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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성지안내



국가명 이탈리아 공화국(Italian Republic)
수도 로마
면적 301,333㎢
인구 5,784만 명(2001년)
주요민족 이탈리아인
(북부에 프랑스계, 오스트리아계, 슬라브계, 남부에 알바니아계, 그리스계 등 소수 거주)
주요언어 이탈리아어, 소수민족어(독일어, 프랑스어 등)
종교 가톨릭(98%)
화폐 유로화(EURO)
기후
온도/월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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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산업 자동차 제조산업, 조선 및 기계산업, 피혁 및 섬유제품, 화학제품, 가구 및 조명제품, 요업
올리브나 오렌지,포도 등의 과일, 천연농산물이 풍부
전압 -
시차 8시간(한국이 8시간 빠르다) : 썸머타임 적용시 7시간 차이
1. 역사
유럽대륙의 남부 지중해에 돌출한 장화모양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섬을 비롯한 많은 섬으로 구성된 공화국이다. 면적은 약 301,333㎢로 남북한 전체의 약 1.5배에 달한다. 북쪽은 알프스를 경계로 유고슬라비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와 접하며 반도 중앙부에는 남북으로 전장 약 1,300㎞나 되는 아페니이노 산맥이 달리고 있다. 국토 전체의 87%가 구릉이나 산악지대로 평야는 대륙부와 반도의 해안지역에 있을 뿐이다. 지중해성 기후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데 겨울에는 온대의 편서풍, 여름에는 아열대의 북동 무역풍의 영향으로 연중 온난하며 강수량은 겨울이 여름보다 많다.

주민은 지중해 인종에 라틴족과 켈트족, 게르만족의 혼혈로 이루어진 이탈리아인이며 낙천적인 기질에 음악을 즐긴다. 로마시대 이래로 그리스와 더불어 서양문명의 원천이었다. 중세기이래 여러 소국으로 분립하여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의 세계 각축장으로 화하였으나 1857~1971년에 근대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1922년이래 무솔리니를 수령으로 하는 파시스트당이 독재했고 1936년 이디오피아를 병합한 이래로 제국이라 칭했다.
나치 독일, 일본과 동맹을 맺고 제2차 대전에 참전하였으나 패배한 후에는 공화제를 수립하였다. 농업과 공업이 주요 산업이나 지하자원이 빈약하고 공업발달의 부진으로 대부분 외국의 원자재 수입에 의존하여 무역적자 폭이 매우 크다. 풍부한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지중해의 관광자원을 바탕으로 관광산업이 크게 발달하여 외국 관광객으로부터 얻어지는 관광수입은 이 나라 국가재정을 충당시켜 주고 있다.
2. 주요 순례지
바티칸 시국
* 바티칸 시국 개요
1861년의 이탈리아 통일이래,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은 대립을 계속해 왔으나 1929년 뭇솔리니 정권은 교황청과 라테란(Lateran)조약을 맺어 화해하였다. 이에 의해 교황청은 로마 시티의 비티칸 궁전을 중심으로 한 면적 0.44㎢를 영유하는 독립국이 되고, 외교상으로는 교황이 원수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바티칸시국은 바티칸 궁전을 중심으로 한 지대와 이탈리아 안에 산재하는 약간의 성당을 그 영토로 하고 있는데, 성(聖) 베드로 성전 앞의 성 베드로 광장은 일반에게 개방되어 이탈리아 경찰의 관할 하에 있다. 바티칸시국은 이탈리아와의 협정 아래 화폐와 우표를 발행하고 있다. 바티칸시국에 있어서는 교황의 절대적 통치권이 확립되어 있으며 이를 돕는 것이 추기경(樞機卿) 회의이다. 재정은 전 세계 신자들로부터의 기부와 라테란 조약에 의해 이탈리아 정부가 몰수한 교회 재산에 대한 보상으로 지불하는 자금으로 주로 운영되고 있는데 그 액수는 매우 큰 것으로 생각된다. 교황은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세계 평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바티칸시국은 세계적인 미술품과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우선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바로크 미술의 진수를 지닌 베르니니의 ‘교황제단 천개', 성모 마리아가 운명하신 그리스도를 무릎에 올려놓고 통곡하는 삐에타 대리석상(미켈란젤로 작)이 있다.
회화관에는 주로 종교화를 시대 순으로 진열했는데 안젤리코의 ‘성 모자’나 라파엘의 '포리뇨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헤로니무스 평화' 등이 있다. 이 밖에 도서관에는 보통서적 50만, 수사본 6만, 고판본 7천권과 세계에서 제일 많은 사본, 필본을 소장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진열실에는 성서나 복음서의 수사본, 토마스 아퀴나스/미켈란젤로/루터/에라스무스의 서한이 있다.

시스틴 성당에 그려진 벽화는 너무나 뛰어나다.
보티첼리를 비롯한 유명한 몇몇 화가가 양쪽 상단 벽에 모세와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그림도 모두가 무한한 감명을 주지만 특히 미켈란젤로의 천정화와 제단화는 더욱 솜씨가 놀랍다. 너무나도 유명한 천지창조, 실락원, 최후심판, 내부의 샹들리에 석등 등 예술의 신비가 가득하다.

1506~1626년 베드로 무덤을 중심으로 미켈란젤로가 설계하고 베르니니가 건축을 완공한 베드로 성전은 조상이 남긴 많은 유적을 보관하고 있다.
성서에 없는 그리스도에 관한 전설에 따르면 서기 67년 어느 날 젊은 시절 갈릴레아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했던 어떤 늙은이가 끌려왔다. 그는 너무나 그리스도교를 열심히 전교하여 로마 관헌에게 잡혔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선고를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으로 처형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 거꾸로 매달아 죽게 해 달라해서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다고 한다.
이 순교자는 바로 그리스도의 12제자중의 한 사람인 시몬 베드로로 성 바오로와 함께 로마에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네로의 옥외극장 바로 바깥에는 불에 타죽고 학살된 기독교 신자의 시체를 묻은 묘지가 있는데 베드로의 시체도 거기 던져 졌었다. 그러나 베드로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그가 죽음으로써 많은 신자가 생겼고 250년 뒤(313년)에는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개종하여 가톨릭 신자가 되어 곧 베드로 무덤 위에 교회를 세웠다. 이 콘스탄티누스의 교회는 성 베드로 성전이라고 불리며 1100년 동안 있었다. 이 성전은 역대 교황이 다스렸고 또 온 유럽의 왕이나 황제가 성 베드로 무덤 앞에서 대관식을 올리게 되었다. 1450년 무렵부터 이 건물은 노후하기 시작했다. 율리우스 2세 교황은 이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그 전의 2배나 되는 새 성당을 세운 것이 바티칸 궁전 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전이다. 이 건물은 르네상스의 대표적 건물로서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이 건축의 중심이 되는 지름 42m의 중앙 돔은 미켈란젤로의 설계로 이루어졌고 그가 70살을 넘은 뒤 손을 댄 것이다. 이 돔은 108m의 높이에 그 위에 24m의 탑이 서 있으며 그 끝에 십자가가 있다. 이 돔의 맨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고 성 베드로 대성전 내부의 제단(월계수 잎사귀 모양의 나선형) 기둥은 판데온에서 가져온 것이다.

* 성 베드로 광장
성 베드로 광장을 찾는 순례자나 여행자들은 누구나 대성당 앞의 광활한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돌기둥에 안기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베르니니의 걸작이다.
광장은 240m²의 타원형으로, 멀리서 보면 넓은 사다리꼴의 공간이 돌기둥과 궁전의 지붕 사이에 뻗쳐 있고 마데르노가 조각한 전면이 우뚝 솟아 보인다.
궁전의 옆부분은 반원형으로 도리아식의 주랑(柱廊)이 네 개씩 줄을 지어 있다. 이 거대한 건물에는 모두 284개의 기둥과 88개의 첨탑(尖塔)이 있고 140개의 성인상이 조각돼 있다.
기둥 높이는 186m로 가로 148m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이 역사적 업적은 알렉산델 7세의 명령으로 베르니니가 1656년부터 시작하여 1667년에 완성했다. 이곳은 전 세계 백성을 인자하게 두 팔로 안고 있는 전 인류의 어머니인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광장 한 복판에는 25.88m의 이집트식 첨탑이 네 마리의 청동제 사자의 호위를 받으면서 있다. 이 첨탑은 성 베드로가 순교했던 네로 황제의 원형 경기장에 장식되었던 것으로 맨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시스또 5세의 명으로 이 첨탑은 1586년 도메니꼬 폰타나가 세운 것으로 첨탑 양쪽에는 14m 높이의 분수대가 두 개 있다. 오른쪽은 1613년 마데르노가 설계했고 왼쪽 것은 1670년 카를로 폰타나가 만든 것이다. 두 개의 분수와 첨탑 사이에는 광장의 중심부를 나타내는 둥그런 바위가 두 개 놓여 있다. 이곳에서 돌기둥을 쳐다보면 마치 거대한 하나의 울타리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돌기둥으로 된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대강당은 1971년 5월 30일 바오로 6세의 명령으로 조각가 삐에르 루이지 네르비가 지은 것이다. 이곳에는 7천 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과 12만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홀이 마련되어 있다. 정문 현관은 산 우피치초 광장에 있다.
베드로 대성당과 미켈란젤로의 불후의 명화가 있는 시스틴 성당의 사도궁 가운데서 바라보면 성 베드로 광장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 옆의 바티칸 박물관을 따라가면 대성당으로 갈 수 있다.

* 사도궁전
사도 궁전은 베르니니의 돌기둥 울타리 오른쪽에 우뚝 솟아 있다. 이 거대한 건물은 13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7세기에 걸쳐 완성된 것이다. 처음 니콜로 3세 때에 중앙부를 짓고 그 후 다시 시스또 5세의 감독 아래 도메니꼬와 카롤로 폰타나가 다시 손질을 했다. 사도 궁의 정문은 청동의 문이라고 불린다. 정문 건너편에는 로얄 계단이 있다.
사도 궁의 뜰로 잠깐 고개를 돌리면 라파엘 기념관이 세 개 있다. 두 번째 기념관은 라파엘 자신이 그림을 그려 장식한 곳으로 자세한 설명은 뒷장에서 하기로 한다. 맨 윗층에는 교황의 개인 집무실이 있다. 일요일 오후의 축일이면 교황 성하는 성 베드로 광장이 보이는 오른쪽에서 두 번째 창문으로 나와 운집한 군중들에게 연설을 하고 축복을 한다.
2층에는 교황의 알현실과 교황도서관이 있다. 수요일에 교황은 순례자들을 접견한다. 단, 여름철은 카스텔간돌포의 여름 별장에서 접견을 하며 그밖에는 늘 이곳 대강당에서 순례자들을 접견한다. 여름철 몇 달 동안 교황 성하는 휴식과 건강을 위해 여름 별장에서 집무를 한다. 이때의 순례자 접견은 일요일에 별장 발코니에서 하게 되며 교황의 연설은 스피커를 통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도 들을 수 있다.

* 성 베드로 대성전
3백년에 걸친 그리스도교 박해의 시대가 끝나고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그리스도교가 공인(公認)되자, 황제는 이곳 네크로폴리스(공동묘지)를 깔아뭉개고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지었다. 이것이 성 베드로 성전의 시초이다. 그런 후 16세기 초 교황 율리우스 2세 때, 남은 성당을 헐어내고 대성당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건축 미술가 브라만떼가 시작한 이 성당은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등 당대 일류 예술가들을 거치면서 착공 120년만인 1626년에 완성됐다. 울바노 8세 교황께서 이 성당을 봉헌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돌은 성당 초석에서부터 132m나 되는 웅대한 것으로 미켈란젤로의 걸작품이다. 성당 안 왼쪽 문으로 들어가 표를 끊은 뒤 엘리베이터로 돔 입구까지 올라갈 수 있고, 거기서 돌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베드로 광장은 물론, 로마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현재의 성 베드로 대성전은 1,510m2의 면적과 내부 길이 186m, 안뜰과 벽의 두께까지 합하면 211m이다. 돔의 직경은 42m, 성당 안의 제대는 44개, 성상이 395점, 이 가운데 대리석이 104개, 석회석이 161개, 청동이 40개, 석고가 90개이다. [ 성당의 주요 예술품 ]
1607년에서 1614년에 걸쳐 카를로 마데르노가 완성한 광대한 정문을 나서면 커다란 삼각형 계단에 이른다. 계단 아래 양쪽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상이 있다. 베드로상은 쥬셉페 파브리스가 조각했고 바오로 상은 아다모타돌리니가 만들어 1840년에 봉헌한 것이다.
거대한 코린트식 기둥이 늘어서 있는 정면을 돌아서면 가운데 교황이 축복을 내리는 강복실이 있다. 바로 그 옆에는 신임 교황의 선거대가 있다. 추기경들의 비밀회의에서 선출된 교황을 앞에 두고, 최고 선임 추기경이 이 선서대 앞에서 “나는 새 교황에게 진심으로 축복을 드립니다…”라고 시작되는 축복을 하게 된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모두 5개이다. 오른쪽 맨 끝에 있는 <거룩한 문>은 성년의 시작과 마지막 날 교황만이 출입하는 전용문이다. 1300년에 시작되어 처음에는 백년마다, 그 다음에는 50년마다 했고 지금은 25년마다 선포하는 성년은 가톨릭 교회의 가장 큰 신앙 행사인 것이다. 1983년은 특별성년으로 선포되었다.

