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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성지안내



1. 개요
유럽 중북부에 있는 나라. 알프스산맥 외곽 능선에서 중위산지 북독일 저지를 가로질러 펼쳐져 있다. 동쪽으로는 폴란드/체크/슬로바키아, 서쪽으로는 프랑스/베네룩스 3국, 남쪽으로는 오스트리아/스위스, 북쪽으로는 북해/덴마크/발트해와 접하고 있다.

독일 국명은 11세기에 ‘diutschlant’라는 말이 나타났으며, 현재의 도이칠란트(Deutschland)라는 말이 쓰이게 된 것은 15세기 이후부터. 독일은 국가통일이 늦어 도이칠란트라는 지명 위에 국가가 성립된 것은 1871년이다

독일사회의 다양성은 수많은 방언의 분포에서 뿐 아니라 문화/경제의 다중심성(多中心性)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지방도시에도 대학/오페라하우스/교회 등의 문화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대도시에 집중되는 일도 없다. 이것은 독일이 18세기에는 300여 개, 19세기 전반기에도 39개의 독립주권국가군으로 분열되어 각각 자국의 문화적/경제적 발전에 노력한 결과이다. 독일사회의 다양성은 산업의 발전에서도 볼 수 있다. 엘베강 동부에는 봉건귀족의 혈통을 잇는 융커라는 농업기업가들이 존속했는데, 그들은 정치/사회에서도 큰 영향을 끼치며 권위주의적 풍조를 심었다. 한편 라인/베스트팔렌을 중심으로 공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19세기 말에는 프랑스를 앞지르고 영국에 맞설 정도가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의 발자취는 독일사회의 한편에는 권위지향적인 경향을, 다른 한편에는 근대적/합리주의적인 경향을 낳아 독특한 국민성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국민성을 역사적으로 고정된 것으로서 파악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그 일정한 특질을 지적하면,
첫째 권위/질서지향적이다.
둘째 검소하면서도 합리주의적이어서 집이나 가구는 튼튼하고 호화롭고 값비싼 것을 선호하지만 쓰고 버리는 식의 성향은 없다.
셋째 노동과 휴식이 시간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양자의 혼동을 볼 수 없다. 이것은 독일 장인(匠人)의 손으로 만들어진 정교하고 튼튼한 독일제품으로 상징된다. 한편 휴식 때에는 휴식과 함께 가족생활을 누리는 견실한 생활양식을 보이고 있다.
넷째 꼼꼼하고 이치를 밝히는 기질이 있으며 깔끔한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일정표에 따르는 생활리듬, 고집스러울 정도의 자기주장, 논쟁을 좋아한다는 점, 정연한 거리와 반들반들하게 닦은 유리창과 깨끗한 부엌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독일인의 기질은 그들의 엄격한 성향을 대변하는 것이다.
한편 독일인은 음악을 사랑하는 민족이기도 하다. “독일에는 명곡(名曲)은 있으나 명화(名畵)는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독일인은 음악을 애호한다. 그것은 맥주집에서의 합창이나 교회의 수준 높은 서민합창단으로도 알 수 있다. 질서와 권위, 근면과 검소, 견실과 청결, 그리고 강한 자기주장과 함께 넘치는 음악성, 이 말들 속에서 독일인의 국민성을 엿볼 수 있다.
국가명 독일연방공화국 (Bundesrepublik Deutschland /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수도 베를린(Berlin, 약 350만명)
면적 356,910㎢ (한반도의 1.6배)
인구 약 8200만명(구서독지역 : 6600만, 구동독지역 : 1600만)
주요민족 게르만족
주요언어 독일어
종교 개신교(38%), 가톨릭(34%), 기타(28%)
화폐 유로(EURO)
기후
(카이로 중심)
온도/월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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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화, 다습(년평균 기온 9℃)
독일은 북위 47~55˚의 고위도에 있으며 동아시아 사할린의 위도와 거의 같다. 그러나 대서양을 흐르는 난류, 멕시코만류와 그 대서양에서 1년 내내 불어오는 편서풍 때문에 기후는 비교적 온화하다.
북독일 저지 서부의 쾰른/뒤셀도르프/브레멘 등에서는 가장 추운 1월에도 평균기온이 1~2℃이다. 또한 여름에는 고위도이기 때문에 그다지 덥지 않으며, 7월에도 평균 17~18℃이다. 연강수량은 600~800㎜로 1년 내내 조금씩 비가 내린다. 태풍에 의한 폭풍우라든지 온대저기압에 의한 집중호우는 없으며,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일도 거의 없다.
동쪽 및 남쪽으로 갈수록 기후는 해양성에서 대륙성으로 조금씩 변화하여 겨울에는 약간 추워진다. 예컨대 동부의 베를린은 1월 평균기온이 -0.2℃, 남부의 뮌헨은 해발고도 500m 고원에 위치하므로 -1.7℃ 정도가 된다. 그리고 강수량은 적어져 동부독일의 평야에서는 연 약 600㎜ 이하가 되는데, 중위산지의 높은 부분과 알프스에서는 지형성 강우 때문에 강수량이 많다.
남서독일의 라인지구대는 독일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어서 ‘독일의 온실’이라 하며, 포도와 과실의 재배가 활발하다. 독일에서는 사과나무의 개화가 봄이 왔다는 상징이 되는데, 라인지구대에서는 보통 4월 28일 안에 꽃이 핀다. 여기서부터 북쪽 또는 동쪽을 향하여 사과의 개화전선(開花前線)이 나아가, 뒤셀도르프에서는 4월 29일~5월 5일, 베를린/뮌헨에서는 5월 6일~12일이 개화일이다. 알프스의 북쪽 기슭에는 초봄에 흔히 푄이라는 따뜻하고 건조한 남풍이 불기도 한다.
주요산업 -
전압 -
시차 -
1. 역사
독일역사에서 「고대」는 선사시대를 포함 한 오랜 시대에 걸쳐 게르만이 형성되고,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세력이 확대되어 고대로마 세계와 접촉하기에 이르고, 기원 전후에서 비로소 역사시대로 들어간다. 민족대이동에 이어 서유럽에 프랑크왕국이 형성되었고 그 확대와 분열과정에서 독일은 봉건화를 진행시켜 신성로마제국으로 상징되는 「중세」봉건사회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 제국에는 게르만 부족국가 연합체로서의 성격이 남아 있었고, 그 국가간 대립에 로마 교황권까지 개입하여 황제와 교황의 성직 서임권(敍任權) 투쟁으로 이어졌으며 교황권이 우위를 지키는 가운데 제 1차 십자군원정이 선언되었다.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토지개간이 절정에 달한 13세기 후반에 황제권이 실추하고 제후의 자립화에 따른 정치적 분열 및 외국으로부터의 간섭에 의해 봉건적 위기를 맞이했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을 근대의 시초로 보며, 반(反)종교개혁과 봉건적 반동의 전개에서 독일의 특징적인 계몽전제주의의 붕괴까지를 「근세」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반동체제와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지체는 이윽고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근대」를 맞이한다. 그 뒤 K.W. 메테르니히의 반동체제 아래에서 부르주아가 대두하여 3월 혁명을 맞이했지만 독일에서는 반혁명 측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 체제 하에서 산업혁명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18세기 후반 이래 주도권을 잡은 프로이센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반동적/군국주의적 독일제국을 성립시켜 전형적인 제국주의국가를 형성했으나, 결국 제1차 세계대전으로 붕괴되었다.

