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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성지안내



1. 개요
오스트리아/체코/우크라이나/루마니아/유고 등에 에워싸였으며, 대부분이 저평한 헝가리 분지로, 그 가운데를 다뉴브강과 그 지류인 티사강이 나란히 흐른다. 북부는 구릉성의 산지이고, 서부에는 중앙 유럽 최대의 볼로톤호가 있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을 받으나 대체로 대륙성 기후로 한서의 차가 비교적 크다. 10세기경 통일국가가 형성되고, 이슈트반 1세가 로마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고 헝가리 왕국이 확립되었다. 14~15세기에는 중부 유럽의 강국으로 번영하였으나 1526년 오스만 투르크에 패하여 2세기 동안 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1699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성립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여 영토의 절반을 잃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국 쪽에 가담, 독일과 소련에 점령되었다가 전후에 소련의 세력권에 들어가 1946년 인민공화국이 되었다. 1956년 대학생/ 노동자가 대규모 반소(反蘇)/ 반공의 민족폭동을 일으켰으며, 정부도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와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소련은 이를 진압하고 카다르 정권을 세웠다. 1989년 동구권 최초로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고, 공산당은 자진 해체, 사회주의당으로 변신하였으며, 시장경제 도입 등을 포함한 신강령을 채택하였다. 1990년 비공산 연정(聯政)이 출범하고, 바르샤바조약기구를 탈퇴하고, 동구권 국가로서는 최초로 유럽회의에 가입하였다. 1999년 나토에 가입하였고, 2004년 5월 EU에 가입했다. 우리나라와는 1989년에 공식 수교를 맺었다.
국가명 헝가리 공화국(Republic of Hungary)
수도 부다페스트(170만명)
면적 93,031㎢ - 국경 : 2,242㎞(7개국과 접경)
인구 1,000만명(2003년말 현재)
주요민족 마자르인(96.6%), 독일인(1.6%), 슬로바키아인, 남슬라브인
주요언어 마자르어(헝가리어) - 문맹율 : 2%
종교 가톨릭(67.5%), 개신교(20%), 그리스정교
화폐 Forint(1미불 205포린트, 2004년 7월)
기후
온도/월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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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을 받으나 대체로 대륙성 기후로 한서의 차가 비교적 크다. - 겨울 : 평균 -2℃~12℃ / - 여름 : 평균 23℃~25℃
주요산업 -
전압 -
시차 -
1. 역사
기원전 10세기 마자르족은 조상 대대로 살던 땅 우랄을 출발한 뒤 터키계의 여러 민족과 접촉하다가 895년 카르파티아분지로 침입/정착하였다. 마자르 7부족은 이 땅에 연합국가를 세우고 이중수장제(二重首長制)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차츰 유목/기마생활에서 정주/농경으로 생활양식이 변화하자 씨족적 지배체제도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10세기 말에는 게자와 이스트반 1세 부자에 의해 국가통일이 이루어져 초대왕조인 아르파드왕조가 성립되었다. 동시에 그리스도교도 성장하여 1000년 이스트반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국왕의 칭호를 받았다.

이스트반 지배 아래서는 왕성주제(王城州制)가 실시되었고 봉건적 주종관계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국내에서는 이교반란과 지방 영주들이 등장하였고, 대외적으로도 발칸반도 등을 둘러싸고 로마/비잔틴제국에 대립하여 지배체제가 동요하였다.

12세기 말부터는 왕령지(王領地)의 분해가 진행되어 대호족이 할거하였다. 1222년 대호족에 대항하여 귀족의 여러 가지 특권을 인정하는 금인헌장(金印憲章)이 국왕에 의해 공포되었다. 41년 몽골 침입 후 벨라 4세는 여러 민족의 식민에 의한 국토의 재건을 시도하였고, 또한 13세기 말에는 농민이 이동의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조건은 대호족을 이롭게 만들어 군웅할거시대를 초래하였다. 국토가 영방(領邦)으로 분열되는 것은 소영주/귀족과 국왕과의 동맹으로 모면하였으나 분권화의 경향은 계속되어 대귀족과 중소귀족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14세기 중엽 이후 대외적으로는 세력이 확장되었으나, 국내적으로 대귀족의 강대화가 추진되어 15세기 전반에 이르러 국토의 약 40%를 60여 대귀족이 차지하게 되었다. 1458년 마티아스 1세가 중/소 귀족의 지지를 얻어 국왕이 되자 대귀족을 억누르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어 중부유럽에 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국내는 또다시 혼란해졌으며 1514년 대(對)오스만 십자군 모병을 계기로 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에 패한 농민은 이동의 자유를 빼앗겼고 부역을 강요당하였다. 혼란 속에 약체화된 헝가리군은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제국군에게 패한 뒤 17세기 말까지 중앙헝가리는 오스만제국의 점령 아래 있었고 헝가리 서부는 합스부르크가의 세력 아래 들어갔다.