성당 안에 들어가면 누구나 장엄한 내부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고해실 오른 편에는 성 베드로가 축복을 하고 있는 동상이 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그의 오른발에 입 맞추며 경의를 표한다. 이 동상은 13세기의 조각가 아르놀포 디캄비오의 작품이다. 동상 너머에는 거대한 돌기둥으로 세워진 아치가 있다.
중앙에는 베르니니가 조각한 청동으로 된 유명한 교황 제대가 있다. 이 제대는 1624년에 즉위한 우르바노 8세가 사도 성 베드로와 바오로 축일을 맞아 1633년에 완성한 것이다. 제대는 마데르노가 만든 것으로 그 위치가 바로 옛 베드로의 무덤 위이기 때문에 <고백의 제대>라고 불린다. 갈릴레아의 어부 성 베드로의 무덤 둘레에는 95개의 램프가 영원한 불꽃을 내며 비치고 있다. 무덤 앞에는 카노바가 조각한 비오 6세의 기도하는 동상이 서 있다.
오른편에 있는 제 1성당에는 미켈란젤로의 불후의 걸작인 <성모의 통곡>(La Pieta) 조각이 있다. 미켈란젤로는 불과 25세의 젊은 나이였던 1500년에 이 같은 걸작을 남겼다. 십자가에서 운명한 그리스도의 시체를 무릎에 안고 슬퍼하는 성모의 가슴 쪽에 미켈란젤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72년 5월 어느 몰지각한 사람이 이 동상을 손상시켰으나 그 해에 복원되었다.
제2성당은 타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성당 안에는 13세기에 카발리니가 봉헌한 십자가가 있다. 건너편에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 기념관이 있고 그 다음에는 프란치스코 메씨나가 만든 비오 12세의 동상이 있는 큰 성당이 나온다. 이 동상은 바오로 6세가 제막식을 한 것이다. 성당 맞은 편에는 프란치스코 나니가 만든 비오 11세의 동상이 있다.
오른쪽에는 보로미니가 설계한 쇠창살로 둘러싸인 <축복의 성사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의 유명한 감실은 금빛나는 구리로 만들어져 있고 양쪽에는 두 천사가 무릎을 꿇고 호위하고 있다. 이 감실은 1674년 베르니니가 만든 것으로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가 보존되어 있어서 미사에 참례한 사람들이 영성체를 할 수 있다.
맨 끝 기둥에는 도메니카노가 만든 <성체를 모시는 성 제롤라오>상이 있다. 이 동상은 원래 바티칸 화랑에 그림으로 보존돼 있던 것이었다. 마지막 기둥 끝에는 그레고리안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1585년에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고레고리오 13세 때 지은 것이다. 그 옆에는 이와 비슷한 클레멘티나 성당이 있다. 역시 포르타가 지은 성당이다.
입구를 향해 왼쪽 기둥을 따라 나가면 카를로 마데르노가 설계한 성가대석이 있고 그 맞은편에는 마데르노가 설계하고 플로레스타노디 화우스토가 건축을 한 성 비오 10세의 기념관이 있다. 비오 10세는 1914년부터 1918년 전쟁기간 동안 평화를 위해 진력한 분이었다. 그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이 기념관에는 수정으로 된 관에 그의 유해를 모시고 있다. 기념관 반대편에는 안또니오 폴라이올로가 만든 이 성당의 가장 오래된 인노첸쪼 8세의 동상이 있다.
성 비오 10세 옆에는 <영적의 성당>이 있고 그 옆에는 요한 23세의 상과 베네딕도 15세 상이 있다.
입구를 향해 계속해 가면 성세대(聖洗台)가 나온다. 이것은 붉은 색깔의 옛날 돌로 만들어져 있다. 성세대가 있는 성당은 카롤로 폰타나가 설계한 것으로 여기에는 훌륭한 모자이크 작품들이 많이 있다. 중앙부의 기둥을 따라가면 이제 양쪽 측랑(側廊)으로 이르게 된다. 오른쪽은 성 프로체소와 마르티니아노의 순교를 기념하는 제대가 있다.
그레고리안 성당 옆에 넓게 자리잡은 이곳에서는 1870년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다.
오른쪽으로 성 미카엘 성당에 이르면 카노바의 걸작인 클레멜테 13세 기념상이 있다. 미카엘 상은 귀도레니의 그림에 있는 것을 본따 모자이크로 만든 것이다.
대성당의 맨 끝에는 베로니니가 알렉산드로 7세 때 만든 바로코풍의 의자가 있다. 이것은 13세기 성 베드로가 복음을 전파할 때 사용했다는 나무 의자를 본딴 것이다. 전문가들의 오랜 연구 끝에 바오로 6세는 이 성 베드로의 의자를 종교사의 가장 값진 유물로 결정했다. 이 의자는 875년경 카를로 황제가 왕관과 더불어 교황에게 바친 것이다. 왕관 앞 부분에는 허쿨레스의 힘찬 모습이 상아로 새겨져 있다.
또한 청동제 의자를 떠 받치고 있는 성 암브로시오와 성 아우구스티노와 그리스 정교회의 성 아타나시오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윗 부분에는 찬란한 빛을 발하는 천사와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새겨져 있다. 후세 바로코 예술의 정수로 꼽히는 이 의자는 지고(至高)한 교황의 가르침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르침이 없다는 것과 이같은 가르침이 의자를 떠받들고 있는 교부(敎父)들의 심오한 연구로 보필을 받고 있음을 상징한다. 왼쪽에는 「인자한 모후의 성당」이 있다. 이곳 제대는 성 요셉을 기념하는 것이다. 천장 장식은 반비델리와 달마이나가 한 것이다.

[ 지하무덤 ]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에 베드로 성인 유해를 비롯해서 역대 교황들의 무덤이 제대와 함께 꾸며져 있다. 근년에 선종하신 요한 바오로 1세 교황과 바오로 6세, 요한 23세의 무덤제대는 인상적이다. 초기 교회 박해시대 교황들의 유해는 이곳에 없는 경우가 많다.


* 시스틴성당
성모 승천을 기념하는 시스틴 성당은 시스또 4세의 명으로 1475년부터 1482년에 걸쳐 지오반니노 데이 돌치가 설계를 하고 바치요 폰델리가 건축을 한 것으로 교황의 이름을 따서 시스틴 성당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성당은 교황이 비공식적인 의식을 행하는 곳이며 또 교황의 비밀 선거가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성가대와 양쪽으로 나눠진 대리석 후면은 15세기의 미노 다 휘에 솔레가 완성한 걸작이다.

양쪽 벽에 여섯 개씩 있는 12개의 그림은 모세와 그리스도의 일생을 나타낸 것으로 모세의 일생에 대한 그림은 에집트로 가는 모세(페루지노), 모세의 선택(산드로 보띠첼리), 홍해를 가르는 모세(코시모 로첼리), 코레의 아들을 벌하는 장면(보띠첼리)과 십계 그리고 모세의 죽음(구라 식뇨렐리)이 있다. 예수의 일생에 관한 것은 예수의 세례(페루지노), 예수시험을 받으심과 나병환자를 낫게 하심(산드로 보띠첼리), 첫째 사도를 부르심(도메니코 기로란다이오), 산상설교(로쎌리와 삐에로디코시모), 천국 열쇠를 주시는 예수(페루지노), 최후만찬(코시모 로쎌리)이 있다.

원형의 천정은 미켈란젤로가 1508년부터 1512년에 걸쳐 율리오 2세의 명을 받아 창세기를 프레스코로 나타낸 것이다. 제대에서부터 프레스코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창조하는 하느님과 하늘과 해, 달, 식품, 바다와 육지, 특히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는 모습과 선악과를 먹는 모습 그리고 낙원에서 내쫓기는 아담과 하와의 그림은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다. 노아의 방주와 홍수 그리고 끝으로 아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술을 마시는 노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장의 이 그림들은 네 귀퉁이마다 나체가 된 네 사람이 프레스코에 나타낸 사실을 하나 하나 설명이나 하듯 그림을 가리키고 있다. 한참 그림을 따라가면 예언자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예루살렘의 장래를 알고 슬피우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천장 한 구석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야만의 형벌과 구리뱀, 올로훼르바의 목을 자르는 주디따, 골리앗의 죽음이 그려져 있다. 제대 뒤에 있는 최후의 심판은 1535년부터 미켈란젤로가 30년에 걸쳐 천장 프레스코를 다 마친 다음에 바오로 3세의 명을 받아 만든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비평가들은 미켈란젤로가 천장을 만들 때만 해도 어느 정도 지구상의 인류의 불행을 나타내려는 예술적인 사명감을 갖고 있었지만 후에 가서는 예술보다는 깊은 신앙심이 더 앞섰다고 말하고 있다. 이 그림은 가톨릭 교리를 완벽하게 나타내 주고 있지만 쉽사리 설명을 하기는 아주 어려운 내용이 담겨 있다.

맨 뒤에는 비통한 얼굴의 죄인을 심판하고 반대로 착한 이에게 상을 주시는 예수의 모습이 있다. 이 작품은 390명 이상의 인물이 나타나 있는 2백m2가 넘는 거대한 그림이다.
이 작품의 중요한 등장 인물들을 보면 성모 마리아, 세례자 요한, 십자가의 성 안드레아, 교회를 다스리는 열쇠를 가진 성 베드로, 그 옆에는 성 바오로가 있다.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는 그물을 가진 성 로렌조와 성 바르톨로메오가 살갗이 모두 벗겨진 채 그 옆에 있다.

중앙에서 왼쪽에는 여인들이 서 있고 오른쪽 남자들 모습 속에는 치레네오의 시몬과 도둑이었다가 회개한 디스마가 구세주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있고 그밖에 수레에 탄 성녀 카타리나와 활을 쏘고 있는 세바스티아노가 있다. 왼쪽 아래에는 구름 위의 천당에 승천한 착한 사람들이 천사의 나팔소리를 듣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저주받은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참혹한 광경이 나타나 있다. 지옥의 무서운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충격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왼쪽 맨 아래에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는 모습이 있다. 그 가운데 동굴에는 마귀들로 가득 차 있으며 바로 오른쪽에는 지옥문이 보이고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삼도의 나룻배가 맨 아래에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여기에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긴 나귀 귀도 두 개 그려 넣었다. 시스틴 성당의 최후의 심판은 르네상스 예술의 극치이며 바오로 3세가 트렌토 공의회에서 규정한 것 같이 이것은 종교개혁에 대처하는 최대의 작업이기도 했다.

* 성 요한 라테라노 성당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이 성당은 콘스탄티노 황제가 희사한 땅으로 밀찌아레 교황(311~314)이 세운 것이라 한다. 성당을 짓게 한 결정적인 계기는 콘스탄티노 황제의 둘째 부인이며 마쎈지오의 누이동생인 파우스타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마쎈지오의 막강한 힘으로 세워진 이 성당은 중앙부가 이중의 기둥으로 만들어져 구세주 그리스도, 세례자 요한, 선각자이며 제 4복음서를 쓴 사도 요한에게 봉헌되었다.

콘스탄티노 대성당은 455년 반달족의 침입으로 빼앗겼다가 후에 성 레오네 교황 때 다시 되찾았다. 그러나 896년에 지진으로 파괴됐다가 905년에 세르지오 3세 때 재건되었다. 그후 니콜로 4세 때에 와서 많은 단장과 장식을 했으나 1308년과 1361년 사이에 두 차례 걸쳐 화재로 소실됐다가 우르바노 5세와 그레고리오 11세 때 각각 재건된 수난의 건물이기도 하다. 정면은 클레멘테 12세 때 복구된 것으로 로마예술의 극치라고 불리울 만큼 훌륭한 모습을 하고 있다. 레오네 13세 때 동쪽 끝 반원형 부분을 복구하기 시작해서 1885년에 완결을 했다. 이곳에서는 신, 구교 일치를 위한 라테라노 공의회가 1123, 1139, 1179, 1215년과 1512년 등 다섯 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다.

정면은 알렉산드로 갈릴레이의 작품으로 커다란 돌기둥에 의해 아치형으로 구분돼 있다. 지붕 위에는 14명의 사도와 성인들이 십자가를 들고 계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는 조각이 있다. 내부는 중앙부와 이중의 기둥으로 돼있고 천장에는 팔을 넓게 편 교황의 조각이 있다.
중앙부 12개의 정교한 돌기둥과 성상은 보로미니의 설계로 된 것이고 그 윗 부분의 신약, 구약의 장면을 묘사한 조각은 1659년 알렉산드로 알가르디의 설계로 만들어진 것이다.
양쪽 측면부는 클레멘테 8세 때 완전히 개조한 것으로 이것은 쟈코모 넬라 포르타와 카발리에레 다르피노의 작품이다.
이곳에는 1851년에 복구된 교황의 권좌가 있으며 위에는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이 사용했던 낡은 나무 제대가 보존돼 있다. 제대 아래는 시모네 기니가 만든 마르티노 5세의 무덤이 있다.