독일역사에서 「현대」는 러시아혁명, 베르사유조약의 수락과 바이마르공화국의 성립에서 비롯되는데 가장 민주적인 헌법체제임에도 불구하고 나치스의 권력지배를 저지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얄타체제에 의하여 동/서로 분열되었으나, 1970년대 W. 브란트의 동방정책 『한 민족, 두 국가』가 정착되어 동/서 독일 양 체제의 인정을 전제로 한 자유왕래와 경제교류가 이루어졌다. 80년대 후반 동유럽개방의 물결 속에서 89년 11월, 28년간 지속되던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90년 10월 3일 통일독일을 이루었다.
2. 주요 순례지
뮌헨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 주(州)의 주도. 면적 310㎢. 인구 117만 100(2001). 남알프스 산지와 북쪽 도나우강 사이의 고원지대 중앙에 위치하며 알프스산맥에서 발원한 이자르강이 시를 관류한다. 베를린·함부르크에 이어 독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지명은 취락의 기초를 만든 수도사를 의미하는 Monchen에서 유래한다. 19세기 이후 루트비히 1세의 치세와 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남독일 제1의 도시로 성장했다. 기후는 서유럽 해양성기후와 동유럽 대륙성기후의 중간형이며 연평균기온 7.9℃, 연강수량 910㎜이다.
8세기에 수도사에 의해 개척되었고 12세기 벨프가(家) 최후의 바이에른대공(大公)인 하인리히 사자공(獅子公)이 이곳에 시장을 옮겨 화폐주조권, 관세(특히 鹽稅) 징수권을 얻은 이후 도시가 형성되고, 사자공의 뒤를 이어 1918년 11월까지 바이에른을 지배하는 비텔스바흐가(家)의 거성지(居城地)가 되었다. 16세기 이후 바이에른공국의 수도로서, 상업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는 가톨릭교회, 특히 예수회의 거점이 되었으며, 17세기 30년전쟁에서는 스웨덴국왕인 구스타프 아돌프에게 점령되었다. 18세기 에스파냐계승전쟁 때에는 오스트리아에 점령되어 선제후(選帝侯)가 프랑스로 피신하여 루이 14세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 무렵부터 프랑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1805년 나폴레옹 1세가 뮌헨에 들어와 아우스터리츠(슬라프코프) 싸움에서 승리한 뒤, 1806년 바이에른의 영지를 확대하여 왕국을 세웠으며, 대학도 건립하여 독일뿐 아니라 유럽의 문화·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8년 11월 가장 먼저 뮌헨에서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타도되고 아이스너 정부가 성립되었다. 1919년 2월 아이스너는 암살되고 호프만정부가 성립되었으나, 4월에는 레테공화국이 선언되어 백색테러가 횡행하고 뮌헨은 우익화되었다.
1923년 11월 히틀러 봉기가 일어나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35년 <운동의 수도>로 선언되었다. 1938년 9월 수데텐 문제에 관한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 4국협정이 이곳에서 조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정세가 전환되자 뮌헨대학에서는 반나치스 저항운동인 <백장미> 활동이 전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뮌헨의 반이 파괴되고 전후에는 미군의 점령 하에 놓였다.

뮌헨은 예로부터 상업도시로서 발전했으며 중세에는 특히 소금교역이 성행했다. 19세기 중반 철도 개통 뒤에는 남독일 최대의 곡물·목재·과일·야채의 집산지가 되었다. 공업은 19세기 초기에는 소수의 수공업만 있었으나 19세기 후반부터 발전하여 현재 바이에른 최대의 공업도시가 되었다. 광학·전기기계·정밀기계·자동차 등의 근대공업뿐만 아니라, 맥주양조·공예·출판·인쇄와 같은 전통공업도 성행하고, 북쪽 근교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1972년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이자르강 좌안의 시벽(市壁;현재 순환도로)으로 둘러싸여 있던 구시가에는 괘종시계탑이 있는 시청사, 양파형 둥근지붕탑이 있는 프라우엔 성당, 독일 르네상스양식인 성 미카엘 성당, 옛 성관(城館), 조폐소, 옛 궁정양조소 등 유서 깊은 건물이 많으며, 각 방면으로 도로가 연결되는 뮌헨의 핵심지에는 은행·보험회사와 대기업의 사무소가 집중되어 있는 중심업무 지구이기도 하고 백화점·전문점·레스토랑 등도 많다.
구시가의 북쪽에 펼쳐진 지구는 19세기 초기 루트비히 1세 시대에 건설된 부분으로 바둑판 모양의 도로망이 특징이다. 여기에는 궁전 외에도 연방·주정부 기관, 학교, 미술관, 박물관 등 바이에른주 중심시설이 모여 있다.
또한 북부의 슈바빙지구는 대학·미술학교와 가깝고, 학생·예술가의 거주지구로 알려져 있으며 카페와 레스토랑이 많은 유행의 첨단지로 <작은 파리>라고 일컬어진다.
구시가의 중앙역 남쪽에는 10월 축제가 열리는 테레지엔비제 광장과 박람회회장(博覽會會場)이 있다. 시의 서부에 있는 거대한 바로크양식인 님펜부르크성은 바이에른 선제후의 여름 궁전으로 1663~1728년에 건축되었다. 부속 건물인 아말리엔부르크궁과 국립도기제조소도 로코코양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예술·문화의 중심지로 독일 최대의 종합대학인 뮌헨대학(1472년 창립, 1826년 뮌헨으로 이전) 및 공과대학. 조형미술대학·음악대학 외에 국립도서관·바이에른국립박물관·독일박물관(자연과학·공학)·국립극장·오페라극장 등이 있다. * 장크르 미카엘 성당 St. Michael
성 미카엘 성당과 인접한 신학교는 16세기 독일 가톨릭 부흥운동의 중요한 정신적 센터였다. 신학교의 창설자 대공 빌헬름 5세는 쾰른에서 교회의 권리와 바이에른 왕권 신장을 위해 투쟁함과 동시에 문화, 특히 공국 내의 종교교육을 무엇보다도 학교 창설을 통하여 활발하게 촉진하였다. 이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까지도 칭찬할 정도였다. H. 얀첸이 예술의 역사에서 ‘창조행위’로 표현했듯이, 성 미카엘 성당에서 대공(大公)의 이상(理想)과 그 시대는 기념비적 표현형식을 이룩하였다. 성당의 유형과 설계, 표현형식과 이상의 두 요소는 남부 독일에서 바로크 시대 예술을 이끌었다.
성당 내부와 외부의 꼭대기에는 구세주로서, 그리고 온 세계의 보호자로서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그리스도상(像)이 서 있다. 입구에는 후버트 거하르트가 1588년에 청동으로 주조한 미카엘 천사상이 서 있는데, 그도 역시 정면과 내부의 본 제단 위에 배치됨으로써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성당 둘레의 벽감에는 암흑시대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인물들의 조각이 서 있다. 맨 위에는 그리스도교를 자기들의 신앙으로 받아들인 바이에른의 대공들인 오토, 데오도, 데오도발다의 조각이 오토를 중심으로 좌우에 서 있고, 두 번째 열에는 바이에른과 신성 로마 제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대공과 황제들의 조각이 서 있으며, 세 번째 열에는 중앙에 빌헬름 5세를 배치하고, 좌우에 그의 아버지와 당시의 지배자의 조각이 서 있다.
성당의 정면을 더욱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세 성당의 서쪽 정면이 사탄의 세력을 방어해 주는 미카엘 대천사에게 봉헌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면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창설자, 라인란트의 영주이며 바이에른의 대공인 빌헬름 5세는 이 건물을 전지전능하시고 신성하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친다.”

* 장크트 페터 성당 St. Peterkirche
성 베드로 성당의 역사는 멀리 11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이 도시에서는 가장 오래 된 성당이고, 뮌헨의 도시 발달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러나 지금의 성당은 처음 지어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세 번이나 고쳐 지어진 것이다.
1181년 최초의 로마네스크식 성 베드로 성당의 초석이 놓였다. 그 주역은 프라이징의 오토 2세 주교였다. 그 뒤 콘라트 빌브레히트 대주교가 교구성당이 빈약하다는 이유로 새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로 했다. 1278~1287년에 교황청의 도움을 받아서 지은 건물은 로마네스크 약식의 바실리카로, 과도기적 양식이었다. 1294년 5월 17일 봉헌식이 있었다. 그러나 1327년 2월 14일 뮌헨에 큰불이 나서 성당도 서쪽 한 모퉁이와 2개의 첨탑만을 남기고 모두 타버렸다. 이때부터 40년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 지은 세 번째 성당은 1365년 봉헌되었는데, 고딕 양식이었다. 이 건물의 기본 구조가 오늘날의 성 베드로 성당에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다.
1607년 고딕식 첨탑 2개에 벼락이 떨어져 파괴된 자리에는 다시 르네상스식 첨탑이 들어섰다. 그것이 ‘데어 알터 페터’, 곧 ‘늙은 베드로’였다. 1630~54년에 성당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새로 단장되었다. 30년전쟁의 고난 속에서도 베소브룬너 가문의 이자크 파더가 허초크 막시밀리아누스 1세의 명령을 받들어 새로 성단과 강론대를 꾸몄다. 그리고 1730~56년에는 로코코 장식을 더했다.
20세기로 들어서서 제 2차 세계대전이 종반으로 접어든 19944~45년에 마침내 연합공군의 폭격기들이 뮌헨 상공을 덮쳤다. 1944년 4월 25일 탑 꼭대기가 날아가고 뒤이어 폭격이 심해지면서 대제대와 성단이 무너졌다.
전쟁이 끝난 지 5년째가 되는 1950년에 성당 복구사업이 시작되었다. 펠릭스 부터자크 박사, 루돌프 에스테리 교수 등 전문가들이 전쟁 전의 영화 필름을 자료로 정밀한 복원작업이 이루어졌고,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75년에 와서의 일이었다.

