어온 사람의 70-80%는 가스실로 보내어 졌다고 한다. 헝가리에서 온 유태인들을 학살 할 당시에 SS대원이 촬영한 약 200매의 사진 중에서, 수십 장의 기록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2층 4호실>
제2 화장터 가스실의 모형을 보면, 좌측에 지하 탈의실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샤워를 한다는 SS대원들의 말에 속아서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옷을 모두 벗고, 오른쪽에 샤워실로 보이는 방까지 걸어가면, 천장에는 물이 나오지 않는 샤워기가 달려 있다. 210m2(약 63.6평)의 지하실에 약 2,000명이 들어가면, 문을 닫고, SS위생병이 천장의 구멍을 통하여 지하실로 사이클론 B(Cyklon B)를 투입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15-20분 사이에 모두 질식사한다. 그 후에 금이빨을 뽑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반지와 목걸이를 빼낸 시체는 1층에 있는 화장터로 옮겼고, 너무 많을 때는 밖으로 운반해 쌓아 놓았다.
전시실에는 어떤 수감자가 1944년 몰래 촬영한, 가스실로 가는 여인들과 시체를 야외 쌓아 놓고 태우는 장면의 사진 3매가 전시되어 있다.

싸이클론 비(Cyklon B) 라는 독가스는 독일 데게슈(Degesch)사가 생산해서, 1941년부터 1944년 까지 약 30만 마르크의 이익을 내었다.

Cyklon B : 흰색 돌 같은 결정이 공기와 접촉하면 독가스를 발생시킨다 아우슈비츠에서만 1942년부터 1943년까지 약 2만kg을 사용하였다.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의 증언에 따르면, 약 1,500을 죽이는데 6-7kg의 독가스가 필요하다고 했다. 소련군에 의해서 해방 후 수용소 창고에는 사용된 싸이클론 비의 빈통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그 중에는 내용물이 들어있는 통도 있었다.
전시실에는 싸이클론 비의 결정과 데게슈사에 보내졌던 가스 운반 명령서 몇 장이 전시되어 있다.

<2층 5호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구 소련군에게 개방되었을 당시, 창고에서 자루에 넣어진 약 7톤의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본래 수용소 당국이 독일본국에 있는 공장에 보내기 위해 모아놓은 것이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해 머리카락에서 사이클론 화합물의 독성 원소가 발견되었다.
독일의 공장에서는 그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매트리스와 천 등을 제조하였다. 그리고 사체에서 뽑아낸 금이빨 등을 녹여서 막대모양으로 만들어 독일 중앙 위생국에 보내졌다. 화장시킨 시체의 재는 비료로 사용되거나, 가까운 곳의 하천, 연못 등지에 버려졌다.

<1층 6호실>
수용소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가지고 온 물건들은 철저하게 분류되어 SS나 군인, 일반시민이 이용하기 위해 창고에서 독일 본국으로 운반되었다. 물론 독살된 사람들의 물건을 SS대원들이 사용하기도 했다.
수감자들로부터 빼앗은 물건들을 실은 열차가 잇달아 본국으로 향해갔지만, 수용소의 창고에는 언제나 미처 분별작업을 하지 못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소련군이 오시비엥침에 접근해 옴에 따라, 창고에서 가치 있는 물건들을 본국으로 운반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개방되기 전날, 범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SS는 창고에 불을 질렀다. 그 결과 35개의 창고가 있는 블록(일명 캐나다 ) 중에 6개의 창고만 남아서, 그 안에 있던 몇 만 켤레의 신발과, 브러시 종류, 의복, 안경 등이 발견되었다.

[ 제 5블록 ]
이 곳엔 개방 후에 발견된 희생자들의 소지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소유자의 이름 주소 생년월일이 적혀 있는 트렁크, 브러쉬 종류, 신발, 식기, 신체장애자의 의수족 등이다. 전시되어 있는 어린이들의 옷과 신발, 우유병 등은 관람자들을 안타깝게 한다.

[ 제 6블록 ]
<1층 1호실>
처음 수용소로 들어올 때 수용소 관리국장으로부터 "너희들이 출구 화장터의 연기 하나밖에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의복과 소지품들을 빼앗기고, 3가지 포즈의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1943년부터 왼쪽가슴에 죄수번호 문신을 새겼는데, 죄수번호를 문신한 곳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뿐이었다.
줄무늬 죄수복은 천이 얇아서 혹독한 추위로부터 수감자들을 지켜 줄 수 없었다. 속옷은 몇 주 또는 몇 달간 세탁도 못하고 갈아입지도 못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전염병이 유행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티푸스와 옴 병이 유행하였다.