한편 동부의 트란실바니아는 오스만제국의 보호 아래 있으면서도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30년 전쟁에서는 트란실바니아공 베틀렌이 이끄는 군대가 대합스부르크 동부전선을 형성하였다. 또한 18세기 초에는 라코치 피렌체 2세가 대합스부르크독립전쟁을 지휘하였다. 종교적으로도 트란실바니아는 신교의 요새로 존속하였다.

독립전쟁에서 패배한 뒤 헝가리는 합스부르크가의 세습왕제를 인정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까지 지배를 받으며 독일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발전하여 18세기말 농민은 다시 이동의 자유를 얻었다. 19세기에 나폴레옹 전쟁과 서유럽에서의 여러 개혁의 영향으로 중류귀족의 지지를 받은 혁명가 L. 코슈트의 지도로 1848년 민족독립을 목표로 한 혁명이 일어나 농노해방을 실현시켰다. 혁명이 진압되고 합스부르크 절대주의가 부활되었으나 1867년 안팎으로 위기에 빠진 오스트리아와의 사이에 아우스글라이히(和協)가 성립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왕국이 탄생하였다. 이 체제 속에서 헝가리는 경제적인 번영을 이룩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말 이중왕국 붕괴와 함께 혁명이 발생하여 1918년 11월 공산당이 창건되었고, M. 호르티 데 노지바냐에 의한 권위주의적 지배체제가 들어섰다. 호르티 데 노지바냐 체제에서는 경제가 침체되었고 몰락 중류귀족층이 기반이 되어 파시즘화가 진행되었다. 외교정책에서도 친이탈리아/친독일파가 우위를 차지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주축국 쪽에 참전하였다.

전쟁 후 소련군의 점령 하에서 1948년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합동하여 공장 등의 국유화를 이루었으며, 농업의 집단화도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되었다. 그 뒤 헝가리사건 등 1950년대 정치적 변동과 1960년대 말 이래의 여러 차례에 걸친 경제개혁을 거쳐 안정된 사회발전의 길을 걸었다. 동구권 가운데 가장 활발한 개혁을 추진해온 헝가리는 1989년 1월 동구권 최초로 복수정당제를 도입하고, 1989년 10월 공산당을 공식 해체, 사회당(HSP)으로 변신해 다당제/시장경제 도입 등을 포함한 신강령을 채택했으며, 국명도 인민공화국에서 공화국으로 바꿨다.
2. 주요 순례지
부다페스트 (Budapest)
`가리 수도. 면적 525㎢. 인구 182만 1552(2000). 중북부의 헝가리분지에 있으며, 다뉴브강이 시내를 가로질러서 흐른다.
다뉴브강은 유럽 중·동부 최대의 국제하천이며 항공로의 발달로 그 가치가 떨어졌다고 하지만 지금도 중요한 교역 교통로의 하나이다.
중부 유럽 최대의 도시로서 헝가리의 정치·문화·산업·교통의 중심지이다. 이 나라 전인구의 약 20%가 집중되어 있다. 지금의 부다페스트는 하나의 행정단위로서 통합되어 있으나, 다뉴브강 오른쪽 연안인 부다지구(地區)와 왼쪽 연안인 페스트지구는 오랜 동안 서로가 독립된 쌍둥이도시로 발전해 왔다.