* 운제러 리이벤 프라우 대성당 Unserer Lieben Frau
뮌헨은 ‘작은 수도사’라는 뜻으로,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주 주도다. 12세기 중엽 작센 대공 겸 바이에른 대공 하인리히 사자공은 뮌헨을 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상인을 유치하고 성벽을 쌓았다. 그는 상업에 중요성을 일찍 눈을 떴다는 점에서 다른 제후보다 뛰어났으며, 그 위에 수완가여서 영토도 확장하였다. 그러나 황제 바르바로사와 대립, 싸우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쫓겨났으며, 그 대신 비텔스바흐가(家)의 오토가 바이에른 대공이 되어, 1918년 왕제가 폐지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468년 비텔스바흐 가문을 비롯하여 뮌헨의 명문들이 프라이싱 주교이며 뮌헨의 첫 번째 성모 마리아 성당의 주임 신부였던 요한네스 튜벡의 지원을 받아 더욱 화려하고 웅장한 성모 마리아 성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첫 번째 성당을 헐면서 스테인드글라스와 성단과 조각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보존시켰다. 한편, 성당을 석조로 하느냐, 보다 경비가 적게 드는 벽돌로 하느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드디어 석공 한스 할드너를 물리치고 폴링 수도원에서 업적을 남긴 요르크 폰할스파흐에게 벽돌 건축을 맡기기로 했다. 이 정도 규모의 성당 건축에 몇 백 년이 걸리던 당시의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할스파흐는 한시도 감독을 게을리 하지 않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20년이라는 기록적인 시간’에 대성당을 완성했다.
마침내 1494년 4월 14일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봉헌식이 엄숙히 거행되었다. 그 뒤 16~18세기에는 모든 제단에 새로이 제단 장식과 성화가 갖추어졌다.
1800~1803년 나폴레옹 점령 하에 성당 재산이 세속화되어 주교좌 성당이 해체되었고, 값진 은기(銀器)가 싼값에 팔리거나 파괴되었다. 뒤이어 바이에른 지역의 교회가 개편되어, 뮌헨은 대교구로 승격했다. 그때부터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교구의 가장 중요한 성당으로 떠올랐다. 19세기 초에 낭만주의 운동이 고조됨에 따라 바로크 시대의 예술품들은 평가가 절하되었고, 1858년에는 대성당에서 제거하기로 한 결정이 내려지면서 성당 내부는 중세의 자취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거기에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내부가 폭격으로 파괴되어, 1950년 중반에 지금의 현대적인 자태로 변신했다. 1971년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맞추어 성단을 개조했고, 1980에는 완전히 채색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렀다.

* 시청사와 글로리겐슈펠시계 (City Hall&Glogenspiel)
뮌헨의 제일 중심부는 마리엔 광장이다. 광장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기만 하며 중세풍의 카페나 제과점 선물가게들이 즐비하다. 마리엔 광장의 지하철을 빠져 나오면 처음 온 여행자들은 일순간 고색창연한 분위기에 압도당할 정도로 그 규모는 대단하다. 이 시청사의 중앙 벽면에는 그로겐슈펠이라는 아름다운 기계식 시계가 있으며 매일 오전 11시에는 이 시계에서 인형들이 춤을 추며 종을 울리는 장면이 펼쳐져 많은 관광객들이 운집해 발 디딜 틈이 없다. (5월~10월에는 11시와 오후 5시에 있다.)
시청 앞 광장에는 거리의 악사나 재주꾼들이 공연을 하곤 하는데, 이들은 시에서 허가를 받은 사람들이다.

* 호프브로이하우스 (Hofbrauhaus)
독일 노동자 사회당(나찌스)이 최초의 집회를 개최한 장소로서 맥주의 나라 독일에 온 것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큰 맥주집이다.
1-2층을 합해서 약 2천명이 동시에 입장하여 맥주를 마실 수 있을 정도이다. 프랑크프르트의 작센하우젠의 맥주집의 100배 정도로 그 규모가 크다. 저녁 시간을 이곳에서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은 행운이다. 1층은 일반 독일식 전통 맥주하우스이고 2층은 저녁 식사를 겸해서 일반인들이 사교춤을 출 수 있는 무도회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마리엔 광장에서 약 10분 정도 걸린다.

* 슈바빙 (Suhabing)
뮌헨의 예술마을 슈바빙은 한국의 대학로와 비슷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시 북쪽의 거리로 예술가와 학생, 젊은이들이 모이는 '뮌헨의 몽마르트르'이다.
이곳의 보헤미안적 분위기는 금세기 초 이곳에서 활약한 예술가와 작가 등에서 기인한다. 칸딘스키, 마리아 라이너 릴케, 토마스만, 파울클레 등이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오늘날 슈바빙은 Leopoldstrasse 및 Occamstrasse를 중심으로 노상카페, 패션가게 등으로 가득 차 있고 관광객과 젊은이로 북적대고 있다. 파리의 생 미셀과 분위기가 매우 비슷하며 학생 주점이나 째즈 카페, 극장, 디스코텍이 즐비하다.

* 마리엔 광장 (Marienplatz)
시 중심에 있는 광장으로 차가 다니지 않는 시민 휴식처이다. 이 광장 동쪽에 서있는 신시청사(Neue Rathaus)는 1867~1909년에 세워진 네오고딕식 건물로 종탑과 벽면의 인형시계로 유명하다. 광장 서쪽에는 쌍탑을 가진 15세기 고딕식의 프라우엔 성당, 독일 최초의 르네상스식 성 미카엘 성당 등이 있다.
퓌센 (Fuessen)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지대 인근의 알게우알프스 산맥 동쪽 끝 레히강(江) 연안에 있다. 옛 로마제국의 국경초소가 있던 지역이며 628년에 세워진 베네딕토회 성 마그누스수도원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했다. 1294년 자치시가 되었다. 1745년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바이에른군대를 철수시키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현재의 성 마그누스수도원과 성당은 1701년에서부터 1917년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지은 것인데, 지하실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되어 있다. 도시에서 4km 떨어진 곳에는 슈반가우 숲이 펼쳐지는데, 그 숲 한 자락에 월트디즈니가 디즈닐랜드의 성을 지을 때 모델로 삼았다는 노이슈반슈타인성이 있다. 이 성은 중세 기사 전설에 매료된 바이에른 국왕 루드비히 2세에 의해서 건축되었다. 성의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루드비히 2세의 고독하며 기구한 운명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동화의 나라'라 불리는 퓌센을 더욱 신비스럽게 하고 있다. 이 관광 휴양지이며 겨울 스포츠의 중심지이다. 주요 생산품은 의류와 밧줄이다. * 노이슈반슈타일 성 (Schloss Neuschwanstein)
노이반슈타인 성은 퓌센을 상징하는 성으로 루트비히 2세에 의해 건축된 것이다. 바그너를 좋아한 루드비히 2세가 16세 때 오페라 '로엔그린' 중 백조의 전설에서 모티브를 얻어 지은 성으로 중세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는 19세 때 부왕이 죽고 왕위에 오르자, 바그너의 세계에 있는 중세풍의 성을 건설할 것을 생각했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1869년 공사에 착수하여, 17년 만에 완성을 보았으나, 이 성이 완공되기 전 갑작스런 죽음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많은 관광객들이 둘러보는 성안의 16개의 방은 왕이 죽기 전에 완성된 것이다. 새로운 성에는 새로운 백조의 성이란 뜻의 노이반슈타인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성은 그 이름과 같이 백조의 모습과 비슷하여 환상적인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반대파로부터 미친 사람으로 몰려 왕위에서 쫓겨나고 그 사흘 후에 뮌헨 교외의 슈타른베르크 호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17년의 세월을 소비하여 지은 이 성에서 루트비히 2 세가 거주한 것은 겨우 102일, 그리고 그가 그렇게 존경하던 바그너도 이 성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동화 같은 삶을 살기를 원했던 루드비히 2세의 화려한 성을 보기 위해 매년 수없이 많은 관광객들이 이 곳으로 몰려온다. 전설 같은 신비로운 꿈과 숨을 멎게 하는 주변 경관 또한 사람들을 이 곳으로 이끄는 요소이다. 디즈니랜드 성의 모델이 된 성이다.