<2층 2호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명부에는 남녀 합해서 40만 명의 수감자 자료가 기입되었는데, 아우슈비츠와 기타 수용소로 이송된 후, 또는 독일군이 후퇴 당시에 그 중 34만이 목숨을 잃었다. 수감자들에게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는 수감자들의 수를 확인하는 점호였다. 점호는 때때로 몇 시간 또는 십여 시간씩 계속되었다.
1940년 7월 6일 점호는 19시간이 걸렸다. 징벌을 위한 점호로 쭈그려 앉은 자세로 손들고 몇 시간씩 하기도 했다.

<2층 3호실>
사형집행과 가스실에 버금가는 효과적인 수용자 처형 방법으로 노동을 이용하였다. 작업은 휴식 없이 항상 뛰면서 해야 했다. 너무 빠른 작업 속도와 음식 부족, 그리고 혹심한 고문 등으로 인해 사망률이 굉장히 높았다. 수용소로 돌아올 때 손수레에는 시체가 가득 쌓여 있었고 그 중에 삽으로 구타당한 부상자도 섞여 있었다.
오시비엥침 인근에 있는 합성고무와 가솔린공자에선 3년 동안 3만 명이 죽음을 당했다. 중노동에 사용된 흙 나르는 기구가 전시되어 있다.

<1층 4호실>
수감자들의 하루 식사는 1,300-1,700 칼로리를 넘지 못했다. 아침식사로 “커피??라 불리는 액체 500cc와 점심 식사로는 거의 물뿐인 썩은 야채로 만든 수프 1리터가 전부였다.
저녁식사는 300-350g의 검은 빵과, 쏘시지20g이나 30g의 마가린 혹은 치즈, 그리고 채소음료가 전부였다.
중노동과 배고픔에 시달린 수감자들은 결국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은 개방 후 굶주려 체중이 23-35kg으로 줄어 있는 여성 수감자들의 사진이다.

[ 제 7블록 ]
이곳엔 수감자들의 위생을 알 수 있는 생활상을 보여 주는 곳이다. 40-50명이 잘 수 있는 방에 통상 200명의 수감자가 생활을 했다.
지푸라기 위에서 자던 침상, 나중에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모포를 이용한 생활, 쥐와 벼룩 등이 들 끌어 많은 병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SS에 협력했던 앞잡이(카포)들은 자신의 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선 갖가지 생물학적인 실험을 자행한 증거들은 공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슬라브인들을 말살하기 위해 남녀 단종실험(성기절단실험)을 하였고 쌍둥이와 신체 장애자들을 이용하여 잔인한 실험을 하였다.

[ 제 11 블록 (죽음의 블록) ]
제10블록과 제11블록 사이의 공간은 양쪽에서 높은 벽으로 막혀 있다. 제10블록의 창문에 붙은 나무판은 이 공간에서 자행된 사형집행을 볼 수 없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
이 ‘죽음의 벽’ 앞에서 SS대원들은 수 천명의 수감자들(주로 폴란드인)을 총살 시켰다. 제 11블록은 수용소에서 격리된 형무소였다.

<1층>
입구에서 우측 첫 번째 방은 SS대원이 근무했던 방이다. 그밖에 방에서는 입시재판을 기다리던 수감자들이 감금되었다. 임시재판관은 인근 도시에서 와서 좌측 첫 번째 방에서 2-3시간 동안에 수십에서 수백 명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사형 선고를 받은 수감자들은 총살당하기 전에 복도 중앙에 있는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나체가 되어 ‘죽음의 벽’으로 끌려갔다.