성체실과 끝 부분은 1288년과 1294년 자코포 토리티와 자코포 다 카메리노가 조각한 것으로 윗 부분에는 구름 위에서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중앙에는 4복음을 상징하는 강가에서 갈증난 양과 사슴에게 물을 주는 모습이 있다. 그밖에도 프레스코는 지오토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고 1300년에 성년을 선언한 보니파치오 8세 상과 마르티네쯔 추기경 기념관과 오른쪽에 있는 카사티 추기경의 무덤은 이사이아다 피사의 걸작품들이다. 조각들 가운데서 코르시니 성당은 갈릴레이의 작품이며 이 부속성당에는 안또니오 몬따우티의 삐에타(성모의 통곡) 상이 있다.

성당 앞에 있는 성 죠반니 광장에는 440년 시스또 3세가 새로 짓고 1637년에 우르바노 8세가 지금의 모양으로 다시 지은 성세소가 있다.
광장 중앙에는 이집트의 화강암으로 된 첨탑이 솟아있다. 이 화강암은 기원전 15세기의 콘스탄티노 2세가 이집트의 테베에서 배로 실어온 것이다. 이 첨탑은 로마에서 가장 높고 오래된 것으로 높이가 기초를 포함해서 47m나 된다. 원래 이것은 막시모 원형 경기장에 방치돼 있던 것을 시스또 5세가 이리로 옮겨와 1588년에 복원해서 라테라노 성당 앞에다 세운 것이다.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 오른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빌라도의 명령을 받고 돌아가시던 날 몇 번씩이나 모욕과 고통을 받으며 오르내리셨다는 전설이 담긴 스칼라 산타라는 28층계로 된 계단이 있다. 많은 신자들은 여기에서 무릎을 꿇고 깊은 존경을 바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계단은 콘스탄티노 황제의 어머니였던 성녀 헬레나가 로마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 성 마리아 대성당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메톨리나로 가면 로마 시에서 둘째로 큰 성 마리아 대성당에 이르게 된다. 이 성당은 또한 리베리오 교황을 기념하는 곳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이 교황은 8월 5일 여름밤에 쏟아진 기적의 눈의 근원지인 이곳을 찾아 성당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건물은 15세기에 와서 시스또 3세가 전부 다시 건축을 했다. 이곳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전 인류의 어머니로 선언한 에페소 공의회가 개최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는 이 궁전을 구세주의 어머니에게 봉헌한 것이다. 그레고리오 11세 때 지은 종탑은 로마에서 가장 높은 종탑 가운데 하나이다. 시스또 5세가 다시 두 개의 부속 성당을 지어서 지금은 시스틴 성당과 바오로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정면은 베네딕도 교황 때 후가가 설계와 건축을 한 것으로 현관 윗부분은 필립보 루스티의 뛰어난 13세기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발코니 윗부분에는 축복을 내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많은 사도들과 성인,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조각돼 있고 아랫부분에는 리베리오 교황과 이 성당 건축에 얽힌 이야기를 나타내는 조각이 있다.

성당 내부는 길이가 86m로 중앙부와 기둥으로 조화롭게 나누어진 양쪽이 대표적인 초기교회 양식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기둥은 모두 하나씩으로 만들어져 있다. 천장은 줄리아노 다 산갈로 다섯줄로 나누어 105개의 우물 반자로 꾸며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천장은 신세계에서 가져온 첫 금을 녹여 도금한 것이라고 한다.

성당 입구 왼편에는 도메니꼬 폰타나와 레오나르도 다사르찌나가 조각한 니콜로 4세 기념비가 있다. 그 옆에는 클레멘테 11세의 기념비가 있다. 시스틴 성당은 도메니꼬 폰타나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제대 근처에는 베들레헴을 나타내는 구유가 있다. 시스틴 부속 성당의 벽에는 역시 폰타나가 설계한 성 비오 5세와 시스또 5세의 기념비가 있다. 바오로 성당(혹은 보르게세)은 홀라미오 폰찌오가 건축을 했고 이 성당 안에는 클레멘테 8세와 바오로 5세의 무덤이 있다. 여기 조각은 귀도 레니와 그 밖의 여러 화가가 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성모께 경배 드리는 로마인」이다. 이 오래된 성상은 6세기의 작품으로 믿어지며 로마인들의 간절한 기원과 봉헌을 나타내는 작품이다. 오른쪽 돌기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지안로렌쪼 베르니니의 무덤이다. 이것은 대성당의 참사 회원이었던 그의 아들 로렌쪼가 만든 것이다.

벽에는 로마제국 말기 기독교 신앙을 신비하게 나타낸 27점의 모자이크가 있다. 왼쪽 벽에 12점, 오른쪽에 15점이 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오른쪽에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왼쪽 벽에 있다. 중앙부 전면에는 성모께 잉태를 알리는 것과 예수 아기 공현, 예수가 성전에 나타나신 것과 이집트로 피난 가는 모자이크가 있다. 맨 끝의 둥그런 지붕에는 성모 마리아가 승천해서 예수께 면류관을 받는 자코포 토리거의 모자이크가 있고 이 왕관 둘레에는 18명의 천사가 있다. 이 작품은 니콜로 4세의 명령으로 완성된 것이다. 둥근 지붕에는 또한 4개의 양각으로 된 성모 승천과 예수 공현, 말구유와 기적의 눈이 내린 모습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 성세대는 1825년에 홀라미니오 폰찌오가 만든 것이다. 물로 씻기는 돌 받침 옆에는 삐에뜨로 베르니니가 만든 성모 승천 조각이 있다.

대성당 앞 광장에는 마쎈찌오가 세운 궁전의 여덟 개 대리석 기둥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커다란 대리석 기둥이 하나 서 있다. 이것은 1614년 마데르노가 여기에 갖다 놓은 것으로, 맨 위에 굴리엘모 베르트가 만든 성모와 예수의 조각이 있다. 기둥 아래에는 연못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만민들이 공경의 근원이신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애타게 바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 성 바오로 대성당
성 바오로 대성당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어 둘째로 큰 성당이다. 이 성당의 연원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오랫동안 그리스도를 박해하다가 마침내 전향해서 사도가 되어 67년에 목숨까지 바친 바오로의 무덤 위에 교회를 세운 데서 비롯된다.

386년에 티노 발렌티아노 22세 때 확장 공사를 했고 그 후 테오도시오 1세 황제 때 궁전은 커다란 중앙부와 80개의 기둥으로 나눠진 다섯 개의 측량을 가진 건물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이곳이 세계 제일의 큰 성당으로 군림했었다. 그러나 1823년 이 성당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그 후 레오네 12세와 비오 11세 때 재건되어 1854년에 새 성당으로 세워져 봉헌되었다. 화재는 비오 7세가 운명하기 며칠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교황에게는 이 비보를 알리지 조차 못했다. 성 베드로와 함께 로마 가톨릭 교회를 세운 사도 성 바오로의 몸과 정신은 이 성당의 높은 제대 아래 잠들고 있다. 그의 묘석에는 「순교자 사도 바오로」라는 짧은 글씨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이것은 1834년에 성당을 다시 지을 때 발견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이 비문이 4세기 때 것이라고 고증을 했다.

현관은 폴레띠가 설계를 하고 베스피냐니와 칼데리니가 건축을 한 것이다. 정문 앞에는 카노니카가 조각한 성 바오로 상이 서 있다. 정면은 콘소니와 아그리코라가 설계한 대로 만든 모자이크가 있다.
모자이크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다니엘의 네 선지자를 나타내고 있다. 맨 위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나란히 거느리고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다. 현대식으로 무늬를 넣은 청동문은 안또니오 마리아의 작품이다. 여기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말씀을 새긴 10개의 나무판이 있다. 오른쪽에는 바오로 6세의 명령으로 콘스탄티노폴리에다 그레고리오 7세가 만들었던 것을 청동제로 복원한 커다란 문이 있다. 많은 예언자와 예수의 일생, 그리스도의 말씀을 새긴 545개의 나무판은 비잔티움 예술의 최고로 알려져 있다. 또한 문은 중세기의 빼어난 걸작의 하나이다.

이 대성당을 관리하는 베네딕도 수도원 이층에는 고대 콘스탄티노 대성당에서 찾아낸 비석과 글씨들, 그리고 42명의 교황을 원형 프레스코로 만든 것이 있다. 성 베드로에서부터 42명에 이르는 교황 프레스코는 대성당이 불타기 전에는 내부에 장식돼 있던 것이었다.

* 아삐아 가도
기원전 3세기에 이룩된 이 길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한 말을 낳게 한 길이다. 성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이 길로 도주했다가 그리스도의 빛을 보고 되돌아와서 순교했다는 길이기도 하다. "쿼바디스(Quo Vadis)" 성당이 이 부근에 있다.

* 카타콤바
카타콤바(Catacomba)라는 것은 고대 지하 묘소를 가리키는 말로 특히 로마에서 그리스도인과 히브리인 집단이 한때 사용하던 묘소이다(*지하묘소가 무덤 하나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복수명사를 써서 라틴어로는 Catacombae, 지금 이탈리아어로는 Catacombe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인 카타콤바는 숫자가 아주 많은데 서기 2세기에 개발하기 시작하였고 묘소 굴착은 5세기초엽까지도 계속되었다.
시초에는 카타콤바는 매장(埋葬)을 위한 장소로 그쳤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 모여서 장례 의식을 거행하였고 순교자들과 고인들의 기일(忌日)을 기념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박해 중에는 예외로, 임시 피난처로 삼아 성찬(聖餐)을 거행하는 곳으로도 쓰였다. 카타콤바가 그리스도인들의 비밀 은신처로 사용된 적은 결코 없었으며, 이런 식의 이야기는 순전히 전설이거나 소설과 영화에서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 무렵 로마에는 지상 묘소들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지하 묘소를 선호하였다. 우선 그리스도인들은 화장(火葬)을 하는 이교 습속을 거부하였다. 그리스도가 무덤에 매장된 선례에 따라 그들은 땅에 묻히기를 더 좋아하였으니 죽은 이들이 어느 날엔가 부활하기로 운명지워져 있었으므로 부활할 인간 신체를 존중하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땅에 묻히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사실 공간 문제를 유발하였는데 이 문제가 카타콤바의 발전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지상 묘소들만 사용하기로 하였더라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남이 묻혔던 묘지를 재사용하는 일은 대개 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할당된 묘지는 머지 않아서 동이 났을 것이다. 카타콤바는 바로 이 문제를 해소시켜 주었다. 그것도 경제적이고 실용적이고 확실한 해결책이었다. 더군다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대개가 가난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이런 매장 형식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지하묘지를 선호하게 된 다른 동기도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공동체 의식이 매우 강렬하였으므로 "죽음의 안식"에서도 함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장소는 따로 떨어져 있었으므로 특히나 박해를 받던 시기에는 그들만 따로 모이는 집회장이 될 수 있었고 그리스도교 상징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로마법으로는 죽은 사람을 로마 성안에 매장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카타콤바들은 모조리 로마에서 뻗어나가는 가도(街道), 집정관 이름이 붙은 가도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당시로 말하자면 성벽을 나가자마자 교외에 카타콤바가 위치한 셈이다. [ 성 칼리스토 카타콤바 (Catacombe di San Callisto) ]
성 칼리스토 카타콤바(Catacombe di San Callisto)는 로마의 가장 크고 비중있는 카타콤바 중의 하나이다. 서기 2세기 중엽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15헥타르, 그러니까 카타콤바가 지하에 소재하는 묘역(墓域)만도 4만 5천평에 달한다. 지하에 파놓은 무수한 갱도들이 그물처럼 얽혀져 있는데 이것들을 합하면 대략 20킬로미터가 넘는다. 갱도들은 여러 층으로 파여 있어 깊숙하게 들어간 곳은 지하 20미터가 넘을 정도이다. 성칼리스토 카타콤바에는 순교자가 10여명 묻혔고 교황이 16명이 묻혔으며 거기 묻힌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다. 이 카타콤바는 부제 성 칼리스토에게서 이름을 땄는데 그는 서기 3세기초의 인물로, 교황 제피리노에게서 이 묘지를 관리하라는 임무를 받았으며 그 일로 인해서 성 칼리스토 카타콤바는 로마 교회의 공식 묘지가 되었다.
지상에는 제단 뒤편의 후진(後陣 absis)이 셋으로 구성된(이런 건축양식을 트리코라[tricora]라고 부른다) 성당 둘이 흔적을 보이고 있다. 그 중에 동쪽에 있는 성당에는 성 제피리노 교황과 성체 때문에 순교한 젊은 순교자 성 타르치시오가 묻혔던 것으로 추정된다.
카타콤바의 지하 묘소 역시 여러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루치나 경당, 교황들의 구역, 성체칠리아 구역은 가장 오래되었고(서기 2세기) 핵심적인 곳이다. 다른 구역들에도 명칭이 붙어 있는데 성 밀티아데스 구역(서기 3세기 중엽), 성 가이오와 성 에우세비오 구역(3세기말), 서부 구역(4세기 전반기), 리베리오 구역(4세기 후반기: 중요한 경당들이 많이 모여 있는 구역이기도 하다) 등이다.