* 호엔슈반가우 성(Schloss hohenschwangau)
낡은 Schwanstein 성을 1832-1836년에 걸쳐 재건축한 성이다. 바이에른 왕가의 황태자 막시밀리안이 이 오래된 성을 신고딕 양식으로 재건하였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건축자인 루드비히 2세는 그의 어린시절을 이 곳에서 보내며 환상의 세계를 꿈꾸게 되었고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설계하게 되었다.
에탈 Ettal
* 프라우엔 성당 Frauenkirche
오버라우에서 뮌헨-가미시 가도로 꺾어져 암머 계곡으로 들어가면 치솟는 산봉우리 가운데 거대한 돔이 있는 성당과 수도원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600여 년의 이 옛날 수도원 건물의 역사를 회상하게 된다. 1327년 바이에른 대공 루드비히는 왕위를 확고히 하려고 로마로 갔으나 왕위를 확고히 하기는커녕 궁핍과 빈곤에 빠져 절망 가운데 기도로 위안을 받고 있었다. 이럴 때 그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나타난 사람이 반백의 수도사였다. 수도사는 그가 돌아가서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의 영광을 위하여 ‘암페랑’에 수도원을 세우겠다고 서원하면 도와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대공이 쾌히 수락하니, 수도사는 성모 마리아상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대공은 밀라노의 백작 구엘프로부터 5,000길더의 재정지원을 받았다. 암페랑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는 돌아오는 길에 사냥꾼 펜트에게 암페랑이라는 곳으로 안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사냥꾼이, 로이자 계곡을 거쳐 암머강의 원류인 높은 계곡으로 안내한 그곳이 오늘날 린더호프와 오버암머가우 사이에 위치한 에탈의 경계지점이다. 오버암머가우는 뮌헨에서 남서쪽으로 67km 거리에 있다. 이 계곡으로 들어서서 대공이 탔던 말이 어떤 전나무 앞에 이르자 세 번이나 무릎을 꿇으면서 더 나아가지 않으려 하였다. 대공은 이곳이 서원한 수도원을 지으라고 하늘로부터 계시 받은 장소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 전나무를 중심으로 주변의 숲을 벌채하는데, 그 날이 1330년 4월 성인 비탈리스 축일이었다. 이날 대공은 에탈 성당과 수도원의 초석을 놓았으며, 이탈리아에서 받아온 카라라산(産) 대리석으로 제작한 성모 마리아상을 이곳에 안치했다고 한다.
1370년에 봉헌된 성당은 이웃 로텐부흐에서 가져온 거대한 사암(砂巖) 블록으로 직경 25m의 12면으로 된 건물이다. 다각형 건물의 중앙에, 야자나무 비슷한 거대한 기둥이 커다란 아치형 천장을 떠받치고 있으며, 그 밑에 감실과 하얀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 제대가 있다.

* 비스 성당 Die Wies
이곳은 슈타인가덴 동남쪽 5km에 있는 유명한 순례지다. 1147년에 창설된 프레몽트레 수도회의 마그누스 스트라우브 신부와 루카스 슈바이거 수사는 1730년에 나무로 여러 가지 성상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여 성 금요일 행렬에 쓰일 예수 그리스도상을 만들었는데, 이제까지의 성상들과는 달리 채찍질 당하는 그리스도를 조각하였다. 두 사람은 이 성상이 실감나도록 하기 위해 몸에 린네르 천을 두르고, 예수님의 피오 상처를 보여주는 색을 칠했다. 그러나 신암심이 깊은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는 너무나 가엾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고 떠들었으므로 성상은 1734년 슈타인가덴에 있는 한 여인숙의 다락방으로 치워지고 말았다. 1738년 5월 8일 여인숙 주인의 조카인 마리아 로리가 그것을 슈타인가덴에서 남동쪽으로 한 시간 거리의 자기 집으로 가져가서 매일 기도드리는 정성스런 마음으로 예수님 상을 바라보았다.
그 해 6월 14일 채찍질 당하시는 예수님 상에서 눈물이 흐르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 소문이 급속도로 세상에 전해지면서 이 마을은 순례자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웃 마을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보헤미아, 헝가리, 스위스 등과 같은 먼 지역으로부터도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다. 목초지에 있던 원래의 작은 성당은 순례자들이 머물기에는 너무 작아서 나무로 지은 본당이 들어섰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상을 한번도 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마리아누스 2세 수도원장은 성당을 위한 초석을 놓았고, 치머만이 이 성당을 설계하고 건축하기 위한 전권을 위임받게 되었다. 1749년 8월 31일 성가대석이 완성되어 봉헌된 후 그 상은 중앙 제단 쪽으로 옮겨졌다.
이 성당의 두드러진 특징은 내부에 있는 중앙 제단 양쪽의 기둥들에서 볼 수 있는데, 기둥들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 빛깔을 띠고 있다.
성당은 18세기 전반기에 프랑스에서 유행한, 화려한 건축 양식인 로코코 양식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외양은 겸손하면서 주위 경관에 어울리도록 단순하게 건축되었으므로 순례자들은 그 안에 영광스러운 것이 과연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문지방을 넘어서면 그 아름다움과 찬란함에 놀라면서, 외따로 떨어진 곳에 이처럼 영광이 가득한 성당을 지을 수 있었을까 감탄하게 된다.
오토보이렌 Ottobeuren * 베네딕토 수도원 Benediktinerabtei
764년경 실라흐 백작과 그 가문이 창설하였으며, 로마인 순교자이며 최초의 수호성인인 알렉산드로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960년에는 아우그스부르크의 울리히 주교가 이곳에 테오도르 순교자의 시신을 안치했다. 1089년에 아델헬름 수도원장이 성당과 수도원의 새로운 건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1126년에 수도원장 루퍼트 1세가 완성된 새 성당과 수도원을 축성하였다. 아이신그림 수도원장 재임 때는 정신적·문화적 번성기의 시초를 맞았지만, 1152년 화재로 모든 것이 소실되었다.
1167년에 많은 유물들을 쾰른으로부터 얻게 되면서 이곳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고, 1204년 세 번째 성당과 수도원 건물이 축성되었다. 1466년에 오토보이렌의 남쪽에 위치한 엘데른에 성모를 위한 순례지의 기초가 설립되는 등 발전을 거듭해 나갔지만, 1525년 농민반란 때 건물들이 약탈됨으로써 황폐화되었다. 카스파 킨델만 수도원장이 수도원과 성당을 르네상스 스타일로 재건축했으나 30년전쟁의 와중인 1630~1635년에 스웨덴인들이 이 건물들을 파괴해버렸다.
그 후 1711년 5월 5일 바로크 양식으로 된 수도원의 초석이 놓이고, 부속 건물들이 공사를 시작했으며, 1737년 수도원장 루퍼트 2세가 새로운 성당을 위한 초석을 놓았고, 건축 책임자로 짐퍼트 클라머를 임명하여 수도원 창립 1000주년이 되는 1764년까지 공사를 완성하려 하였으나, 성당의 완공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1766년에야 기념행사 겸 축성식을 가졌다.
1802년 바이에른인들의 침공을 인해 수도원이 폐쇄되었을 때 남은 48명의 수도자들은 1834년 수도원이 재건축될 때까지 어려운 수도생활을 하였다. 1926년 교황 비오 9세가 이곳에 ‘프란치스코 수도사의 성당(Basilica Minor)'이라는 칭호를 내려 이곳의 영광을 높여 주었다.