<지하감옥>
이 곳에서는 1941년 9월 사이클론 비를 사용한 최초의 집단 학살이 이루어졌다. 600명은 소련군 포로와, 병원에 입원 중이던 폴라드인 정치범 환자 250명이 살해당했다. 지하에 있는 감방에는 죄인, 수감자를 도왔던 수용소 부근의 일반시민, 탈출하다가 체포된 수감자, 탈주자를 도운 동료, 수용소 규칙을 위반했다고 SS가 간주된 수감자 등이 끌려 왔다.
지하에는 3종류의 감방이 있다. 이곳에선 ‘지하실 청소’라는 죄수선별이 정기적으로 실시되어, 선별된 죄수들은 징벌 반에 보내졌거나 총살당했다. 18호실은 아사형을 선고받은 죄수를 감금하던 곳인데 1941년 이곳에서 막시밀리안 콜베(Maksymilian Kolbe) 신부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아사형으로 죽었다. 콜베 신부가 죽기 직전의 모습을 부조로 만들어서 전시하고 있다.
어두운 20호실 감방에서는 한꺼번에 많은 죄수를 가두어 질식사시킨 일도 있었다. 21호의 벽에서는 죄수들이 남긴 낙서를 볼 수 있다. 22호실은 90cm x 90cm의 좁은 방으로 빛이 완전히 차단된 곳이다. 들어가려면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듯이 해야 되는데, 그런 곳에 4명을 밀어 넣어서 여러 날을 계속해서 세워 놓는 벌을 주었다.

<가스실/소각로>
화장터는 수용소를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 바깥에 있다. 그 입구 앞에는 1947년 4월 16일 수용소장 루돌푸 회스를 사형 집행한 교수대가 있다. 가스실은 초창기엔 시체안치소였었다. 1941-1942년 말까지 소련군 포로와 실레지아 지방의 게토에서 연행되어온 유태인들을 독살했다.
뒤쪽 방에는 시체를 태우기 위한 두 대의 소각로가 남아 있다. 원래 3대의 소각로를 이용하여 하루에 350구의 시체를 태웠다. 가마 자체는 독일 ‘도프 운트 쇠네’(Dorf und Sohne)사가 제작했다.
이 회사는1942년과 1943년에 브졔진카 제2수용소에서도 4간의 화장터 가마를 설치했는데 회사명이 가마 한쪽에 적혀 있다. 이 화장터는 1943년까지 가동했다.
그니디아
폴란드 중북부 그다니스크에 있는 항구도시. 인구 24만 3,100명(1985).
발트해에 접한 이 나라 3대항의 하나로 그다니스크· 소비포트와 함께 ‘3도시??로 불리는 연합도시를 형성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어촌에 지나지 않았으나 자유도시 그다니스크(단치히)에 대항하여 건설됨으로써 급속히 발전,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는 이 나라 해운의 중심지였다. 해운· 조선· 어업이 중심산업이다.
그다니스크 Gdanisk
폴란드 중북부 발트해 그다인스크만(灣)에 있는 항구도시. 인구 46만 7,200명(1985). 독일명은 단치히이다. 이 나라 제일의 무역항으로 상업· 교통의 중심지이다.
인접한 그디니아, 소비포트를 합쳐 연합도시를 형성한다. 14세기 후반부터 한자동맹 도시로 발전, 1919년의 베르사유조약으로 자유도시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에 귀속되었다. 조선공업 외에 식품가공·수산가공업 등이 활발하다.
그다니스크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도시의 약 80%가 파괴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 복구를 하였으며, 현재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주요관광지는 그다니스크 조선소와 베스테르플라테, 두우기 광장, 넵튠분수, 구시가의 성모 마리아 성당 등이 있다.
슈체친 Szczecin
폴란드 북서부 오데르강에 면한 주요 항구도시. 인구 39만 5,000명(1989).
슈체친주(州)의 주도이다. 발트해 연안의 가장 오래된 슬라브족 거주지로 한자동맹의 유력한 도시였다. 스웨덴과 독일의 지배를 거쳐 1945년 폴란드령이 되었다. 석탄의 수출과 철광석의 수입이 이루어지는 대무역항이며 조선· 제지· 야금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포즈나니 Poznan
폴란드 서부 포즈나인주(州)의 주도. 인구 58만 9,700명(1992).
빌코폴스카 지방의 중심에 위치하고 바르타강과 치비나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교통의 요지이며, 비옥한 농업지대의 중심지이다. 1921년부터 매년 주요 국제무역박람회가 열려왔다. 중세에는 한자 동맹에 가맹하였고, 1918년 프로이센령에서 폴란드에 귀속되었으며, 1956년 포즈나인 폭동이 일어났다. 중기계· 화학· 농기구· 식품 공업 및 농산물의 거래가 성하다. 주요 관광지는 중앙광장, 포츠나니 대학, 아카데미 박물관, 구시장 광장, 올드 타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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