[ 교황들의 무덤 ]
카타콤바 안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장소가 바로 3세기에 만들어진 교황들의 무덤이다. 이곳에는 모두 아홉 분의 성인 교황들이 안치되어 있는데, 그 중 세 순교자 교황은 다음과 같다.

1. 성 폰시아노(230-235)
세베루스 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막시미누스(235-238)는 다시 그리스도인에게 대대적인 박해를 명하였다. 당시 많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속속 잡혀가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평생 중노동을 하거나 경기장에 던져져 맹수의 밥이 되도록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교황 폰시아누스는 자신의 양떼들을 보살피다가 체포되어 종신 중노동형에 처해졌고, 사르데냐의 탄광으로 추방되었다. 광산의 중 노동자로서 힘든 일을 하던 교황은 탄광 안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시신을 몇 년 후 광산 주변에서 찾아내어 이곳에 안치하였다.
2. 성 파비아노(236-250)
교황은 14년간 재위하면서, 막시미노의 대 박해시기 때 순교했던 교황 성 폰시아노의 시신을 찾아내어 카타콤바로 옮기는 등, 그 당시 순교자들을 위해 특별한 일을 많이 하였다. 막시미노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박해는 데치우스(249-251)가 황제로 오르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부르며, 옛날 자신의 선대들이 하던 식대로 신전 안에 석상을 만들어 놓고,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 앞에 무릎 꿇고 축복의 주문을 읊도록 명령하였다. 교황 파비아노도 끌려가서 주문을 읊는 것뿐 아니라 배교 하도록 강요받았는데, 이를 거부하자 즉시 신전 밖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그때가 250년 1월 20일이었다.
3. 성 식스토 2세(257-258)
로마 황제 발레리아노(253-260)때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의 공적인 교회 묘지였던 카타콤바에 대해 출입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리스 태생의 교황 식스토 2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안에서 교회 전례 모임을 갖다가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었고, 그 역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258년 8월 6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 성 체칠리아 무덤 ]
체칠리아 성녀는 2세기 때, 로마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남편 발레리아노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으며, 초기 공동체를 위하여 많은 헌신을 하던 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황제 때 일어난 박해 때 두 사람 다 순교하였다. 성녀는 죽기 전에 자기 가문의 소유지를 공동체에 기증하였고, 그녀 자신도 순교 후 이곳에 묻혔다. 821년 교황 파스칼리스 1세(817-824)가 그의 시신을 로마 시내의 테베레 강 옆에 있던 성녀의 생가(이곳은 5세기 때 이미 성당이 되었음)로 이전할 때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성녀가 어떻게 순교하였는지 잘 보여 주고 있는 이곳의 석상은, 17세기 초 카를로 마데르노라는 유명한 대리석 조각가가 1599년 성녀 체칠리아의 기념 성당에서 성녀의 유해 보수 작업을 위해 처음으로 관을 열었을 때 보았던 모습을 스케치하였다가, 나중에 조각하여 성당 지하에 있는 성녀의 무덤 앞에 봉헌하였다. 현재 이곳에 있는 석상은 그 작품을 그대로 복사하여 놓은 것이다. 목 부분을 잘 보면 잘린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있다.
성녀는 순교사상 처음으로 뜨거운 목욕탕에서 증기로 질식시켜 죽이는 방법으로 처형당했으며, 이 방법이 여의치 않자, 다시 참수형을 받아 처참한 순교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녀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오른쪽 손가락 셋을 펴고 있고, 그 위에 왼쪽 손가락 인지 하나를 포개고 있는데,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일체라는 것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표현한 것이라 한다.

[ 조각과 벽화 - 초기 기독교 미술 ]
성녀 체칠리아의 무덤 왼쪽 벽 위에는 순교자 교황이었던 성 우르바노(222-230)와 그리스도가 비잔틴 양식의 벽화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사이에 그려졌음이 전문가들에 의해 밝혀졌다. 이를 비롯해 카타콤바 내부에는 성서 내용을 주로 한 벽화가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초기 신자들은 자신들의 관이나, 관 뚜껑에 그리스도인 이었음을 나타내는 상징들을 부조 또는 조각 해 놓았다. 이러한 상징들은 그 무덤의 주인이 신자였는지 아닌지를 가리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반드시 죽은 날짜, 그리고 시간까지 정확히 새겨 두었다.

[ 성 세바스티아노 카타콤바 (Catacombe di San Sebastiano) ]
성 칼리스토의 카타콤바에서 남쪽 방향으로 걸어서 10분거리에 있는 이 카타콤바도 아피아가도 옆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카타콤바라고 부르는 말의 어원이기도 한 이곳은, 세바스티아노 성인(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노의 대박해 때 로마 황제들의 궁전이 있던 팔라티노 언덕에서 304년에 순교하였으며, 현재 그 자리에는 성 보나벤투라 성당이 있음)의 유해를 찾아냄으로써, 성인의 이름을 따서 성 세바스티아노의 카타콤바라고 부른다.
이 카타콤바는 3세기 중엽 그리스도인에 대한 대 박해와 함께 이미 순교한 성인들의 무덤까지 다시 파헤치면서 박해자들이 수모를 당하자, 바티칸 골짜기와 오스티아 길목에 있던 두 사도, 즉 베드로와 바울로의 유해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이곳으로 잠시 옮겨왔다고 전한다.
다른 지역의 카타콤바들과는 달리 땅 밑에 나 있던 자연 동굴 덕분에 무덤을 파기가 쉬웠다고 한다. 성 칼리스토의 카타콤바는 사람들이 일일이 지하로 파내려 갔기 때문에 무덤 위치의 표준이 되는 통로들이 거의 직선 형태인 반면에, 이곳은 자연 동굴을 그대로 이용했기 때문에 곡선 통로가 많은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이곳 지하 무덤 안에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물 자리가 남아 있으며, 그 주위에 돌을 깎아 만든 긴 의자가 놓여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사람의 기일(忌日)을 소중하게 여긴다. 가족을 비롯하여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이 날 한 곳에 모여 죽은 사람을 위해 공동으로 기도하고 찬미가를 부르며, 찬 음식을 마련했다가 나누어 먹기도 하였다. 이 우물은 그 안에 음식을 싸서 줄에 매달아 보관하기 위해 파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은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지금도 미사가 끝나면 성당 마당에 모두들 둘러서서 준비된 찬 음식을 나누어 먹는데, 이런 음식들은 린프레스키(Rinfreshi)라고 부른다.

[ 도미틸라 카타콤바 (Catacombe di Domitilla) ]
이곳은 이 지역의 땅 소유자였던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있다.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95년 로마의 총독이었던 플라비우스 클레멘테의 조카였으며, 외가 쪽으로는 로마 황제와도 인척 관계가 있었다. 열렬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도미틸라는 황제 도미시아노(81-96)에 의해 이탈리아 지중해 가운데 있는 폰자섬으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2세기 중엽, 도미틸라는 죽기 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던 이 지역의 땅 전체를 교회 공동체에 희사하였다. 3세기 말엽에서 4세기 초 사이에 순교한 성인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의 무덤이 이 카타콤바 안에 마련되면서 본격적으로 무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이곳은 그리스도교가 자유를 얻었던 313년 이후, 신자들이 성인 가까이에 묻히기 위해 이곳에 무덤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두 성인의 원래 무덤이 있던 곳에는 아치형의 뒷벽 안쪽에 4세기 중엽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의 원판이 남아있다. 벽화의 내용은 어린 소녀가 천국의 정원에 서 있는 모습이다.
897년에 지진으로 인해 완전히 허물어졌다. 19세기 중엽 이후 카타콤바에 대한 재개발이 한창이었을 때, 이곳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발견됨으로써 본격적인 탐사 작업이 시작되었다.
현재 이곳은 지하 4층까지 발굴되었으나, 일반인들에게는 2층까지만 개방되고 있다. 남아 있는 벽화들은 거의 모두가 선한 목자와 양떼들을 그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카타콤바 안에 있는 아르코솔리(아치형으로 세운무덤)들 중 그리스도께서 열두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의 벽화가 있는데, 이는 4세기 중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벽화가 그려질 무렵 스승들이 입었던 가운(흰색으로 된 옷에 붉은 색의 긴 줄이 양쪽에 있음)을 걸치고 제자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수염이 전혀 나지 않은 아주 젊은 모습으로 되어 있다.

[ 성 아녜스 카타콤바 (Catacombe di Sant'Agnese) ]
포르타 피아(Porta Pia) 앞으로 나 있는 노멘타나 길을 3킬로미터쯤 가면 왼쪽에 오래된 성당이 보이는데, 이 성당의 지하 무덤이 성녀 아녜스의 카타콤바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노의 대박해 시기였던 304년에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한 성녀 아녜스의 무덤이 이곳에 마련되어 있다. 물론 카타콤바의 이름도 성녀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아녜스 성녀의 순교 모습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도미틸라의 경기장(현재 이곳은 나보나 광장이라고 부르며, 로마의 유명한 관광 명소 중 하나임)에서 목이 잘리기 전, 박해자들은 성녀에게 수모를 주기 위해 당시 로마에 있던 천민 계급의 부랑자들을 광장에 모이게 한 후, 성녀의 옷을 모두 벗기고 알몸이 되게 하였다고 한다. 부랑자들의 조소와 음탕한 말들은 모두 성녀에게 죽기보다 더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 기적이 일어났다. 성녀의 머리카락이 길어져 알몸을 가리운 것이다. 놀란 군중들은 마녀라고 부르짖었으며, 박해자들도 두려운 생각이 들어 얼른 목을 잘랐다고 한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리스도교가 자유를 얻으면서 이 광장에는 성녀를 기념하는 작은 성당이 들어섰고, 17세기 때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확장되었다. 성당 안의 왼쪽에는 작은 기도방이 있는데, 이곳의 제대 뒤편에 성녀의 두상이 보전되어 있다.
성녀 아녜스의 카타콤바는 모두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형성된 것으로 신자들의 무덤보다 이교도들의 무덤이 더 많이 발견된 곳이다. 입구는 성당의 왼쪽에 있으며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개방되지 않고 있다.

[ 상징물 ]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살던 사회는 이교(異敎)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그리스도교에 적개심을 보이던 사회였다. 네로 황제의 박해 시기(서기 64년 이후)에는 그리스도교가 "이상스럽고 탈법적인 미신"으로 간주되었다. 이교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불신하고 거리를 두었으며 지극히 악독한 죄명을 붙여서 그리스도인에게 혐의를 씌우고 단죄했었다. 신도들을 박해하고 투옥하고 유배나 사형에 처하였다.
종교 신앙을 드러내놓고 고백할 수 없던 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상징(象徵)을 이용하였다. 카타콤바의 벽에다 상징물을 그리고 흔히는 무덤을 봉하는 비석에 그 상징을 새겨 넣기도 하였다. 고대인들이 그러하였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상징을 무척 좋아하였다. 상징은 그들의 신앙을 가시적으로 상기시켜 주었다. 본디 "상징(symbolum)"이라는 말마디는 구체적인 기호나 형상을 가리키는데,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서 어떤 이념이나 정신적 실체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카타콤바에 사용한 주요 상징물들은 "착한 목자", "기도하는 사람",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모노그램", "물고기" 등이다.

"착한 목자" 는 어깨에 양을 메고 있는 모습인데 구세주 그리스도와 그가 구원한 영혼을 상징한다. 이 상징물은 특히 벽화에 자주 등장하고 석관의 부조에도 많이 나타난다. 석상이나 무덤을 덮은 비석에 새겨 넣은 문각(文刻)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기도하는 사람" 이 형상은 대개 두 팔을 벌려 들어올린 모습인데 이미 하느님의 안식에 들어서 사는 영혼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모노그램 (Monogramma)" 그리스어 알파벳 Χ(키)와 Ρ(로)라는 두 글자를 합성한 것으로 그리스도(Christus)를 발음하는 그리스어 단어 ΧΡΙΣΤΟΣ의 처음 두 글자를 나타낸다. 이 모노그램이 어느 무덤에 새겨져 있으면 그 고인이 그리스도인이었음을 가리킨다.

"물고기" 그리스어로는 물고기를 ΙΧΘΥΣ(ichtous: "익투스"라고 읽는다)라고 한다. 이 단어들을 위아래로 나란히 늘어놓으면 ΙΗΣΟΥΣ(Iesus: 예수) ΧΡΙΣΤΟΣ(Christos: 그리스도) ΘΕΟΥ(Theou: 하느님의) ΥΙΟΣ(Uios: 아들) ΣΩΤΗΡ(Soter: 구세주) 첫머리 글자들과 맞아떨어진다. 이런 단어를 합체문자(合體文字: 그리스어로 acrosticos)라고 한다. 어떤 단어들이나 문구들의 첫 글자들을 따서 합성하는 단어이다. 물고기를 그린 이 형상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가장 널리 보급된 상징이었으며, 어쩌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요 표징이라고 하겠다.

"비둘기" 주둥이에 올리브 가지를 물고 있는 형상인데 하느님의 안식에 든 영혼을 상징한다.

"ΑΩ" 알파와 오메가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첫글자와 마지막 글자이다. 그리스도가 만유의 시원(始原)이요 종국(終局)임을 의미한다.