부다는 역사가 오래되어 고대 로마제국 때에 이미 성채가 축조되었다. 이에 반해 페스트는 다뉴브강의 범람원이었던 저평지(低平地)로서 홍수 등의 수해를 입어 개발이 늦어졌다. 한편 부다에는 산이 많아 토지이용의 여지가 없고 동서남북의 교통의 요지라는 점 때문에 상업도시로서 급격히 발전했다. 1873년 두 도시는 합병에 조인하고, 도시 이름을 부다페스트라고 하였다.
오부다는 강 연안 가까이까지 산이 바싹 닿아 있고, 기복이 심한 도시로서, 바르헤지 성산(城山)이라고 불리는 언덕에는 형가리 왕조의 왕궁과 마티아시 성당 등 역사적 건물이 많이 있다. 한편, 페스트에는 국회의사당·과학아카데미·국립박물관·국립오페라극장·페스트콘서트홀 등 현대적 정치·과학·문학·예술의 중추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부다페스트는 헝가리 최대의 공업도시로서, 전국 공업생산의 약 50%, 공업종사자수의 약 26%를 차지한다. 이 도시의 중요한 공업지역은 남부의 체펠과 북쪽 근교에 새로 개발된 위페스트이다.
체펠은 다뉴브강 가운데 있는 섬에 건설된 공업지역으로서 공업용수를 얻는 데 알맞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제품은 철도·선박·버스 등의 수송기계, 전기기계·공작기계 등 기계공업의 제품인데, 그 중에서도 간츠 마바크 회사의 전기기관차, 이카루스 회사의 버스는 외국에도 수출되고 있다.

(부다페스트 약사)
부다는 타타르(Tatar;몽골)의 습격을 받은 후인 13세기 중엽에 벨라 4세가 이곳에 왕궁을 지음으로써 그 발전의 기초를 닦았으며, 그 후 일관해서 국가의 군사적·정치적 요지였다. 부다는 로마 제국령 파노니아 시대에는 아퀸쿰(Aquincum)으로 불렸으며, 또한 헝가리왕가인 아르파드가의 연고지이기도 했다.
한편 페스트의 도시적 기초는 11세기에 불가르족이 구축했다. 페스트는 부다와 함께 왕국특권도시로 번영했으며, 특히 요제프 2세 시대(1765~90) 이후에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 19세기 전반의 개혁기에는 자유주의파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이 개혁기에 부다와 페스트가 다리로 이어졌으며, 1849년 민족독립을 목표로 한 혁명 중 한때 합병이 이루어졌으나, 혁명실패 후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부다페스트는 중부유럽의 요지였으므로 예로부터 다른 민족의 점령 대상지, 또는 망명처가 되기도 했다. 특히 부다 지구의 민족구성은 다양한데, 오늘날에도 터키계 주민지역 등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부다성
부다페스트 상징 1호인 이곳은 웅장하며 우람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왕궁과 어부의 요새, 마티아스 성당은 누구나 발길을 향하게 만들고 밤에 보는 경관은 세체니 다리, 국회 의사당과 더불어 단연 유럽에서 최고라 할 수 있다. [ 역사 ]
13세기까지 이곳은 중요한 주거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1241-2년 몽고가 침입한 이후, 이전 수도 ‘에스테르곰’에서 피신해온 ‘벨라 4세’가 이곳 언덕에 성을 쌓았고 사람들이 몰려와서 살게 되었다. 이 곳이 영구적인 왕실이 된 것인 룩셈브르그 가문의 왕 ‘지기시문트’ 기간(14세기 말-15세기 초)에 만든 새로운 왕궁이 만들어지면서였다.
15세기에 마티아스는 고딕양식의 건물을 넓혔고 르네상스양식을 가미시켰다. 이런 인간적인 왕궁은 크게 발전하여, 중부유럽에서 가장 대표적인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헝가리는 황금기를 맞이했다.
마티아스 왕이 죽은 뒤 국가가 쇠퇴하게 되었다. 1541년 터키가 헝가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성당은 모스크로 변했으며 부자들 대부분은 쫓겨났고, 집들은 폐허가 되었다.
1686년 교황 ‘이너센트 11세’가 지원하는 기독교 연합군이 이곳을 다시 차지하였다. 터키를 물리친 것을 유럽에 알렸고 그 기념으로 모든 기독교 국가가 축제를 벌였다. 그러나 터키의 오랜 지배로 성은 폐허가 되었다. 마티아스 시절 8,000명이 성에 거주했었지만 터키 이후 600명으로 줄어들었다. 그 다음 세기에 재건을 하기 시작했다. 고딕 스타일이었던 거주지들을 바로크 스타일로 만들었다. 이런 흔적들은 지금 많이 볼 수 있는데, 고딕 스타일의 문 위에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올려진 건물들이다.
1703년 부다는 왕이 없는 도시가 되었으며 ‘합스부르크??가 비엔나에서 이곳을 유지해 나갔다. 반면에 헝가리의 중요한 기관들은 ??브라티슬라바??(현 슬로바키아 수도)에 있었다.
1848-49년 독립전쟁으로 왕궁을 헝가리 인들이 차지하였으나 곧바로 오스트리아 군대가 다시 차지하였다. 많은 건물들이 큰 손상을 입었다. 지난 시기에 지어진 왕궁의 일부는 불에 탔다. 1873년 부다, 오부다, 페스트 지역이 통합되면서 부다성은 다시 한번 번성하게 되었다. 새 왕궁과 정부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마티아스 교회도 재건축하고, 왕궁도 넓혔다.
2차 대전 때인 1944-45년 겨울은 이전보다 많은 파괴가 있었다. 러시아의 붉은 군대에게 독일이 패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격전을 벌였다. 전쟁이 끝났을 때 성에 사람이 사는 집은 없었다. 그 뒤 40년 동안 뼈아픈 재건이 있었으며 현재 대부분의 건물은 문화재가 되었다.