성당은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건물 위에 있는 빨간 지붕이 동화적 분위기를 나타내는가 하면, 시계가 있는 쌍둥이 탑은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남북 480m, 동서 430m의 성당과 수도원을 겸한 건물 구조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형태로 배치되었으며, 성당, 사제관, 수도원, 그리고 여름 별장, 손님방과 학교, 본관 및 봉쇄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구도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몸과 비교할 수 있는데, 약간 기울어진 성당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머리, 사제관은 몸통, 수도원과 여름 별장은 오른팔, 손님방과 학교와 본관은 왼팔, 봉쇄구역은 다리를 상징한다. 이것은 앞으로 세워질 이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국가를 나타내기도 한다.
* 안덱스 성당 Andechskirche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주에 있는 마을로, 1080년에는 디센 백작의 거성(居城)으로서 역사에 처음으로 기록되었고, 후에는 안덱스 백작의 거성이 되었다. 이 두 가문은 937년에 사망한 중세 독일의 중요한 귀족인 아눌프의 후손들이다. 이 가문에는 953년에 사망한 라소 백작, 1243년에 사망한 성 헤드비히, 그녀의 조카로 1231년에 사망한 성 엘리자베스 같은 유명한 사람들이 있다. 안덱스의 백작들은 1128년 이후로 성스런 유물을 많이 소장해 왔으므로 순례지로서 알려졌으나 안덱스가 망하여 그 혈통이 단절된 후 이 유물들도 분실되었다.
1388년 복구되어 뮌헨으로 편입된 후로 다시 수많은 크리스천들의 순례지가 되었고, 바이에른 왕조의 에른스트 공작은 안덱스에 옛 유물들을 돌려주었다. 그 결과 안덱스는 ‘성스러운 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에른스트는 1438년에 고딕식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고, 알브레히트 3세는 1455년에 수도원의 이름을 성 베네딕도 수도원으로 바꾸었다. 1669년 수도원과 성당이 벼락으로 소실되었다가 1755년경에 그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한 화려한 로코코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현존하는 성당의 가장 오랜 부분인 성인들을 위한 소성당에는 은제 성체 현시기가 안치되어 있다. 전승에 의하면 성찬의 전례 도중에 한 여인이 그리스도의 존재를 의심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혈혼이 성체현시기에 나타났는데, 첫 번째는 십자가의 형상, 두 번째는 손가락, 마지막으로 구세주라는 글씨였다고 한다.
교황 레오 9세가 이를 밤베르크로 가져갔으며, 1182년경에 밤베르크의 주교 오토 2세가 안덱스의 버톨트 백작에게 되돌려 주었다.
알퇴팅 Altting
독일의 바이에른주(州)에 있는 도시. 면적 2만 1640㎢, 인구 1만 2731명(2000년) 인강(江)과의 합류 지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모렌강(江) 연안, 뮐도르프-부르크하우젠 철도변에 위치한다. 한때는 상업으로 번영하였으나, 지금은 제철업이 주된 산업이다. * 알퇴팅 성모성지
성당의 유명한 성모마리아상(像)을 보기 위해 해마다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드는 데, 이 성당에는 은궤에 몇몇 바이에른 왕자들의 심장들을 보존하고 있다. 역사 깊은 프란체스코회(會) 수도원과 성페테르·성파울 교회, 8세기에 만들어진 유명한 '흑의(黑衣)의 마리아상(像)' 등이 있다. 카롤링거 왕조의 루트비히 4세(Ludwig IV)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쾰른 Koelner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서남부에 있는 도시. 인구 96만 3200(1999). 뒤셀도르프 남동쪽, 라인강 연변에 있다. 라인강이 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며 흐른다. 노르트라인지방 경제·문화의 중심지이며, 텔레비전·라디오방송의 기지이기도 하다.
역사는 기원전 38년 게르만계 우비에르인의 취락에서 비롯되었다. 50년 로마가 식민도시 콜로니아 아그리피나를 건설하였는데 쾰른이란 이름은 이 식민지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콜로니아’에서 유래된 것으로 지금도 영어와 프랑스어로는 콜로니라의 어원을 그대로 나타낸 Cologne으로 통하고 있다. 쾰른에서의 대성당은 쾰른을 의미하고 쾰른은 곧 대성당을 의미할 만큼 쾰른 대성당은 이 도시의 유일한 상징이며 명소이다.
그 뒤 785년 대주교좌(大主敎座)가 설치된 뒤 상업도시로 급속히 발전, 독일 최대의 도시로 번창하였다. 11세기 초에는 런던에 상관(商館)까지 두었고, 한자동맹의 유력한 구성원이 되어 1258년 라인도시동맹결성 때에는 하(下)라인-베스트팔렌의 본부가 설치되었으며, 14세기에는 중부 라인도시동맹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1288년 월링겐 전쟁 후 완전한 자치권을 획득하였고, 1475년 신성로마황제로부터 자유로운 제국도시로 승인 받았다.
13세기 말부터 도시 귀족층으로 구성된 도시참사회(라트)가 시정을 장악하였으나, 14세기에는 수공업자 춘프트(동업조합)의 시정참여요구가 강화되어 1396년 무혈혁명으로 민주적 시정제도가 수립되었다. 15세기 말부터 남부 독일 도시보다 경제적으로 뒤지고 16세기에는 국제상업 중심이 함부르크 등 해안 도시로 옮겨져 상대적으로 쾰른의 지위는 낮아졌다.
나폴레옹 전쟁 때는 프랑스군에 점령되었으나, 빈회의에서 프로이센령에 편입되었다. 19세기 후반 철도망의 집중으로 다시 번영을 되찾았다.
현재 독일 50여 개 보험회사의 본사가 모여 있고 자동차·화학·전기기기·음반 등의 산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오데콜론 향수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철도·자동차도로가 집중하는 국제적 교통의 요지이며, 4개의 하항(河港)도 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쾰른대학(1388년 창립), 로마시대의 유적 디오니소스 모자이크를 내부에 장식한 로마게르만박물관이 있으며 시내에는 쾰른대성당 등 많은 교회가 있다.
쾰른대성당 Koelner Dom
바티칸의 베드로, 밀라노의 두오모, 파리의 노트리담 대성당과 더불어 쾰른 대성당은 세계 4대성당의 하나로 꼽힌다. 노트르담 대성당이 여성적인 우아함을 나타낸다면 쾰른 대성당은 남성의 기상과 웅대함을 보여준다. 로마 제국의 북부 도시였던 쾰른에 처음 성당이 세워진 것은 6세기경이었고, 현재의 쾰른 대성당은 다섯 번째로 세워진 것이다. 1164년 닷셀의 아리날트가 동방박사의 유물을 이곳에 가져왔는데, 1248년 마침내 콘라트 폰 호흐슈타텐 대주교가 이를 영원히 보관할 성전의 머릿돌을 놓았다.
게르하르트가 설계한 성가대석은 1322년에 완성되었고, 뒤이어 북쪽 신랑(身廊)과 성 베드로 현관이 딸린 서남쪽 탑이 세워졌다. 그러나 1510년 건축양식에 대한 논란 때문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첨탑 공사는 설계의 절반에 그쳐 300여 년 동안 그 뭉툭한 자태로 쾰른의 하늘을 지키고 있었다. 1814년에 프로이센 왕통의 계승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V.슈타츠의 설계도를 찾아내어 건축공사를 계속하도록 지시하였다. 공식적으로는 리하르트 보이그텔이 1880년에 준공하였다고 하지만, 대성당의 손질은 20세기에도 계속되어, 약 650년의 긴 건축사를 자랑한다.
유럽 최대라는 이 성전은 실로 웅장하여 성당 내부의 길이 144m, 너비 44.8m이며, 높이는 43.5m에 이른다. 높이 158m의 첨탑을 합치면, 준공 당시 세계 최고의 건축물이었다. 성 베드로 현관에서 502계단의 나선 계단을 올라가면 95m의 남쪽 탑 꼭대기에 이른다. 성 베드로의 종은 무게 25톤으로 유럽 최대의 작품이다.
고딕식 건물의 걸작 쾰른 대성당은 5개의 신랑에 3개의 익랑(翼廊), 7부의 성가대석에 하나의 계랑(階廊)과 수많은 성인상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성가대석 계량에는 성당 창설자 콘라트 폰 호흐슈타텐의 무덤을 비롯하여 여러 무덤이 있고, 동방박사들의 유품을 모시는 성소가 있다. 아울러 이곳에는 슈테판 로흐너의 명작 동방박사(1440년경 완성)도 눈길을 끈다.
쾰린 대성당은 건물의 안과 밖이 그대로 독일 성당건축의 극치며, 장식과 성구 하나 하나가 예술적 향기 높은 조각과 세공품이다. 유럽에서 가중 풍요로운 종교예술의 보고라는 쾰른 대성당은 바로 독일 가톨릭 신앙의 위대한 결정체다.
프랑크푸르트 Frankfurt
라인 강의 큰 지류 중의 하나인 마인 강 양안에 위치한 프랑크푸르트의 정식 명칭은 프랑크푸르트 암마인(Frankfurt am Main)이다. 프랑크푸르트는 794년 칼 대제의 “Villa Franconofurt"에서 유래한다. 1240년 프리드리히 I세가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을박람회" 허용한 것이 박람회의 효시가 된 프랑크푸르트는 일찍이 국제 견본시의 도시로서 발전하여 독일의 금융?상공?교통?문화의 구심점이 되어 왔다.
프랑크푸르트의 역사는 기원전, 로마인이 이곳에 요새를 구축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완전한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794년 카를대제가 이곳에 국회를 열어 프랑크 제국의 수도로 삼은 때부터였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가 상업도시로 발전하게 된 때는 13세기 무렵으로, 당시 환전상이었던 마이어 암셀로르실트가 국제적인 대금융 재벌인 로스차일드가를 이룸으로써, 각 금융 기관이 이곳에 집결하여, 오늘날 독일경제의 중심이 되는 바탕을 마련했다. 또한 이 도시는 18세기까지 신성로마제국의 국왕 선거 및 황제대관식이 거행된 곳으로 정치적으로 의미가 깊은 도시이다. 1815년 빈 조약으로 독일의 4개 자유도시 중 하나가 되었고, 1816년에는 독일연방 의회가 개최되었다. 1848년-1949년에 파울스 Paulskirche 교회에서 독일 최초의 국민회의가 열렸으며, 1871년에는 프랑스-프로이센전쟁의 화평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스스로를 '영원한 러시아워의 도시'라 부르는 프랑크푸르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여느 도시에 비해 철저히 파괴된 것도 이러한 정치·경제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후 복구사업을 하면서 이 도시가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 외관을 갖추게 된 것 역시 정치·경제적 위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뱅크푸르트(Bankfurt)’라고 불리는 프랑크푸르트는 금융과 상업의 도시로 독일 최대공항이 있고 현대적인 건물들이 즐비한 도시이다. 또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등의 작품을 남긴 세계적인 문호 괴테의 생가가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52명의 실물크기 초상화가 벽에 장식되어 있는 구시청 건물 뢰머(Romer)와 오페라하우스가 인상적이다. 매년 많은 세미나와 국제회의가 개최되는 등 독일 최대의 회의 센터이기도한 프랑크푸르트는 유명한 Book Fair가 열린다.
프랑크푸르트는 1957년 이래 독일연방은행 (Bundesbank) 과 1999년 이래 유럽중앙은행(ECB) 이 자리잡고 있다. * 장크트 바르톨로메오 St. Battholomaeus 대성당
독일 헤센주 마인강 하류에 위치한 프랑크푸르트에는 성 바르톨로메오에게 봉헌된 대성당이 있다. 그 이유는 대성당이 성 바르톨로메오의 유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며, 성서에는 필립보로 병기되고 있다.
대성당의 천장 아래에는 여전히 초기 성당의 두드러진 특징들이 남아 있다. 이 대성당은 840~870년에 독일 왕 루드비코에 의해 설립되었고, 352년에 라바누스 마우루스가 축성했다고 전해진다. 13세기에 접어들면서 대성당은 거의 황폐하게 되었고, 2개의 본당들의 뒷벽에 있는 2개의 문들이 가려지지 않은 채 보이는 초기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복구된 성당은 1239년에 라츠부르크의 루돌프 주교에 의해 재 축성되었다.
14세기에 이르러서 대성당의 각 부분들은 가장 완전한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높이 96m의 탑신은 15세기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제작되었으며, 1867년 본당들이 화재로 손실되고 난 후, 원래는 낮았던 본당의 높이가 성가대석 익랑의 높이와 같아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3~44년에 계속된 연합군의 폭격은 대성당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그러나 1950~53년에 유명한 건축인들과 대성당이 위치한 프랑크푸르트시의 노력으로 대성당의 면모가 두드러지게 개선되었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은 특히 기둥 사이의 원근의 조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356년에 칼 3세가 발행한 ‘금인칙서(金印勅書)’에 따르면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이 이 대성당에서 열렸다고 하며, 1562년부터 전체 독일 황권이 종국을 맞게 될 때까지 황제들은 이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 괴테하우스 (Goethehaus)