"닻" 구원의 상징이자 무사히 영원한 항구에 접어든 영혼의 상징이기도 하다.

"불사조" 아라비아에 산다는 전설적인 이 새(Pheonix)는 죽은지 여러 세기가 흐르면 자기의 잿더미에서 되살아난다는 것이 고대인들의 믿음이었다. 그래서 부활의 상징물이 된 것이다.

순교자들의 무덤과 묘실 및 아치형 묘소의 벽은 벽화의 기법으로 그려낸 그림으로 장식이 되곤 하였다. 이런 벽화들은 구약과 신약의 성서 일화들을 표상하고 어떤 것은 상징적 의미에 직결되기도 한다.
카타콤바에 그려진 상징물들과 벽화들은 한결같이 복음서(福音書)의 요약판이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간추리고 있다고 하겠다.


* 판테온
판테온 광장 남쪽에 있는 로마제국시대의 유일한 건물이다. 처음에는 잡신(雜神)들을 모신 범신전(凡神殿)이었고, 건물 내부에는 기둥이나 창이 하나도 없지만 천장에서 빛을 받아 조화를 이루고 있고, 입구에는 화강암으로 된 16개의 기둥이 있다.

* 트레비 분수
애천(愛泉) 대공궁전의 정면을 차지하며, 바로크 예술의 걸작품 조각인 반인반어(半人半漁)의 해신(海神)에 이끌린 전차 위에 네프첸 해신의 동상이 조개를 딛고 서 있다. 뒤로 돌아서서 동전을 던지는 여행자는 또다시 로마로 돌아온다는 전설이 있다. 이렇게 해서 던져진 동전들은 로마시(市)가 불우이웃을 돕는데 쓴다고 한다.

* 엠마누엘 2세 기념탑
로마의 중심지 베네치아 광장에 있는 흰 대리석의 아름다운 건물, 이탈리아를 통일한 엠마누엘 2세를 기념해서 1911년에 세운 것으로, 1차 세계대전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무명용사의 묘도 이곳에 있다.

* 포로 로마노
임마누엘 2세 기념탑과 박물관 뒤에 있는 삐또리노 언덕과 팔라디노 언덕에 있는 로마의 유적으로 정치, 재판, 종교행사, 시장 등 로마제국 시대 시민생활의 중심이 됐던 곳이다. 부서진 벽과 비에 씻긴 기둥, 허리가 잘린 조각 등이 3천년의 역사를 전해준다.

* 성 십자가 예루살램 성당
헬레나 성녀가 겟세마니 동산의 흙을 옮겨다가 지은 성당으로 그녀가 이스라엘 성지 순례시 발견한 예수님의 유품과 가시관, 나무조각, 처형당하실 때 쓰였던 못, 도마의 손가락 등이 보관되어 있다. 헬레나 성녀를 기념하기 위해 헬레나 성녀 대리석 석상도 있다.

* 세 분수 수도원 성당
현 작은 자매 수녀회 수녀원 자리에서 바오로 사도가 순교했다. 이 성당은 바오로 사도가 순교하기 전 갇혀있던 감옥이 있고 바오로 사도가 순교할 때 머리가 세 번이나 튕겨졌다 하여 그곳을 보관하고 여기에 세 분수 수도원 성당을 세웠다. 또한 이곳은 기독교도 1만 여명이 참수 당한 곳이었는데 베르나르도 성인은 그들이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 한다.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 콜로세움 (원형경기장)
어의 : 거대하다는 뜻
용도 : 1901년에 세운 5만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경기장으로 검투사나 그리스도인들이 맹수와 싸우는 것을 관람하였으나 평화의 종교 그리스도교가 번성하고부터는 검투가 마차 경기로 바뀌었다. 계단으로 이루어져 앉아서 관람할 수 있게 되어 있고 십자가를 모신 장소가 로얄 박스였다. 중세 때에는 풀 먹이는 장소로 이용되었으나 현재는 교황님이 야외미사를 이곳에서 봉헌하시기도 한다. 이 건물은 17C 원형 그대로임. 건축양식은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고린토식이 복합됨.
바티칸 시국
* 성 베네딕도 수도원 (San Benedetto)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의 하나로 이탈리아 중부, 로마와 나폴리의 중간 지점의 몬테카시노에 있다.
몬테카시노에 온 누르시아의 베네딕도는 529년 이곳의 아폴로 신전을 부수고 수도원을 세운 후, 공동생활과 전교와 복종정신으로 집약되는 회칙을 제정하여 유럽 수도원 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바야흐로 전환기의 유동적 사회 상황에서 금욕자의 무리를 수도원으로 정주시키고 조직화하여, 곧 전개될 중세 가톨릭 교회의 대들보가 되는 집단을 형성하였다는 데 이 수도원의 중요한 의의가 있다. 또한 자급자족경제에 연관된 노동윤리의 육성, 장원경제와 연결되는 사회경제상에 미친 영향, 고대문화의 교량역으로써 이 수도원이 수행한 역활은 다양하다.
베네딕도는 죽은 후에 누이와 함께 이곳에 묻혔으며, 그 후부터 많은 신자들이 방문하는 성지가 되었다. 수도원 입구를 지나 중앙으로 들어서면 '낙원의 로지아'가 나오고 수도원 현관으로 올라가는 거대한 층계가 있다. 이를 '브라만테스크'라고 하는데 이탈리아의 위대한 건축가 브라만테의 건축 양식이기 때문이다. 계단 바로 앞에 수도원 창설자 성 베네딕도의 쌍둥이 여동생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상이 서있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성 베네딕도를 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 수비아코 Subiaco
로마에서 동쪽으로 약 73km 떨어진 아니에네(Aniene) 강변에 위치한 해발 410m의 마을로 성 베네딕도가 수도생활을 한 곳이다. 수비아코라는 지명은 이 구역에 있던 네로(54~68) 황제의 별장 ‘수블라궤움(Sublaqueum, 호수 아래)'에서 유래했다.
베네딕도 전기에 언급된 수비아코를 배경으로 한 많은 일화들 가운데는 베네딕도가 수비아코 뒷산에 있는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 거룩한 동굴)’라고 하는 동굴에서 3년 동안 은수생활을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베네딕도는 은수생활 이후 수비아코에서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12개의 수도원을 세웠는데 그중에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수도원은 베네딕도 쌍둥이 여동생 이름을 딴 성녀 ‘스콜라스티카 수도원’과 3년 동안 은수생활을 했던 ‘사크로 스페코 수도원’ 뿐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529년경에 제자들을 데리고 수도원을 몬테카시노(Monte Cassino)로 옮겼으나 일부는 수비아코에 남았다. [ 성녀 스콜라스티카 수도원 ]
수비아코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빠스좌 수도원(abbatia)으로 네로 황제의 별장 건물을 제자들이 수도원으로 사용했으므로 베네딕도가 최초로 설립한 수도원은 아니다.
이 수도원은 8세기부터 수비아코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원이 되었다. 특히 1050년 ~1150년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번영을 누렸는데, 당시의 훔베르토(Humbertus, 1050~1069) 아빠스는 수도원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을 세웠으며, 요한 5세(1069~1121) 아빠스는 윤리적이고 영성적으로 탁월한 학식과 행정가로서 수도원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도록 이끌었다.
1276~1456년에 아빠스들은 교황청에서 임명하였으나, 이후 1915년까지 수비아코의 수도원들은 위탁수도원이 되었다. 그러나 1915년 교황 베네딕도 15세(1914~1922) 에 의해 위탁제도가 페지되고, 수도원에 면속특권이 부여되면서 ‘교구 관할 면속’ 수도원이 되어 현재까지 수비아코 교구를 관할하는 자치 수도원으로 아빠스가 교구장이며 주교품을 받는다.

[ 사크로 스페코 수도원 ]
성녀 스콜리스티카 수도원의 분원으로서, 산쪽으로 1km 정도 떨어져 있는 사크로 스페코 수도원 안에 있는 베네딕도 성인이 기거하던 동굴을 경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베네딕고 성인이 설립한 수도원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세 말기의 벽화는 유명하다.
아씨시
아씨시(Assisi)는 로마에서 북동쪽으로 160km 떨어진 인구 2만 5천 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로 프란치스코의 성인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성지이다. 거리마다 제라늄이 피어있고, 매혹적인 전망을 볼 수 있으며, 분수가 아름다운 광장이 있어 더욱 낭만적인 마을이다. * 성 프란치스코 성인
1182년 이탈리아 아씨시의 마구간에서 큰 포목상을 경영하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의 말 뜻은 원래 '작은 프랑스인'으로 그는 성격이 활발하고 지식을 겸비한 호탕한 청년으로 성장, 한 때 자신의 젊음과 재산을 낭비하며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 아씨시와 페루지아 간에 벌어진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히고 병으로 눕게 되면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무엇이 내 삶에 의미를 준단 말인가? 자문하던 중에 뜻 밖에 나병 환자를 만나 강한 충동으로 나병환자의 손에 자기의 입을 맞추면서 나환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시작했다. 두 번째의 체험은 반쯤 허물어지는 다미아노 소성당에서 주님께 기도하고 있을 때 거기에 걸려있는 십자가 상에서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그때부터 회개하기 시작하였고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성당 보수비를 마련하였다.
화가 난 그의 아버지는 소송을 하게 되어 그는 재판장 앞에 서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며 입고 있던 의복과 소지품 일체를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홀로 청빈을 모토로 오로지 주님 말씀에만 관심을 쏟고 살았다.
성인은 옛 동료들로부터 초대받은 잔치 자리에서 "나는 가난과 결혼하려고 해"하면서 결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자유의사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할 수 없는 평화를 얻었다. 가난한 자와 똑같이 된 프란체스코 는 이렇게 말했다. "거지를 욕하는 자는 누구 이건 간에, 모든 가난한 이들이 그분의 고귀한 표를 지니고 있는 그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이다. 성인은 다미아노 성당에서 미사참례 도중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의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마태 10, 9­10)는 말씀을 듣고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것이다. 바로 내가 온 마음을 바쳐 행할 일이다." 하시면서 형언 할 수 없는 기쁨으로 손 벽을 쳤다. 그래서 청빈의 덕을 생활로 삼아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12명의 제자를 두게 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교황(1198~1216)에게 수도원의 인가를 청원하여 「작은 형제회」라는 이름으로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 제 2회 글라라회와 프란치스코 제 3회를 설립하였다. 1216년 그는 '수도회'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몇 개의 관구로 분할하고 외국에도 파견하게 되었다. 그는 자주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하였고 엄격한 고행과 끊임없는 묵상을 하곤 하였다. 1224년 그가 알베나 산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예수께로부터 주의 상처와 같은 오상을 받게 되어 그 후 2년간 예수님의 고통을 체험하며 죽을 무렵까지 설교를 계속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한 가난 속에서 주님의 뜻에 알맞은 생활을 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날아다니는 새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을 전했다고 할 정도로 자연을 사랑했고, 대자연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다. 그 유명한 '태양의 찬가'와 '평화의 기도'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성 프란치스코 성당 ]
건축공사는 성 프란체스코가 사망하자 곧 시작되었다. 1228년 한 시민이 대지를 기증하였고 1230년 그의 유해가 이장되었으며 그 위에 2층의 성당이 세워졌다. 아래층은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둥근 천장 건물이며 위층은 이태리 초기 고딕 양식의 건물이다(1228~1253) 엘리아 수사가 설계하여 건축한 성 프란치스코 성당은 청빈, 정결, 순명을 나타내는 모자이크가 아름답다. 특히 성인의 생애를 28개의 장면으로 나눈 지오토(Giotto) 작품의 프레스코화로 아주 유명하다. 이 수도원은 3,000명이 생활하던 곳이고 성인의 생활상을 벽화에 담았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는 성인의 유품인 떨어진 옷과 지오또 등이 그린 명화들을 통해 청빈과 정결과 순명을 가르치고 실천한 성인의 정신을 배울 수 있다.


* 글라라 성녀
성녀 글라라는 아씨시의 귀족가문 스띠피 집안에서 태어났다. 18세 사순절 때 지금의 성 글라라 성당에서 우연히 프란치스코 성인의 설교를 듣고는 감화되어 프란치스코 성인과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1212년 성지주일 밤 그녀는 시종과 함께 집을 떠나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났던 안젤 성모 교회로 가 그곳에서 그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지도를 받으며 머리를 자르고 그리스도께 삶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프란치스코의 첫 여제자가 된 글라라는 아씨시 근교의 낡은 집에서 글라라회를 창설하여 침묵, 청빈, 단식을 통한 기도생활을 했다.
수녀원을 이끌어 가는 데는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하느님의 안배하심으로 궁핍할 때 기적도 일어났다. 예컨데, 빵 1개로써 많은 수녀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많아진 기적이며, 혹은 십자가를 그음으로써 비어있던 기름단지에 기름이 가득 채워진 경우도 있다. 후에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이 된 후고리노가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일인데 추기경이 글라라에게 강복하기를 명하므로 겸손한 그는 곧 십자가를 그으며 식탁을 강복하자 돌연 그 위에 있는 빵마다 십자가의 표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1240년에는 사라센대군이 아씨시에 침입했을 때 "주여, 나는 당신이 사랑하는 동정녀들을 보호할 힘이 없나이다. 청하건 데 당신이 직접 전능하신 힘으로 그들을 보호하사 적의 손에 넘기지 말아 주소서" 하며 기도를 바치고 성광을 모시고 적군 앞에 나서시자 성광에서 기이한 빛이 발사하여 이교도인 적들은 눈이 부셔 겁을 먹고 퇴각하였다.
글라라는 '빛'이라는 뜻이다. 그의 성덕의 빛은 지금도 찬란하며 주의 길을 따라 천국으로 향하는 자들의 앞길을 비추어 준다.
1253년 8월11일 산 성녀라 불리던 성녀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고 사후 2년 후에 교황 알렉산델 4세에 의해 성인 품에 올랐다. [ 성녀 글라라 성당 ]
수녀 성 클라라 사후 4년인 1257년에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그 3년 후에 클라라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인상적인 것은 프란체스코 성인에게 말씀하신 독특한 모습의 십자고상, 프란체스코와 클라라 두분 성인이 입던 옷, 그리고 클라라 성녀의 유해다. 성당 지하의 창살 사이로 보이는 클라라 성녀의 얼굴은 새까맣게 화석이 되어 있다. 700여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성당의 별실에는 두 성인께서 수도하시며 입고 계시던 옷이 전시되어 있다.