[ 어부의 요새 ]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완성된 신 고딕양식의 어부의 요새는 마티아스 성당 재건 일환으로 만들어 졌다. 전해져 오는 것에 따르면 이곳 중세 방어벽은 어부 협동조합이 방어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성벽의 이름은 근처에 어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오늘날 이곳의 기능은 장식적인 기능과 다뉴브강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 되었다. 이곳의 경관과 자연미와 건축미는 압권이다. 특히 동양적인 색깔이 짙은 고깔모자 모양의 첨탑들은 헝가리 조상들이 아시아 유목민들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곳에선 국회의사당, 체인 브리지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페스트지역의 다양한 모습과 부다 지역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1988년 이곳에서 보이는 부다페스트의 전체 모습은 유네스코가 제정하는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어부의 요새에서 경관을 보는 것도 좋지만 어부의 요새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 역시 좋다.

[ 부다 구 시청건물 ]
건물지붕에 시계탑이 있는 것이 구 시청 건물은 이태리 건축가가 만들었다.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었었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알 수가 없다. 2차 대전 때 폭격을 당해서 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곳은 부다, 오부다, 페스트가 합쳐진 1873년까지 부다 지역의 시청사였다.
시청 모퉁이에 지혜의 여신 아테네는 여러 도시의 수호성인이다. 이 여신 방패엔 헝가리 문장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왼손에 창을 들고 있다. 이것은 현재 모조품이며 진짜는 근처에 세워 졌었는데 지금은 페스트 지역에 있는 부다페스트 시의회 남문에 있다.
그런데 창이 손상되거나 심지어 누군가 훔쳐 가기도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조각상이 유명하게 되었는데 바로 헝가리 TV에 고용된 한 젊은 사람 때문이다.
그는 1980년 TV 프로그램 주제를 조각과 잃어버린 창에 대해서 만들어서 쇠퇴해 가는 건축문화재에 대해 방영했다. 그 뒤 그는 정기적으로 같은 주재를 시리즈로 만들어 방영함으로써 문화재 보호운동을 일으켰다. 이 아테네 조각이 운동의 주역이다.

[ 구 재무성 건물 ]
분리파 건축가가 만들었던 1904년의 화려한 외관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2차 대전 이후 건물의 모습은 완전히 단순하게 남게 되었다. 1956년 이 건물은 공대 학생 기숙사로 사용했으며 10월 23일 혁명의 주요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여러 문화 연구소와 사무소 그리고 작은 호텔이 있다.