‘프랑크푸르트 시민의 위대한 아들’이라는 호칭을 받았던 대문호 괴테가 1749년에 태어나 대학 입학까지 16년을 보낸 집이다. 전쟁 후에 재건된 것으로 괴테가 태어난 방은 기념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집필하던 방은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집필됐던 괴테하우스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파괴되었으나, 전후 충실히 복원돼 현재는 자필원고와 초상화를 전시한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괴테는 이 집을 자유형의 계단, 정원의 아름다운 전경을 갖춘 밝고 즐거운 넓은 집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갖게된 오스트리아에 대한 동경과 사랑, 가족들간의 애정을 엿 볼 수 있기도 하다. 이 곳에는 괴테의 생애에 관한 서류와 작품들, 유명한 예술가들의 조각과 회화가 전시되어 있다.
아헨 Aachen(Aachener)
프랑스어 이름은 엑스라샤펠이다. 쾰른 남서쪽 70km 지점에 있으며, 시역(市域)은 네덜란드·벨기에와의 국경에 접한다. 시는 아르덴 고원(高原)의 북쪽 사면에 위치하여 아름다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데다가 고온(73.4℃)의 온천이 솟아 예로부터 휴양지로 이용되어 왔다. 로마시대부터 쾰른에서 아헨을 거쳐 브뤼셀·파리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발달하였다.
샤를마뉴 때에는 프랑크 왕국의 수도로 번영하였으며, 813~1531년 때때로 독일 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제국의회·종교회의·평화회의가 열리는 등 정치의 중심지를 이루었으며, 학자·문인들이 모여들어 이른바 '카롤링거 왕조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1801년 나폴레옹 전쟁 때에 뤼네빌 조약에 따라 프랑스령(領)이 되었으나, 나폴레옹이 실각한 다음 1815년의 빈 조약에 의해 프로이센에 양도되었다.
이곳에서 역사상 유명한 평화 조약이 2번 체결되었다. 하나는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일으킨 네덜란드 전쟁을 결말짓기 위한 강화조약으로 1668년 5월 2일에 체결되었으며, 또 하나는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의 결말을 지은 화약(和約)으로 1748년 10월 18일에 성립되었다. 부근에 있는 탄광이 공업발달의 원천을 이루어, 전기기구·유리·섬유·금속·기계·바늘·인쇄 등 각종 공업이 활발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연합군에 의해서 시가지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미술관을 비롯한 역사적인 건축물을 많이 상실했으나 샤를마뉴의 무덤과 대성당은 남아 있다. 이 밖에 시내에는 고딕양식의 시(市)청사, 성당인 팔각당(八角堂), 시문(市門) 등이 있으며, 주립공과대학이 있다. * 아헨 대성당 Aachener Dom
아헨은 서독의 고도(古都) 쾰른의 북서방 70km쯤에 위치하며, 시의 영역은 네덜란드 및 벨기에와의 국경에 접한다. 아헨은 옛 독일어로 ‘물’이라는 뜻인데, 그 이름에 걸맞게 유황 온천이 많이 있어서, 1세기에 로마인들이 커다란 목욕탕을 만들기도 하였다. 프랑크 왕국시대에 칼 대제가 자신의 영지로 삼으면서 대성당이 들어서는 등 유서 깊은 고도로 남게 되었다. 칼 대제가 이곳을 택한 이유는 첫째, 서쪽으로 팽창하는 그의 제국에게는 지리적 조건이 유리하였고 둘째, 방대한 숲과 따뜻한 온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실에 속했던 대성당은 칼 대제의 계획 하에 세워졌는데, 그 부분이 현 대성당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는 많은 다양한 부속물들과 증축 부분들이 있지만,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8각형의 돔은 800년경에 완성되었다. 오도(Odo)가 지은 이 거대한 돔은 높이 약 31m로, 알프스 북쪽 지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돌로 되어 있는, 건축사(建築史)의 전환점을 이룬 수직적인 건물이다. 건축하는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아치의 외부 구조물을 형성하는 일이었다. 936년 오토 대제가 그의 대관식 장소로 아헨을 택한 후 30명의 왕과 12명의 여왕을 즉위시킨 영광스런 전통인 60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1355년 고딕식 성가대석을 만들기 시작하여, 1414년에 완성되었다. 1949~56년에는 성가대석에 ‘천국의 예루살렘’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첨가되었다.
대성당 건축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짓는 도중 칼 대제의 재정이 바닥나자 한 악마가, 성당이 완성된 후 첫 번째 들어서는 영혼을 자기가 가진다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어서 성당이 완성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아무도 맨 처음으로 성당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때 어떤 현명한 사람이, 그 계약에는 단지 영혼 만이라고 기록되었을 뿐 사람의 것인지, 짐승의 것인지 분명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자 사람 대신 늑대를 잡아 들여보냈다. 이를 안 악마는 화가 나서 성당 문을 꽝 닫아버렸는데, 그 순간의 충격으로 생긴 틈새에 그의 손가락이 금속으로 변해 청동문의 우측 익벽에 있는 사자의 머리 속에서 굳어버린 후로 이 문은 늑대의 문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 악마의 손가락을 제거하는 자에게는 커다란 보상이 내릴 것이라고 했지만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케펠러 Kevaeler
* 프라우엔 성당 Frauenkirche 1641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가난한 장사꾼 헨드릭 부스만이 뒤셀도르프 북쪽의 케펠러 부근 길가의 십자가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기도를 올렸다. 그때 문득 “이 자리에서 나를 위해 성당을 지어라!”하는 신비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 뒤에도 세 번이나 같은 음성을 들었는데, 그때마다 공교롭게도 같은 장소에서였다.
부스만은 그 부름에 응하였다. 그 후 한 달 남짓 되어 그의 아내 메헬은 꿈속에서 눈부신 빛과 더불어 계시를 받았다. 얼마 전에 병사들이 들고 와서 팔려던 그림 ≪룩셈부르크의 마리아≫를 모시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헨드릭은 성당을 지을 돈을 아껴 모았고, 아내에게는 그림을 찾아 나서게 하였다.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그림을 간직한 채 캠펜의 감옥에 갇혀 있던 육군 중위를 찾아냈다. 사정을 털어놓고 애원한 끝에 그 중 한 점을 얻었다. 마침내 그해 5월 마지막 날 토요일 밤에 케펠러의 사제가 그림을 가져다가 이튿날 성전에 모셨다. 바로 그날 겔데른을 비롯하여 이웃 교구에서 순례자들이 몰려드는 기적이 일어났다. 헨드릭고 아내 메헬은 이런 사연을 성전 기단에 새겨 영원히 기렸다. 고난 받는 자를 위로하는 성모 마리아상은 계속하여 순례자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
1654년 중앙집중형 바로크 성당이 들어섰다. 그 뒤 19세기에 이르러 몰려드는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미사와 사목활동을 하기 위해서 시설을 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따라 1858~1864년에 고딕식 성당을 케펠러 중앙 광장의 북동쪽에 세웠다. 19세기에 쾰른대성당을 지었던 건축가이며 독일의 명장인 V.슈타츠(1819~1899)가 책임을 맡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초에 독일군이 성모 마리아 성당과 자비의 소성당 및 촛불 소성 당을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주민들은 몸을 피하고 성모 마리아께 이 위기에서 저들과 성전을 구해 주시기를 빌었다. 독일군의 마지막 잔류병이 폭발장치의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은 들리지 않고 성당은 그 자리에 꿈쩍도 않고 우뚝 서 있었다.
하이델베르크 Heidelberg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 있는 도시. 인구 14만 1509(2002). 만하임 남동쪽 네카어강(江) 연안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로 12세기에 처음 문헌에 등장하였다. 1225년 라인 백작령(領)이 되었으며 1720년까지 선제후의 거성이 자리 잡았다. 하이델베르크 근처에서 원인(原人)의 뼈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서 깊은 대학과 옛날의 영화로웠던 꿈을 말해 주는 고성, '황태자의 첫사랑'으로 널리 알려진 하이데베르크는 라인 강 본류와 그 지류인 네카어 강이 합류하는 독일 남부, 아름다운 과수원으로 덮인 쾨니히툴 산 서북쪽 기슭에 위치한 고색 짙은 도시다.
하이델베르크라는 오늘날의 지명은 독일어로 '신성한 산'이라는 뜻을 지닌 '하일리겐베르크'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 하일리겐베르크는 오늘날 하이델베르크 고성이 있는 네카어 강 언덕을 가리킨다.
1386년 선제후 루프레흐트 1세(Ruprecht I)에 의하여 설립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는 프라하대학교와 빈대학교의 뒤를 이어 독일어권에서는 가장 오래 된 대학으로 16세기에 종교개혁의 보루가 되었다. 30년전쟁(1618~1648) 이후 쇠퇴하였다가 프랑스혁명 전쟁 이후 옛 명성을 회복하였다.
18세기 이 곳의 선제후가 하이델베르크를 버리고 만하임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은 다시 조용한 대학도시로 부흥되고 아름다운 바로크풍 집들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하이델베르크는 문화유산이 많아 관광산업이 발달하였으며 라인평야 신지역에 공업지대가 형성되어 담배·시멘트·철도차량·인쇄기계·전기기기·금속제품 등을 생산하고 있다. 또 도로·철도망이 교차되는 교통요지이므로 군사시설이 많다.
옛 시가는 쾨니히슈툴산(556m) 기슭에 있는 하이델베르크성 아래를 흐르는 하천을 따라 뻗어 있는데 예수회교회·시청사·카를테오도르교·마르크트광장 등 옛 건조물이 많이 남아 있다. 신시가는 라인평야에 펼쳐져 있는데 하이델베르크대학을 비롯하여 하이베르텔 아카데미, 원자물리학·의학·비교법 연구를 위한 마쿠스 프랑크 연구소, 암연구소, 교육대학, 음악대학 및 연극대학이 있다. * 하이델베르크 고성
13세기에 수도원 자리였던 곳에 16세기와 17세기 초에 건설되었다가 17세기 말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된 하이델베르크 고성은, 라인 선제후가 대대로 거쳐했던 곳으로 담홍색의 우아한 르네상스풍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고성은 복잡할 정도로 거대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17세기 말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루이 14세의 군대에 의해 황폐해졌으나 그 후 일부만이 개축된 채 당시 파괴된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고성은 여러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프리드리히 관의 지하에 있는 하이델베르크 툰(Heidelberg Tun)이라는 약 5만 8080갤런 규모의 거대한 술통으로 유명하다. 술 창고 안의 큰 술통은 무려 2만 리터나 되는 술을 저장할 수 있는 것으로, 옛 선제후들이 세금을 낼 수 없는 주민들에게 대신 포도주를 바치게 하여 이 술통에 저장, 부하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지금은 빈 통으로만 남아 있다.
로텐부르크 Rothenburg
로만틱 가도의 하이라이트로, 산 위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리가 즐비하여 마치 중세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타우버강(江)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지명은 '타우버강 위쪽에 있는 로텐부르크'라는 뜻이며, 줄여서 로텐부르크라고도 한다.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은 9세기로 로텐부레로라고 표기되어 있다. 슈타우펜 왕조 때 지은 요새를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하였다. 1274~1803년에 자유제국도시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다가 17세기의 30년전쟁 이후 쇠퇴하였다.
중세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 '중세의 보석'이라 일컬어지며, 이 곳을 찾는 관광객이 연간 100만 명에 이른다. 13~16세기에 지어진 시청사에는 높이 60m의 종탑이 있는데,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 장크트야코프 교회에는 틸만 리멘슈나이더(Tilman Riemenschneider)의 나무 조각 작품인 《최후의 만찬》이 있다. 이 밖에 중세범죄박물관, 장난감박물관 등도 있다. 주요 산업은 섬유업·인쇄업·플라스틱제조업·전자부품업 등이다. * 로텐부르크의 요새, 슈피탈성문(spitaltor)
성벽의 남쪽 끝에 있는 슈피탈성문(Spitaltor)는 17세기 초에 완공된 매우 튼튼한 요새이다.
요새는 2개의 성곽과 7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대포가 놓여 있었던 곳은 역사적인 장소로 가치있는 곳이다. 이 곳은 오늘날까지도 도시 엄호를 위한 방파제로써 이용되고 있다.