*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
인구 4천명의 '천사들의 성 마리아' 마을에 이르면 같은 이름의 성당이 있다. 이 대성당 안 한가운데에 '뽀르치운꼴라'라고 하는 성당이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제자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성당 안쪽 복도에 살아있는 비둘기를 손에 든 석상이 성인의 성덕을 드러내고 있다.
시에나 (Siena)
세 개의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시에나(Siena)는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이 도시의 무역과 예술의 황금기에 바로 토레 델 만쟈(Torre del Mangia), 두오모(Duomo), 세례당과 산 도메니코(S. Domenico)와 산 프란체스코(S. Francesco) 교회가 지어졌다. * 두오모 성당 (Piazza del Duemo)
이탈리아 최고의 성당으로 꼽히는 시에나의 두오모(Duomo)는 1136년에 착공되어 1382년에 완공되었다. 조각과 회화와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의 건축이 어울려 창조해 낸 멋진 예술품으로 14세기의 당초 계획이 실현되었다면 교회가 낳은 최대 규모의 성당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348년 페스트로 도시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당초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외관은 죠반니 피자노(Giovanni Pisano)의 작품이며, 내부의 돔은 아름다운 푸른 빛으로 별이 점점이 그려져 있고, 56개의 패널로 나뉘어진 훌륭한 대리석 바닥이 근사하다. 이는 약 40명의 작가의 합동작이며, 위엄 있는 강단은 니콜라 피자노(Nicola Pisano)의 작품이다. 그 밖에도 도나텔로(Donatello), 미켈란젤로의 조각 걸작품들, 뛰어난 상감 세공 보석, 핀투리키오(Pinturicchio)의 웅장한 프레스코 연작 등으로 가득하다.

* 피아짜 델 캄포 (Piazza del Campo)
이 도시의 심장부에 있는 오목한 조개 모양의 사랑스럽고 조화로운 광장인 피아짜 델 캄포(Piazza del Campo)는 헤링본 모양으로 아름답게 디자인되었으며, 팔라초 푸블리코(Palazzo Pubblico), 팔라초 델치(Palazzo d'Elci), 팔라초 산세도니(Plazzo Sansedoni), 팔라초 키지-존다다리(Palazzo Chigi-Zondadari) 등의 화려한 저택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건물들은 1288년에서 1342년 사이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시에나 독립기의 자주성과 막강했던 경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광장의 왼편으로는 토레 델 만쟈(Torre del Mangia)가, 발치에는 피아짜 카펠(Piazza Chapel)이 위치한다. 피아짜 델 캄포(Piazza del Campo)에서는 일년에 두번(7월 2일과 8월 16일) 팔리오 델레 콘트라데(Palio delle Contrade)가 열려 시에나 사람들의 열정을 불태운다.
피렌체 (Firenze)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자치주의 주도. 면적 102㎢. 인구 35만 1600(2003). 영어로는 플로렌스(Florence)라고 한다. 로마의 북서쪽 약 230㎞, 아펜니노산맥 기슭, 아르노강 연변에 있다. 기후는 비교적 온화한데 일시적으로 극단적인 계절적 기온을 나타내기도 한다. * 역사
BC 1세기 무렵 로마 식민군에 의해 건설되었고 제정시대에 토스카나의 중심지가 되었다. 11세기말 마틸데 디 카노사 시대까지 도시의 발전은 정체되었으나, 12세기초 자치도시가 된 뒤 모직물공업이 발전하여 유럽의 상공업/금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3세기초 교황당(겔프)과 황제당(기벨린)이 싸워 교황당과 대상인(大商人)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 뒤 대상인은 정치적 혼란을 틈타 세력을 확장하였고, 13세기말 교황청으로부터 징세 업무를 위임받아 금융/무역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여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15세기초 피렌체의 재벌 메디치가(家)가 권력을 장악하였고 C. 메디치와 손자 L. 메디치가 실질적인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들은 예술과 학술을 후원하는 등 르네상스 진흥을 위해 노력하였고, 이때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대에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 탄생했고, 피렌체의 명성은 절정에 이르렀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까지 메디치가의 추방과 복귀가 되풀이되었으나 1532년 메디치가의 세습체제가 확립되고 피렌체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메디치가의 분가(分家)인 코지모 1세가 토스카나대공(大公)의 칭호를 받아 69년 토스카나공국(公國)이 성립하였으며 피렌체는 수도가 되었다. 그 무렵부터 질병이 유행하고 인구가 감소되었으며 경제도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나 1737년 메디치가 최후의 대공 가스토네가 죽은 뒤 계몽군주 레오폴트 2세의 치세로 다시 활기를 찾았다.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이탈리아 통일운동)의 고조 속에 1860년 국민투표에 의해 사르데냐왕국(61년 통일 이탈리아왕국이 됨)에 통합되었고 65~70년까지 통일 이탈리아왕국의 수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치열한 공습을 받았으며 1967년 아르노강이 범람하여 우피치궁전 등의 문화재가 큰 손실을 입었다.

* 사회/문화
건축사적으로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많다. 독특한 고딕양식으로 세워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성당, B. 조토의 벽화로 유명한 산타 크로체성당, 르네상스 종교건축의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인 산 로렌초 성당을 비롯하여 F.G. 프라 안젤리코의 벽화가 있는 산 마르코 수도원 등의 종교건축물이 있다. 또 시뇨리아 광장을 향해서 13세기말 착공된 베키오 궁전이 있고 1560년 G. 바자리가 설계한 우피치궁전은 현재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우피치미술관이며, 1345년 아르노강에 설치된 폰테 베키오 다리는 2층 건축물로서 독특한 구조를 자랑하고 있다. 다리 남쪽에 15세기 건축물인 팔라초 피티 궁전이 있는데 현재는 팔라티나 미술관으로서 16~17세기 회화를 전시하고 있으며, 국립미술관인 바르젤로미술관은 르네상스 조각품을, 아카데미 미술관은 B. 미켈란젤로 조각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밖에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하여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1924년 설립된 피렌체대학 등 문화/교육 시설이 많다. 한편 피렌체는 아르노강 연변의 교통로와 아펜니노산맥을 넘는 교통로의 결절점으로 교통의 요지이다.
이탈리아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간선철도가 피렌체를 지나가며 동서를 연결하는 지선도 있다. 또 이탈리아의 남북으로 뻗어 있는 고속도로가 이 도시 남서부를 거쳐 각지로 연결되며 북쪽에 페레톨라 공항이 있다. [ 두오모 광장 주변 ]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은 두오모 광장 및 접속된 조반니 광장(Piazza San Giovanni)에 탑, 세례당과 더불어 경탄할 만한 모습으로 군집하여 서있다.

[ 두오모 성당 ]
꽃의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l Fiore)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광장에서 동쪽으로 약 400m지점에 있으며 피렌체의 상징으로 높이 106m이다.
1294년 피렌체의 시민들이 낡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 대신에 대성당을 짓기로 결의하고 1296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에 따라 기공하였다. 몇 차례 설계의 주체가 변경되고 공사의 중단을 겪으면서 1420년까지 공사가 진행되었으나 거대한 돔은 1887년에 가서야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카에 의해서 완성할 수 있었다. 높이 106미터의 이 거대한 주황색 돔은 미케란젤로가 성 베드로 성당의 돔을 만들 때 참고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와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흰색 일색으로 지어진 고대 성당 건축과는 다르게 주황색과, 녹색의 대리석을 기하학적으로 배열하여 사용한 이 성당은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변색되어 고딕양식의 예리함보다 오히려 유연하면서도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후일 피렌체 고딕 양식이란 독특한 장르를 만들게 되었다.

성당 중앙부 합창대에서 올려다보면 브루넬레스키의 걸작 대원개가 보이고 이곳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미켈란젤로의 불후의 명작인 '최후의 심판'이고, 정면 왼쪽 뒤에는 미켈란젤로의 미완의 대작 '피에타'가 있다.
왼쪽의 회랑에 있는 입구에서 463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대원개의 옥상으로 나가 지상 106m 높이에서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두오모 뒤쪽으로 나아가면 두오모 미술관 입구가 있고,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성당이다.

[ 산 조반니 세례당 ]
종탑은 높고(82m) 가늘며, 부르넬레시의 탑과 잘 어울린다. 지오토가 디자인하여 1334년 착공했다. 그는 1336년 완공을 못보고 죽었으며 이 고딕식 종탑은 14C 말에야 완성되었다. 수평을 강조하는 이 탑의 기하학적 장식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 하부에는 훌륭한 부조가 있는데 피사노(Andrea Pisano)의 작품과 제자들의 작품이다. 탑 위에 오르면 성당의 전경과 도시의 경관을 즐길 수 있다. 종루의 최상단까지 오르자면 414계단을 거쳐야 하고 긴 창으로 둘러싸인 종루에는 '아포스톨리카'의 종이 매달려 있다.

[ 지오토의 종루 ]
바르젤로 국립미술관 동쪽, 아르노강 기슭 가까운 장소에 있으며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지베르티, 갈릴레이, 로시니 등 르네상스 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피렌체 출신 유명인들의 무덤과 기념비가 있다. 성당 측면 회랑에 있는 카펠라 데파치는 필리포 브루넬레시의 설계로 탄생한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이다. [ 산타 크로체 성당 ]
두오모에서 칼차이우올리 거리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마주치는 광장으로 옛날에는 피렌체 정치의 중심지였던 곳이지만, 현재는 카페 테라스가 있는 휴게장소이다.
부근에는 베키오 궁전의 대종루가 보이고 '넵듄의 분수'도 있다. 또 조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코시모 데 메디치의 기마상이 있어 일대는 언제나 젊은이들로 붐빈다. 이 광장 중앙에는 한때 피렌체를 지배했던 수도승 사보나롤라의 처형지임을 밝히는 화강암이 서 있다. [ 시뇨리아 광장 ]
시뇨리아 광장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견고한 요새와 같은 고딕풍의 건물로 중앙의 네모진 종루의 높이는 93m. 1298년에 착공, 몇 번이나 개수를 한 끝에 16세기에는 거의 현재의 모습이 되었고, 현재는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궁전의 오른쪽에 있는 입구로부터 계단을 올라가면 대청으로 들어가는데, 대청 양쪽 벽면은 바사리와 그 일파가 그린 메디치의 전투장면이 있다. 다시 3층으로 올라가면 기를란다요의 프레스코화가 있고, 그밖에 마키아벨리의 초상화, 프란체스코 1세의 방, 지구의의 방 등 그 옛날 피렌체의 부와 힘을 느낄 수 있는 유물들이 많다. [ 베키오 궁전 ]
시뇨리아 광장 남쪽에 서 있는 장려한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리 우피치 궁전이고, 그 안에 미술관이 있다.
우피치 궁전은 코시모 데 메디치의 명으로 1560년부터 건설된 3층의 궁전으로 당시에는 메디치가의 사무실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우피치 미술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으며, 일부는 고문서보관소로 이용되고 있다. 이 미술관 견학은 피렌체 관광의 하이라이트로, 세계 최상급 미술품인 수장품으로 가득 차 있다.
고대 로마. 그리스 조각으로부터 플랑드르 회화나 렘브란트에 이르기까지 미술품의 내용은 다양하나, 특히 걸작 중의 걸작은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의 대표작들이다. 보티첼리의 '봄','비너스의 탄생',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3현왕의 예배','수태고지', 미켈란젤로의 '성가족', 조토의 '성모자', 라파엘로의 '레오 10세의 초상'등 유럽의 명화를 감상할 수 있다.
피사 (Pisa)
1063년 피사가 팔레르모 해전에서 사라센의 함대를 격파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건축가 G.부스케토의 설계로 착공하여 1118년에 봉헌되었으나 그 후 건축가 라이날도에 의해 신랑부가 서쪽으로 연장되고 돔이 얹혀졌으며 정면이 착공되어 13세기에 완성되었다. 이 건물은 이태리의 로마네스크 양식 중에서도 특히 피사 양식이라 불리는 대표적 양식으로 라틴 십자가의 직사각형 설계에 교차부에는 돔을 얹었다. 외벽의 토스카나-로마네스크 양식의 수평 무늬가 건물 전체를 감싸는 느낌을 주며 정면 2층 이상의 롬바르도-로마네스크 양식의 열주랑이 다른 성당에서 볼 수 없는 신선함을 준다. * 피사 대성당 (Duomo di Pisa)
1174년에 건축을 시작, 1350년에 완성되었으며 건축하는데 무려 176년이나 걸렸다 지금은 피사의 사탑으로 더 유명하지만 원래는 대성당의 종탑으로 건축된 것이며 지반이 약해서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다. 정상의 전망대까지는 294계단이다. 이 사탑은 갈릴레이가 중력을 실험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밀라노 (Milano)
이태리 북서부 롬바르디아주의 주도로 롬바르디아 평원 중앙부의 오로나강과 람브로강 연안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경제적인 수도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건축물, 박물관, 미술관, 대학 등으로 둘러싸인 문화와 전통이 숨쉬는 도시다.
313년 밀라노가 메디오라눔(Mediolanum)이라는 라틴이름으로 서부 로마 제국의 수도로 있을 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밀라노 칙령을 공포,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1000년 경부터 커다란 경제 발전이 포(Po) 계곡에 찾아왔고, 이는 밀라노의 정치 구조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황제의 권능에 도전 할 만큼 매우 막강하고 활동적인 지방자치제로 변하게 되었다. 실제로 1176년 레가 롬바르다(Lega Lombarda)를 이끌고 레냐노(Legnano)에 있는 황실 군대를 무너트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번성기가 있었던 덕택에 밀라노에는 훌륭한 예술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 가득하다. * 밀라노 대성당 (Duomo di Milano)
밀라노의 상징인 두오모(Duomo) 대성당의 건축 기간은 자그마치 5세기가 꼬박 걸렸다. 1386년 착공되어 1813년 외관이 완전히 마무리 된 무척이나 긴 공사 기간에도 불구하고 중간의 계획 변경 없이 한결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탈리아 최대의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높이가 157m, 너비가 92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고딕 양식의 교회이다. 웅장한 크기에 첨탑이 숲을 이루고 있는 자태는 감탄을 자아낸다. 15-16세기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장엄한 빛을 받아 더욱 화려하고 장엄한 실내 장식은 이탈리아 최고의 두오모라는 찬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고 있다.