[ Matthias 마티아스 성당 ]
1015년 이슈트반(스테판) 왕은 결혼을 위해 이곳에 작은 성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몽고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 지금의 성당은 몽고 침입 후 "벨라 4세"(크라코프 인근 소금광산의 수호신 '킹가'공주의 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졌다. 처음에 바실카 양식으로 프랑스 북부 고딕 양식과는 비교가 된다.
14세기에 룩셈부르크의 지기시문트 왕이 고딕양식으로 다시 만들었고, 그 뒤 국가 중요행사에 사용되었으며, 마티아스 왕의 두 번의 결혼식을 여기에서 했다.
1526년 터키가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를 이기자 성당의 보물들을 지금의 브라티슬라바(현 슬로바키아 수도)로 옮겼다. 그리고 터키는 1541년에 부다를 차지했고, 이 성당을 도시에서 중심이 되는 모스크로 만들었다.
중세의 장식은 사라지고 벽면은 모스크 장식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주 제단 위에 있던 두 개의 큰 샹들리에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갔으며 지금도 성 소피아 성당에 걸려 있다.
1686년 터키로부터 부다를 되찾았다. 교회 내부도 바로크 스타일로 변했다. 19세기 후반엔 교회가 예전의 명성을 되찾는 듯 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시절 프란츠 요셉 황제는 이곳에서 성대한 헝가리 왕 대관식을 거행했다.
당시 리스트가 대관식을 위한 음악을 특별히 작곡을 했는데, 이곳 성당에서 대관 미사곡으로 사용했다. 2차 대전 때 심하게 손상되었으나 1970년 88m 첨탑과 더불어 완전히 복구되었다.

[ 부다 왕궁 ]
부다 언덕에 처음 왕궁을 만들었던 사람은 벨라 4세로 몽고 침입 이후에 에스테르곰에서 이곳으로 피난을 온 후에 방어적인 기능을 잘 갖출 수 있는 높은 지역에 만들었다.
지금은 당시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다. 14세기에 여러 왕들이 새로운 왕궁을 만들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룩셈부르크의 지기시문트 때에 고딕형태로 왕궁을 넓혔다. 그리고 성벽도 쌓았다.
마티아스 왕 시절(1458-90년)엔 부다 지역과 왕궁이 황금기였다. 그는 고딕양식의 건물들을 르네상스 스타일로 변형했고 새로운 건물들도 가미했다. 궁전은 중부유럽의 문화, 예술,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거대한 도서관을 만들면서 학자들과 문필가들이 모여들었다.
오스만 제국시절 왕궁은 피해를 입었으며 도서와 궁전 내부의 물건들도 분실되었고, 1686년 기독교 연합국이 3개월간 포위했을 때도 왕궁은 많은 손상을 입었다. 그렇지만 부다에서 터키를 물러가게 만들어다. 그 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헝가리를 다스렸다.
18세기 중엽, 마리아 테레지아는 203개의 방을 가진 큰 왕궁을 건설했다. 그 후 이곳은 오스트리아 왕실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186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 형성되었을 때 이곳에 지금의 세체니 도서관 건물을 설계했고 1893년에 완성했다. 그리고 돔을 올렸으며 지금과 같은 대칭형 건물은 1905년에 완성 한 것이다. 그러나 1944-45년 2차 세계대전 때 공습으로 완전히 불에 탔으나 1980년대 복구했다. 1950년대 복구하는 동안 묻혀 있었던 중세 왕궁 터가 드러나기도 했다.
현재 왕궁은 국립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헝가리 출신 화가들이 그린 역사적인 장면을 묘사한 작품들과 헝가리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들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 사보이의 왕자 오이겐(1663-1736) 동상
1697년 젠타 (지금은 세르비아에 있음) 전투에서 오이겐 왕자가 터키와의 전쟁에 승리해서 200년간 터키의 폭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젠타 사람들은 기념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동상 건립을 위해서 복권을 발행하여 돈을 모았다. 동상제작은 1년 안에 완성되었지만 돈이 모자랐다. 그래서 이 조각 기획자가 프란츠 요셉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자 황제는 동상을 구입했고 부다 성에 세울 것을 명했다. 동상 밑에는 1697년 전쟁을 보여주는 모습이 있고 이 동상을 조각한 Rona는 “이 동상이 새워진 곳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다??라고 썼다.
부다 성에서 보는 페스트 지역은 다 훌륭하지만 이 곳 역시 뛰어난 경관을 가진 곳으로 국회의사당과 체인 브리지 마가레트 섬 등을 감상하기에 좋다.