그밖에 1701~1703년 건립된 시청사와 이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라 불리는 오솔길 등이 있다.

* 로만틱 가도(Romantische Strasse)
독일 중남부의 뷔르츠부르크에서 남쪽으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가까운 퓌센까지의 약 300km에 이르는 도로의 호칭이다. ‘로맨틱 가도(街道)??를 뜻하지만 호칭의 기원은 오래 되지 않았다.
이 가도를 따라서 로텐부르크, 뇌르틀링겐을 비롯한 중세의 모습이 남아 있는 소도시들이 연달아 있으므로, 제2차 세계대전 후 관광객 유치를 위하여 개발되었다. 퓌센 근처에는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가 건조한 노이슈반슈타인성(城)이 있다.
베를린 Berlin
독일 수도. 면적 883㎢. 인구 339만 2900(1999).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포츠담협정에 따라 시의 중앙부에 있는 브란덴부르크문을 경계로 동베를린은 소련이, 서베를린은 미국·영국·프랑스의 3개국이 분할 점령, 관리하였다. 동베를린은 1949년 10월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성립 때 그 수도가 되었으며, 서베를린은 49년 5월 성립된 독일연방공화국(서독) <기본법>과 50년의 <베를린헌장>에 따라 서독의 주(州)에 준하는 지위가 주어졌다. 1961년 8월에는 동독이 동·서베를린 경계상에 <베를린장벽>을 쌓고 동·서베를린 사이의 주민이동을 차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71년 미·영·프·소 4개국간의 베를린협정과 1971·72년 동·서독간의 통행협정·기본협정 체결로 동·서베를린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결속관계가 회복되기 시작, 1989년 11월 동서냉전의 상징물인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을 이룸으로써 통합된 베를린은 1991년 다시 독일의 수도가 되었다.