*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Santa Maria Delle Grazie)
밀라노시 마젠타 거리에 있는 이 성당은 브라만테가 설계하였으며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거대한 16면 돔과 성가대석을 갖춘 고딕 양식 건물로 1466~82년에 벽돌로 지어졌다.
성당에 인접하여 도미니꼬회 수도원이 건립되었으며 그 서쪽에 직사각형의 홀로 된 수도원의 식당이 있다. 이곳 북쪽 벽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1485~97년에 그린 유명한 '최후의 만찬'이 템페라로 그려져 있다. '최후의 만찬'은 페인트가 벗겨지는 바람에 크게 파손되어 1952년, 1977년, 1988년 세 차례에 걸쳐 복구되었다.

* 스칼라 극장 (Scaia Theatre: 1776~1778)
오스트리아 통치 하에 세워진 건물로, 훌륭한 오페라 하우스이다.
피에르마리니(Piermarini)의 건축물이다.
볼로냐 (Bologna)
이탈리아 북동부 에밀리아로마냐 자치주의 주도. 인구 36만 9955(2001). 토스카나-에밀리아 아펜니노산맥의 북쪽 기슭, 레노강과 사베노강 사이에 있는 들판의 에밀리아 가도를 따라 있다. 이탈리아 북부와 중/남부를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이고,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식품가공/제화/목재가공/고무/금속/정밀기계/플라스틱 등의 다양한 공업이 있는데, 규모로는 중소기업이 일반적이다.
BC 6~BC 4세기의 에트루리아인 지배등을 거쳐 BC 189년 로마의 식민도시가 되었다. 그 뒤 12~13세기에는 상업, 곡물, 견/마직물업을 토대로 크게 번영하였다. 또 11세기에 창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볼로냐 대학은 법학연구를 주체로 발전하여 신학연구의 파리대학과 함께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1371년의 인구는 5만이었다고 한다. 14세기 이후, 볼로냐파 회화의 거점이 되었다. 1513년부터 교황령이 되었고, 그 상태가 나폴레옹시대(1796~1814)를 제외하고 이탈리아 통일까지 계속되었다.
고딕양식의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14~17세기), 14~17세기의 볼로냐파 회화의 컬렉션이 수장되어 있는 콤무날궁전(13세기), S.U. 라파엘로의 《성녀 체칠리아》 등이 수장된 국립회화관, 가리센다탑(48m로 미완) 등 특기할 만한 미술작품, 역사적 건축물이 많다. 1972년 역사지구의 보존과 복원을 위한 본격적 시책이 착수되는 등 도시계획에 관해서는 파시즘기 이래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 (Basilica of San Petronio)
볼로냐의 주교에게 바쳐진 것으로 볼로냐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교회이다. 1390년에 안토니오 디 빈첸초(Antonio di Vincenzo)의 감독 하에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유명한 수호성인 음악당(Petronian Music Chapel)이 있는데, 로렌초 다 프라토(Lorenzo da Prato)가 1470년 경 주문하여 만든 오르간은 매우 웅장한데, 아직도 연주되고 있다. 이곳의 자오선은 잔 도메니코 카씨니(Gian Domenico Cassini)가 디자인한 것으로 1656년경에 지어졌으며 세계에서 가장 긴 것으로 밝혀졌다. 그 길이는 67.72m이고 지면에서 27m 높이에 빛 구멍이 있고, 지점과의 거리는 56m이다. 이 길이는 지구 자오선의 600,000분의 1에 해당하는 것이다.

* 산 피에트로 (Santa Pietro)
볼로냐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당으로 1,000년도 경에 지어졌으며 자주 재건축되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16-18세기의 것이다. 웅장한 앞면은 알폰소 토레지니(Alfonso Torreggini)가 디자인한 것으로 1743년에서 47년까지 만들어진 것이다. 내부에는 뛰어난 16세기의 사제관이 있는데, 카라치(L. Carracci)의 작품인 성 프란치스(St. Francis)와 "성수태 고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수태를 알린 일)"을 볼 수 있다. 로마 시대의 목재 그리스도 수난상과 16세기 초반의 롬바르디(A. Lombardi)의 작품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 작품을 볼 수 있다.

* 산 프란체스코 (San Francesco)
1236년부터 54년에 걸쳐 지어진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첫번째 프랑스 고딕 양식으로 성가대 뒤편 후진의 날아갈 듯한 버팀목과 간결한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의 외관이 빼어나다.
장엄한 내부 장식 중 베네치아 예술가인 야코벨로(Iacobello), 페이르파올로 달레 마젠네(Pierpaolo Dalle Masegne)가 1388-93년에 걸쳐 완성한 대리석 제단(Marble Altar-Piece)에서 귀족적인 특징이 가장 두드러져 나타난다.
스페란지오(Speransio: 1482)가 디자인한 교황 알렉산더(Alexander) 5세의 돌무덤은 또 다른 흥미로운 볼거리이다. 교회를 따라 14-15세기의 수도회와 주석이 딸린 묘들이 늘어서 있다. * 마돈나 디 산 루카 (Madonna di San Luca) 지성소
구아르디아(Guardia)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옛날 군대의 본부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첫 번째 암자가 1160년 언덕 위에 지어졌으며, 1198년까지 이어져, 14-15세기에 복구되었다. 이 현존하는 교회는 카를로 프란체스코 도띠(Carlo Francesco Dotti)가 지은 것으로 1723-1757년 동안 작업이 진행되었다. 내부는 그리스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복음사가 요한에게 바쳐졌던 비잔틴 이콘을 소장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요한은 테오콜레스(Theocoles)라 불리는 그리스 순례자들에 의해 볼로냐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지성소는 약 4km에 달하는 언덕길을 가로지르는 주랑으로 시내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사라고짜 거리(Via Saragozza)에서부터 666개의 아치형 기둥이 1674-1739년 사이에 지어졌으며, 전 시내 주민들이 비용을 지불하였다. 이 주랑은 멜론첼로 아르크(Meloncello Arch)가 장식을 맡고, 도띠가(C.F.Dotti)가 1732년 건축하였다. 이 언덕에는 15개의 작은 예배당이 있으며, 그들 내부에는 로사리오(Rosary)의 신비를 담아내고 있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 산 도메니코 (San Domenico)
도미니코 수도회(Dominica Order)의 발상지로, 설립자 도미니꼬 성인의 유품이 남아 있다. 1221년에 착공되었고 내부는 1728-32년까지 도띠(C.F. Dotti)에 의해 근대화 되었다. 다채로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 정면과 성가대석 후진 왼편에 있는 인상적인 고딕 양식의 예배당이 볼 만하다. 니콜라 피자노(N. Pisano)와 그 문하생들이 1267년 무덤의 동상을 조각하고 아르카(N. dell' Arca)가 1469-73년에 걸쳐 반곡으로 장식하고, 1494년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동상으로 장식이 추가되었다. 프라 다미아노 다 베르카모(Fra Damiano da Bergamo)가 디자인한 목재로 된 성가대 석과 중앙 제대(1528-40)가 있다. 석관 뒤에 있는 성골함(1383)에는 성 도미니코의 유해(머리)가 들어있다.
파도바 (Padova)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 자치주에 있는 파도바현의 현도. 인구 20만 9641(2000). 영어명은 파두아. 바카리오네강 연안에 있으며, 운하를 통하여 브렌타/디아제/포 등의 강과 연결되고, 고속도로/철도간선이 지나는 교통요지이다. BC 4세기 건설되어 로마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하였다. 제정기에 농/공업 중심지가 되었고, 특히 양모와 직물의 산지로 유명하였다. 고트족/훈족에 의한 파괴 후 카롤링거왕조시대에 많은 특권을 얻어 재건되어 12세기 자유도시가 되었으며, 1318년 카라라가(家)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 시기는 모직물과 견직물이 번성해 파도바 최성기에 해당되며, 현재의 중심지는 이 당시 건설된 것이다.
1405년 베네치아 세력권에 편입되었지만 번영은 계속되었다. 짧은 프랑스 통치시대를 거쳐 1797년부터 오스트리아령이 되었다가 1866년 이탈리아왕국에 통일되었다. 1222년 창립된 파도바대학이 있으며 성 안토니오의 유해가 있고 화려한 돔이 있는 성 안토니오성당(13세기)은 중요한 순례지이다.
그 밖에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생애를 그린 조토 디 본도네의 벽화로 알려진 스크로베니성당(14세기), 도나텔로의 청동상 《가타메라타장군 기마상(1453)》 등 중세로부터 르네상스기에 걸친 미술/건축물이 많다. 식품/화학/섬유/금속/기계 등의 공업도 활발하다. * 성 안토니오 성당 (Sant' Antonio)
화려한 돔이 있는 13세기의 성당으로 파도바에서 생을 마감한 위대한 설교가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의 유해(혀)가 보존되어 있다.

* 스크로벤니 성당 (The Scrovegni Chapel)
이태리 파도바(베니스에서 기차로 30분거리의 대학도시)의 스크로베니 성당에 있는 지오토의 프레스코화 복원화가 2002년 3월 18일부터 일반에게 개방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프레스코화중의 하나로 700년에 걸쳐 보존된 것이다. 복원화가 35명이 참가해 15년간의 오랜 작업끝에 완성을 본 것으로, 그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지오토의 걸작 100여점이 스크로베니 성당의 벽과 천정을 장식하고 있다.

* 지오토 (Giotto di Bondone, 1267~1337)
지오토는 서양 회화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화가중의 한 명이다. 그는 고딕 말기에 활동했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신 중심의 신성하고 정형화된 예술에서 벗어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자유로운 예술로 되돌아가 인간적인 가치를 회복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마치 가공의 인물처럼 그에 대한 실제 모습에 대해서는 어떤 역사적 자료를 찾을 수 없으며, 그에 대한 사실적 자료도 그리 많지 않다. 그는 그림 속에 그의 모습을 가끔씩 등장시키기도 했는데, 그런 그림(아래 사진)등으로 그에 대해 추측해 볼뿐이다. 지오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는 양치기 소년이었는데, 바위에 있는 집에서 양의 모습을 완벽하게 스케치하는 방법을 발견해 내었다. 그래서 그는 어떤 부분이라도 그릴 수 있는 붓으로 돼지들을 만드는 공장을 만들어 사업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그는 1267년, 또는 1276년에 피렌체 근교의 한 마을인 콜레 디 베스피자노에서 태어났다. 지오토는 10세 되던 해 아마도 당시 유명 화가였던 치마부에(1240~1302)에 의해 발견돼 피렌체로 가서 그림 공부를 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피렌체의 세례당에서 모자이크를 그렸다. 그는 피렌체의 시민으로서 아씨시, 로마, 파도바, 밀라노, 나폴리등에서 일을 했다. 그는 치마부에의 견습생으로 시작했지만 지오토의 작품 형태는 치마부에의 작품들(기존의 로마시대의 프레스코화나 프랑스 고딕 조각상들)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기존의 것을 흡수하여 새로운 형태를 창조해냈다. 지오토의 뛰어난 재능은 단테가 그의 "신곡(神曲)"에서 아래와 같은 유명한 글을 쓰게 만들었다.