* 성 이슈트반 대성당
약 4,000m2 넓이를 차지하며 높이는 국회의사당과 같은 96m이다. 건물의 특징은 내부 기둥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하게 만들어져 있다. 기둥이 지탱하는 아치가 너무 많아서 생긴 결과다.
맨 처음 이 성당이 있는 지역 이름은 '합스브륵의 레오폴드2세'로 정했다. 시작은 교구성당으로 하고 오스트리아 성인 성 레오폴드에게 헌정 할 계획으로 1851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축가 ??요제프 힐드??가 만들기 시작했는데 1867년에 힐드가 죽자 미클로스 이블(Miklos Ybl)은 신 르네상스 요소를 가미시켰다. 그런데 1868년 폭풍으로 천장 돔이 무너져 앉는 사건이 발생하자 건물을 허물고 다시 새로운 방법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 도 중 1891년 건축가 이블이 자살을 했다. 그 후 세 번째 건축가 Jozsef Kauser가 내부를 완성했다. 성당은 1905년 헝가리 초대 기독교 왕이자 성인인 슈테판에게 헌정되었다. 내부의 주 제단엔 슈테판 성인이 서있는 동상이 보인다. 그리고 내부 둘레는 대부분 헝가리의 성인들을 그려 놓았거나 조각상을 세워 놓았다.
주 제단의 뒤쪽에 가면 슈테판(스테파노) 성인의 손이라고 알려진 ‘신성한 오른손 경당’이 있다. 그곳에서 100ft(포린트)를 동전 넣는 구멍 속에 넣으며 약 1분간 불이 켜지면서 손목부분에서 잘린 신성한 오른손이 금으로 감싸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헝가리 인들은 이 신성한 손에 대해 각별한 애정이 있다. 그리고 이 손으로 인해서 공산정권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처음 대규모 행사는 1083년 8월 20일 슈테판 왕이 기일에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의식 속에 이 신성한 오른 손을 들고 행렬을 이룬 것이다.
공산정권이 바뀌기 전 해인 1988년 8월 20일 슈테판 서거 950년을 기념하여 성당 앞 광장에 50,000명이 운집해서 야외 미사를 드렸다. 당시 광장에 헝가리 국기와 교황의 기가 가득 했다. 그리고 미사는 그 해 내내 헝가리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 절정을 이루었다. 그 것은 수십 년 만에 처음 있는 대규모 행사였다. 그런 뒤 헝가리는 정권을 교체하고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현재 8월20일을 최고의 국가 공휴일이며 가장 큰 잔치가 부다페스트에서 벌어지는 날이다. 각종 기념행사와 엄청난 불꽃놀이가 겔레르트 언덕에서 행하며 거리 곳곳 골목에선 마치 크리스마스 시장을 보는 듯하다.

* 겔레르트 언덕
다뉴브 강변 위에 형성된 우람한 돌산은 강에서 약 230m 솟아있다.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따라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버스 27번을 타면 쉽게 올라 갈 수 있다. 여러 세기 동안 와인을 재배했었으나 19세기에 포도나무 뿌리 진딧물이 만연한 이후로 더 이상 포도를 재배하지 않고 있다. 언덕 바로 밑에서 뜨거운 온천수가 여러 군데서 솟아 나와 3군데 온천을 열었다. (겔레르트, 루다스, 레크) 19세기에 이 언덕은 레크리에이션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서쪽에선 월요일마다 시장이 열렸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언덕 지하에 1970년대에 만든 물 저장소가 있는데 80만 리터의 물이 저장되어 있다. 부다페스트에는 하루 약 80만 리터의 온천이 솟아 나온다.

* 해방기념 동상
14m 높이의 여자 동상은 승리의 월계수 입을 들고 서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1945년 소련에 의해 독일로부터 해방된 것을 상징한다.
페스트 지역은 1945년 1월 18일에 해방되었고 부다 지역은 독일군의 저항 때문에 2월 13일에 해방되었다. 독일 연합이 4월 4일 헝가리 영토를 완전히 빠져나간 이 날을 1990년까지 국경일로 축하를 했다.
동상 발 밑 양옆에 있는 기념물은 전진과 재건을 상징한다. 1989-1990년 정권이 교체되면서 이 기념물을 제거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리고 1944-45년을 해방으로 할 것인가 소련의 점령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현재 이 기념물은 “자유의 동상"으로 이름을 바꿨다.