베를린은 독일 북동부, 오데르강·나이세강 서쪽에 있다. 바르샤바-베를린원류곡이라고 하는 드넓은 저지에 있으며, 슈프레강이 시를 동서로 꿰뚫어 흐르다 남북으로 흐르는 하펠강과 합류한다. 슈프레강과 하펠강 유역에는 크고 작은 호수가 산재해 있어 호수의 봇둑을 뜻하는 <담(-dam)>이라는 어미를 지닌 지명이 많다. 지대가 가장 높은 곳은 베를린 동부의 뮈겔베르크(115m)이며, 이 밖에 쇠네베르크(103m)·하펠베르크(97m)·크로이츠베르크(66m) 등의 구릉지가 있다. 이 구릉지들은 홍적세에 대륙빙하가 남긴 빙퇴석 언덕이다. 베를린은 강한 내륙성기후에 속한다. 평균기온은 7월 18.7℃, 1월 -0.2℃로 연교차가 크다. 연강수량 589.4㎜, 수면의 동결일수는 연간 40일이다. * 역사
오늘날의 베를린 및 그 주변지역은 민족 대이동기 이후 슬라브민족인 벤드족의 거주지였으나, 1160년 무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알브레히트 1세가 벤드족을 평정한 뒤 독일인의 입식이 시작되었다. 교통의 요로인 슈프레강의 섬에 상인기지가 이루어지고, 이 취락이 1230년 무렵 도시권을 얻어 쾰른이, 이어서 그 오른쪽 연안에 베를린이 형성되었다.
이 두 시가 뒤의 대도시 베를린의 기초가 되었다. 쾰른과 베를린은 변경백의 보호와 상업·교통의 이점 때문에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1307년에는 공동의 시참사회(市參事會) 밑에 베를린-쾰른시로서 행정상 하나로 결합하였다. 20년 이후 1세기에 걸쳐 베를린-쾰른 연합시는 자력으로써 자치도시로 발전, 14세기 중엽에는 한자도시동맹에도 가맹하고 브란덴부르크의 중심도시로서 연방의회 개최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415년 호엔촐레른가의 프리드리히 1세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된 뒤부터 변경백의 권력이 약화, 프리드리히 2세 때 베를린-쾰른은 자치도시로서의 특권을 빼앗기고 다시 분리되어 군주의 행정 아래 들어갔다. 그 뒤 베를린과 쾰른은 상업도시로서의 지위는 떨어진 반면, 쾰른 북부에 호엔촐레른가의 성이 세워짐으로써 왕궁·관청도시로 발전하였다. 1539년에는 종교개혁이 이루어져 신교(新敎) 도시가 되었다.
1618~48년의 30년전쟁 중에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인구가 1만 2000명에서 7500명으로 줄었으나,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밑에서 새로운 발전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슈프레강 왼쪽 연안에 프리드리히스베르티·드로텐슈타트·프리드리히슈타트 등 새 도시를 세우고, 베를린·쾰른·프리드리히스베르티를 둘러싸는 성벽을 건설하였다. 프리드리히스베르티와 도로텐슈타트에는 프랑스 신교도들이 이주해와 상공업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68년 오데르강과 슈프레강을 잇는 운하의 건설로 베를린은 함부르크와 브로츨라프를 잇는 상업수로의 거점이 되었다. 1709년 베를린·쾰른 및 신흥 3개 도시가 통합하여 프로이센왕국의 수도로 베를린을 결정했다. [ 프로이센의 수도 ]
18세기에 베를린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프리드리히 2세 통치 하에 유럽의 주요 도시로 발전하였다. 군대가 국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프로이센의 수도로서, 1725년에 군인이 전체인구의 20%를 차지하였다. 한편 국왕의 중상주의적 산업진흥책으로 면·견직물업이 번창하였고, 63년 설립된 국영도자기공장도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시가가 정비되고, 91년 완성된 브란덴부르크문 등 프로이센왕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1806년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전쟁에서 패한 뒤 베를린은 2년간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었으나, 1807년 프로이센국가재건을 위해 단행된 프로이센개혁은 베를린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도시조례에 따라서 베를린은 자치권을 얻었으며, 춘프트(동업조합)와 국내 관세의 폐지로 상공업도시로 발전하였다. 1810년에는 동부베를린에 베를린대학(지금의 훔볼트대학)이 창설되어 문화도시로도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1838년 베를린-포츠담간의 철도가 개통된 이후에는 북부 독일 철도망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공업이 발전하자 베를린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이 탄생, 그 사회문제와 시민의 정치활동이 결부되어 1848년 3월 혁명이 일어났다. 독일 통일과 자유를 위한 혁명으로, 3월의 베를린시가전에서 시민측이 승리, 5월 통일 독일 헌법의 제정을 위한 국민의회가 열렸으나 반동세력의 부활로 실패하였다. 그 뒤 빌헬름 1세가 즉위, O.E.L. 비스마르크가 철혈정책을 강행해 1871년 독일제국을 이루기까지 인구는 계속 늘어나 82만 6000명에 이르렀다.

[ 독일제국의 수도 ]
통일 제국의 수도가 된 베를린은 1880년 인구가 132만 5000에 달하여 독일에서 최초로 인구 100만을 넘어섰으며, 사회주의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 독일공화국의 수도 ]
1918년 11월의 독일혁명으로 독일은 공화국으로 재출발하였다. 20년 베를린은 주변의 7개 시, 59개 읍·면, 29개 기사농장(騎士農場)을 합쳐 면적 878㎢의 <대베를린>이 되었다. 독일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20년대에 베를린은 문화면에서 <황금의 20년대>를 맞아 음악·미술·문학·연극·영화 각 장르에서 세계를 이끌었다. 그러나 1934년 A. 히틀러 독재정권이 들어서고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베를린은 폐허로 변하였다. 1945년 4월 23일~5월 2일까지의 치열한 시가전으로 가옥의 20%가 파괴되고, 50%가 피해를 입었으며, 인구는 1943년의 448만 9700명에서 280만 명으로 격감하였다.

[ 성 아그네스 수녀원 ]
1918년 11월의 독일혁명으로 독일은 공화국으로 재출발하였다. 20년 베를린은 주변의 7개 시, 59개 읍·면, 29개 기사농장(騎士農場)을 합쳐 면적 878㎢의 <대베를린>이 되었다. 독일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20년대에 베를린은 문화면에서 <황금의 20년대>를 맞아 음악·미술·문학·연극·영화 각 장르에서 세계를 이끌었다. 그러나 1934년 A. 히틀러 독재정권이 들어서고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베를린은 폐허로 변하였다. 1945년 4월 23일~5월 2일까지의 치열한 시가전으로 가옥의 20%가 파괴되고, 50%가 피해를 입었으며, 인구는 1943년의 448만 9700명에서 280만 명으로 격감하였다.


* 문화
옛 베를린의 유산을 물려받아 문화시설이 풍부하다. 베를린 중앙에는 1789년 건조한 개선문으로 6개의 도리스양식 기둥을 지닌 브란덴부르크문이 있다. 그 동쪽으로 이른바 박물관섬에는 페르가몬미술관·보데미술관 등이 있으며, 마르크스-엥겔스 광장에는 대전 후 세워진 공화국궁전이 있다. 그밖에 훔볼트대학·역사박물관·국립도서관·베를린국립오페라극장·알렉산더광장·텔레비전탑 등이 있다. 브란덴부르크문 서쪽으로는 네오로마네스크양식의 탑이 있는 빌헬름황제기념교회(1895), 22층의 유럽센터 외에 바우하우스박물관·국립미술관·신국립미술관·국립도서관·베를린필하모니관현악단홀·베를린도이치오페라하우스·실러극장과 지금은 미술공예박물관으로 사용하는 샤를로텐부르크궁전(1710) 등이 있다. 남서쪽에는 《네페르티티 흉상》을 소장하고 있는 달렘미술관 외에 많은 미술관이 있다. 또한 베를린자유대학·공과종합대학 외에도 신학·행정·경제·체신(遞信)·복지·미술 분야의 단과대학이 많이 있다. 교통도 발달하여 동부는 원격지와의 철도·도로교통의 요지이며, 엘베강·오데르강으로 통하는 운하와 베를린쇠네펠트공항이 있다. 서부는 철도·아우토반(자동차도로) 외에 테겔공항·가토브공항·템펠호프 공항이 있다. 교통수단으로는 버스·지하철·전철·트롤리버스가 운영되고 있다. 국제박람회장·국제회의센터가 있어 농업식량전·관광산업전·전자음향기기전 등 국제박람회가 많이 열리고 있다.

- 참고 및 인용 자료 : 야후 코리아 동서문화사 백과사전 동아출판사 ‘성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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