"그림에서는 치마부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지오토의 명성만이 높고 그의 이름은 희미하게 되었네"...

지오토는 표면의 집 위에 감정과 공간의 사이에서 진실한 삶의 환상을 묘사한 초기화가중의 한 명이었다. 지오토는 당시의 상투성에서 탈피함으로써 치마부에와 함께 종종 현대 회화를 창시한 사람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지오토는 초기에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곳이었던 아씨시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상단 벽화 "성 프란체스코전(傳)" 28점을 그렸다. 아씨시에서의 공간의 주제는 이미 알려진(당시 중세시대에서는 잊혀진)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관한 것이었다. 아씨시에서 작업은 그의 재능을 드러내면서 파도바 스크로베니 성당(좌측 사진)의 프레스코화를 창조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지오토는 1303~1305년까지 파도바 스크로베니 성당(아레나 예배당이라고도 불리움)의 장식을 맡아 여기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아주 중요하면서도, 유럽 회화사에서도 하나의 사건이라 할수 있는 지오토의 전형적인 작품을 창조해 내게 된다. 스크로베니 성당은 그에게 회화공부를 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장소가 되어 주었으며, 이곳에서 그는 예술적 혁명의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이곳의 프레스코화들이 그의 초기작품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의 작품의 근원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미 완숙한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의 대표작인 스크로베니 성당의 "최후의 심판"(사진)은 종교적인 소재이면서도 새로운 감각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1334년 그는 피렌체 성당의 감독자로 임명되었고, 시내의 건축(지오토의 종루를 디자인했음, 사진)을 맡게 됩니다. 이것은 그를 위대한 건축 지식을 갖춘 화가로서의 면모을 빛내는데 공헌하게 된다. 지오토는 1337년에 사망했으며, 시로부터 명예를 인정받아 산타 리파라타에 묻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파도바의 스크로베니성당의 내부를 장식한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이야기" 37점, "우의상(寓意像)" 14점, "최후의 심판" 등의 벽화군(1305년경)으로, 화면의 간단명료한 합리적 구성과 인물상의 조형성, 극적 내용의 심리적 표현 등에서 획기적인 기법(아래 복원화들 참조)을 보여주고 있다. 그 후의 걸작은 피렌체의 온니산티 성당에 그린 제단화 "장엄한 성모"(우피치미술관 소장)이다.
베네치아 (Venezia)
환상의 도시 베네치아. 해상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120개의 섬이 400개의 다리로 이루어져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다. 1200년 전까지 이탈리아내의 가장 발달된 상업과 수공업 및 정치의 중심지였다.
세계 7대 불가사의중의 하나로 약 150만개의 말뚝 위에 세워진 수상도시이다. 지금은 상업은 없고 모든 것이 서비스업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유리 세공업으로 유명한 무라노섬, 국제 영화제 및 해수욕장, 카지노 등으로 유명한 리도 등도 베네치아에 속해 있다. 또한 공화국 번영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산 마르코 대성당, 두칼레 궁전, 아카데미아 미술관 등은 미술, 건축 예술의 보고로 알려져 있어 베네치아는 이태리에서 로마, 피렌체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관광지가 되고 있다. * 산 마르코 광장 (Piazza San Marco)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 마르코 광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대리석 살롱이다(길이 175m, 폭 80m). 전 광장을 둘러싸고 유개 회랑이 설치되어 있으며 여기엔 유명한 카페들과 고급 상점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한때 야채를 재배하는 밭이었다. 12세기에 와서 세바스티아노 지아니(Sebastiano Ziani) 총독에 의하여 넓은 공터로 변하게 되고 주위에는 오늘날 볼 수 있는 건물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1264년에 와서 이 광장 바닥은 벽돌을 사용하여 물고기 지느러미 무늬로 포장되었다. 현재의 바닥은 1723년에 안드레아 티랄리(Andrea Tirali)의 설계에 의해서 완성됐으며 유명한 가게가 많다. 특히 카페전문점 플로리안(Florian)은 1720년부터 영업을 한 곳으로 바이런, 괴테, 바그너 등도 고객이었다고 한다.
대운하로 열려 있는 광장은 전에 '일 브롤리오(Il Broglio)'라 불려졌다. 그것은 음모라는 뜻인데,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오직 귀족들만이 거기서 만나는 일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산 마르코의 사자상을 위에 올려 좋은 두개의 화강암 기둥과 성 테오도레의 상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 온 것이다.
바실리카(성당) 앞에는 세 개의 깃대가 꽂혀 있어서 사이프러스, 칸디아, 모레아의 베네치아 왕국을 상징한다.

* 산 마르코 대성당 (Basilica San Marco)
산 마르코 성당(Basilica di San Marco)은 동방의 비쟌틴 양식과 서구의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 건축물이다.
823년에 베네치아 (Venezia) 상인들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슬람을 신봉하는 이집트인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성 마르코(San Marco)의 유해를 돼지고기 밑에 숨겨 들여와 그들의 수호성인으로 모셨다. 베네치아 인들은 그들의 수호성인이 편히 쉴 수 있는 성당을 1062년에서 1073년 사이에 짓고 성인의 이름을 따 성 마르코 성당(Basilica di San Marco)이라 불렀다.
이후 이 성당은 르네상스 때와 17세기의 복원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당의 정면 위에 세워진 유명한 네 마리의 청동 말은 1204년 통령(Doge) 단돌로(Dandolo)가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온 것으로 1797년에 베네치아를 정복한 나폴레옹은 이 청동상을 파리로 가져가 자신의 개선문 위에 장식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 놓았다.
성당의 내부는 희귀한 색의 대리석과 반암들, 12, 13세기의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와 16세기 르네상스 양식의 금빛 모자이크들로 호화롭게 장식되어있다. 그 중에서도 천국의 천정과 오른쪽의 그리스도의 생애와 세례 요한의 생애 등이 특히 유명하다. 중앙제단 밑에는 성 마르코(San Marco)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제단 위의 천개는 녹색 대리석과 동양풍의 설화석고 석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제단 뒤쪽의 유명한 황금의 성당(Pala d'Oro)은 금은보석으로 호화 찬란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976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만들어진 것을 1105년과 1345년에 베네치아에서 복원해 놓은 것이다. 성당 내부의 오른쪽 주랑에 있는 보물실(Tesoro)에는 1204년 베네치아 인들이 십자군 운동 당시에 콘스탄티노플 에서 가져온 여러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사용되었던 못과 머리에 씌웠던 가시관의 가시 등을 비롯하여 비잔틴의 귀중한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 탄식의 다리 (Ponte dei Sospiri)
두칼레 궁(Palazzo Ducale)과 궁 뒤편에 있는 감옥과 처형장을 연결하는 다리가 탄식의 다리이다. 이 이름이 붙여진 것은 1600년경인 데 당시에 이 감옥에는 사형수나 중 형수들만 수감되었고 한번 수감된 자들은 살아서 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 죽기 전에 단 한 번 마지막으로 이 다리를 넘으며 다리에 뚫려 있는 대리석 창문을 통하여 바다를 보고 탄식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옥중기(Le mie prigioni)를 쓴 유명한 실비오 펠리코(Silvio Pellico)와 플레이 보이의 대명사 카사노바(Casanova)가 이곳에 갇혔었다.

* 곤돌라 (Gondola)
베네치아(Venezia)의 명물 중에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곤돌라(Gondola)이다. 악사의 이탈리아 민요와 함께 베네치아(Venezia) 골목을 곤돌라(Gondola)로 도는 정취는 영화의 한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곤돌라(Gondola)의 기원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오래 전에 베네치아(Venezia)가 오적의 침입을 받고 도시의 모든 처녀들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에 신부 감을 잃어버린 베네치아(Venezia) 청년들은 공모 끝에 처녀들을 되찾기 위한 계략을 꾸며 작은 배를 만들어 야밤에 소리 없이 기습하여 처녀들을 되찾아 오게 된다. 그들은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축제를 열고 있다.
곤돌라(Gondola)를 보면 모두 검은 색으로 도색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데 중요한 이유가 있다. A.D.6세기에 유럽 전역을 휩쓴 페스트로 온 베네치아(Venezia)는 고통 속에 나날이 늘어가는 시체들을 치워야 했다. 이때 곤돌라(Gondola)를 검은 색으로 칠하여 조의를 표하였는데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까지 내려왔다. 후대에 와서 그들은 감사의 표시로 성모마리아에게 성당을 지어 바쳤다는데 이 성당이 바로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떼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a Salute-17세기)이다. Salute는 이탈리아어로 건강이라는 뜻이다.

* 종탑 (Campanie)
성당 건너편에 위치한 98,6m의 종탑(Campanile)은 화려하게 장식된 성당과는 대조 적으로 무척 간결하다. 10세기에 축조된 이 탑은 1902년 어느 날 밤 무너져 1912년에 다시 옛 모습 그대로를 복원하여 세워 놓은 것이다. 종 탑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 밑에 위치한 유명한 산소비노(Sansovino)가 피해를 면 치 못했는데 이 것은 본래 1540년에 건축된 건물이었다. 복원된 산소비노(Sansovino)에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 태양신 아폴로, 상업의 신 머큐리와 평화의 신들이 전시되어 있는 데 모두 산소비노(Sansovino)의 작품이다. 성모 마리아 상 역시 그의 작품이다. 현재 관광객들에게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전망을 제공하는 종 탑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오를 수 있으며 이곳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베네치아(Venezia)을 한 눈에 관망할 수 있다.

* 시계탑 (Torre dell'Orologio)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에 있는 또다른 명물 중의 하나는 종 탑 반대편에 있는 시계 탑(Torre dell'Orologio)이다. 이 시계탑은 1497년에 세워졌는데 탑 중간에 시계가 있고 탑 꼭대기에 두 무어 인(I due Mori) 동상이 있다. 이 두 무어 인은 매시간 마다 종을 치는 데 순수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움직이도록 하여 놓았다. 그 때부터 오늘까지 장장 500여 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종을 쳐 시간을 알려 온 이 동상은 당시의 기계 기술이 얼마나 뛰어 났는가를 보여 준다. 이 두 무어 인은 오늘도 많은 관광객들의 관심 속에 변함 없이 쇠 망치로 종을 치고 있다.

* 두칼레 궁 (Palazzo Ducale)
베네치아의 권력과 영광을 상징하는 두칼레 궁(Palazzo Ducale)은 베네치아를 다스리던 도제(Doge)들의 거주지로서 정부의 청사이기도 했던 곳이다. 12세기에 건축하여 14, 15세기에 완전 개조했다. 도제(Doge)라는 말은 라틴어의 우두머리라는 뜻을 가진 Dux에서 기원하는데 베네치아를 다스리던 우두머리 10사람을 지칭하던 말이다.
당시에 황금의 책(Libro d'Oro)에 올라있는 297개의 명문가 중에서 10사람의 도제를 뽑아 베네치아의 정치를 전담케 했다. 검은 제복을 입은 이들은 잘 조직된 경찰 망을 이용 권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문서의 문(Porta della Carta)이라 불리 우는 정문은 정부의 포고문이나 칙령을 붙여 시민에게 알리던 곳으로 1443년에 고딕양식으로 세워졌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호화롭게 장식된 내정을 지나 궁전 안으로 들어 가게 되는데 이곳에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가득하다. 베로네제(Veronese)의 에우로파의 약탈(Ratto d'Europa),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8)의 아리안나와 박카스의 결혼(Nozze di Arianna e Bacco), 불카노의 대장간(Fucina di Vulcano), "머큐리"신등과 같은 그림들이 바로 그것인데, 틴토레토(Tintoretto)가 70세에 완성한 낙원(Paradiso) 같은 작품은 특히 유명하다.
이 작품은 폭22m, 높이 7m로서 현존하는 대규모의 그림들 중에 하나이다. 무기 박물관에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갑옷과 방패, 창칼을 비롯하여 화 총, 연발총 등이 전시되어 있고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며 아내에게 채웠던 정조대도 있다. 이밖에 도제들의 대 회의실(50m. x 25 x 12.5), 각 국 사절들을 만나던 접견실, 재판소등은 당시 베네치아의 영광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 리알또 다리 (Ponte di Rialto)
베네치아를 방문하려면 대 운하에 운행되는 증기선(Vaporetto)을 이용하여 중심지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에 이르게 된다. 길이 약 3km에 달하는 대운하를 지나다 보면 많은 다리들을 통과하게 되는 데 운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가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이다. 이 다리는 안토니오 다 뽄테(Antonio da Ponte)가 1588년에 시작해서 1592년에 완성하는 데 당시의 군 선이 드나들기 좋도록 설계하였다고 한다. 야만 족의 침입을 피해 말라모꼬(Malamacco) 사람들이 섬으로 도망할 때 그들을 인도한 것은 십자가를 입에 문 한 마리의 비둘기였다고 한다. 그 비둘기가 머물었던 곳이 바로 이 다리의 부근이었다고 한다. 베네치아가 시작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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