* Citadella 치타델라 요새
이 요새는 1851년 헝가리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오스트리아에서 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건축가는 헝가리인 이었지만, 1897년 두꺼운 성벽 일부가 붕괴되면서 요새는 더 이상 군사적으로 사용 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식당, cafe 호텔이 있다. 높고 사방을 볼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어부의 요새 보다 각광 받는 곳이다.

* 비가도 광장
비가도 극장 건물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찌 거리가 시작되는 뵈뢰스마르티(Vorosmarty) 광장에서 강변 쪽으로 한 블럭 떨어져 있으며, 인터콘티넨탈 호텔과 메리어트 호텔 사이에 강을 낀 곳으로 해가 질 무렵 꼭 나가냐 되는 곳이다. 카페나 노천 식당에서 식사 또는 맥주를 하면서 야경을 감상 할 수 있는 부다페스트 최고의 명소다.
특히 이곳은 강변을 따라 보행자 전용 길이 있을 뿐 아니라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유용한 교통수단인 트램 2번이 페스트쪽 강변을 따라 지나 다니는 곳이다.
부다 쪽을 보면 좌측에 겔레르트 언덕과 엘리자베스 다리가 보이고, 정면에서 약간 우측에 부다왕궁의 우람한 보습과 체인다리, 어부의 요새까지 한 눈에 감상 할 수 있다.
비가도 콘서어트 홀은 1865년 개장한 헝가리의 낭만적인 건축물 중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건물이 완성된 뒤 리스트, 바그너, 브라암스, 리차드 스트라우스 , 바르토크, 코다이 등이 와서 축하 공연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 영웅광장
파리의 상젤리제 거리와 같은 안드라시 거리 끝에 자리 잡은 이곳은 중앙의 기둥과 여러 동상들과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곳이다. 그리고 광장 좌측과 우측엔 고전적인 스타일의 예술궁전과 순수 미술 박물관 이 자리 잡고 있다. 영웅광장 뒤엔 시민들의 휴식처인 시립공원이 있다. 헝가리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에 독일과 소련이 헝가리에 왔을 때 이곳을 가장 먼저 들어 왔다. 그래야 비로소 헝가리를 정복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Gloriette : 1747년 정원 끝 언덕에 세운 그리스 신전 양식의 건축물로 이 속에서 내려다 보이는 시내 전망이 일품이다.
[ 천년 기념 조형 ]
동상과 조각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있는 이것을 천년기념 조형이라 부른다. 896년 헝가리 마자르 족이 이곳 판나노니아 평원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해서 1896년 만들기 시작, 1929년에 완성한 것들이다.
광장 중앙에 대천사 미카엘이 36m 기둥 위에 서있다. 그리고 그 밑 부분엔 마자르 6개 부족의 말탄 동상과 부족들의 수장이었던 아르파트(Arpad) 동상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마자르 족장들을 표현한 동상은 사실과 다르다. 마자르인들이 타고 있는 말들은 실제로 작았지만 크게 과장되어 있다. 지구 위에 서있는 모습을 한 천사장 미카엘의 오른손엔 헝가리 왕관을 왼손엔 로마 교황의 십자가를 들고 있다. 이것은 헝가리 왕국과 기독교 문화의 동일성을 상징한다. 전설에 의하면 헝가리 초대 기독교 왕이 된 슈테판의 꿈에 대천사 미카엘이 나타나서 당시 이교도였던 마자르 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이 동상을 애칭으로 "청동천사"라 부른다.

이 기둥에 관해서 특이한 일화가 있다. 제작하기 앞서 부디친 문제는 과연 마자르족이 언제 이 지역을 정복한 것으로 기록하고, 기념할 것인가였다. 과학 아카데미에선 888-900년 사이에 헝가리인들이 들어온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정부는 잠정적으로 1895년을 천년 기념 해로 정했다. 그러나 조형물들을 완성하는 시기가 예상보다 늦어졌다. 그래서 1896년을 천 년이 되는 해로 확정했고 조형물들은 1897년에 완성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완성될 무렵 폭풍으로 인해서 작품들이 손상을 입자 다시 조형물들을 만들기 시작하여 결국 1901년이 되어서야 설치 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동상들을 1900년 파리 국제 박람회에 출품을 했고 거기에서 대상을 받았다.
기둥 앞쪽엔 무명용사의 기념비가 있다. 거기엔 “우리 국민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희생한 영웅들을 기념하노라” 라고 써있다.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헝가리를 방문하면 반드시 방문하는 곳으로 우리나라 대통령들도 다녀갔다.
기둥 뒤에는 두 부분으로 된 조형물이 있다. 그 꼭대기에 있는 4개의 동상들은 좌측으로부터 일과 부, 전쟁, 평화, 지식과 명예를 상징한다. 기둥들 사이엔 헝가리 왕과 왕자들 14명의 동상들이 있다. 역사학자의 조언에 따라 선정된 인물들이다. 각각의 동상 밑엔 당시 인물들의 했던 업적을 나타낸 부조물이 있다. 예를 들어 헝가리 최초 기독교 왕인 이슈트반은 왕관을 받는 모습이고, 르네상스를 만든 왕인 마티아스는 학자들 주변에 둘러 쌓여 있다.

[ 세체니 다리 ]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다리로 1949년에 완성되었다. 지금은 이 도시의 상징 중 하나로 왕궁과 함께 인상적인 경관을 연출한다.
이 다리는 19세기 위대한 헝가리인 '이슈트반 세체니' 백작의 아이디어다. 1820년 세체니는 배로 강을 건너서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해야 되는데 날씨가 아주 나빠서 8일간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그는 영국인에게 설계하게 하고 스코틀랜드사람 '클라크 아담'에게 다리를 건설하게 했다. 당시 이 다리는 경제와 사회 발전의 상징으로 세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1849년 5월 다리가 완성되기 전인 헝가리 독립전쟁 동안 오스트리아는 이 다리를 제거할 계획을 했었다. 그러나 클라크 아담은 이 계획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마침내 1849년 11월 20일 완성했으며 380m 길이의 현수교로는 당시 가장 규모가 큰 것에 속했다. 완성된 초기에 다리를 건너는 모든 사람에게 이용료를 징수하기도 했지만 1918년에 무료로 다닐 수 있게 했다.
1914-1918년 1차 대전 동안 다리를 다시 만들었으며 그때까지 ‘세체니 체인 다리??라 불렀다. 그 뒤에 1945년 1월 독일군 폭격으로 다리가 폭파되었다가 건설 100년이 된 1949년 11월 21일 다시 개통을 했다. 전설에 의하면 다리 난간에 있는 두 개의 사자 입 속에 혀가 없기 때문에 조각가가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입 속에 혀가 있다. 사자는 도시의 두 부분을 결속력을 상징한다.
에스테르곰 (Esztergom)
헝가리 북서부에 코마롬주에 있는 도시. 인구 3만 3,000명(1987). 부다페스트에서 66km떨어진 이곳은 헝가리 초기 수도이다. 1,000년이 넘는 로마 가톨릭 대교구이다. 헝가리 최초의 기독교 왕이 되어 기독교를 전파시킨 스테판(이슈트반)왕이 975년에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10세기부터 13세기 초까지 헝가리 왕궁이 있었다. 다뉴브 강 건너편에 있는 슬로바키아 도시 스트로보는 페리를 이용해서 건널 수 있다. 성 언덕은 1세기 로마인들이 정착했었으며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2세기 중반에 병영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1241년 몽고군이 침략 후 벨라 4세가 수도를 부다로 옮기면서 정치적인 중요성이 없어졌다. 그 후 이곳은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 남게 되었다.
* 에스테르곰 대성당
1543년에 투르크 군에 의해서 도시가 점령당하면서 교회가 파괴당하고 주교는 슬로바키아로 피신을 갔다. 파괴된 자리에 1822년 72m 높이의 신고전주의 양식(신 바로크양식)의 건축물을 만들었다. 1856년에 축성되었고, 당시 FRANZ LISZT가 MASS곡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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