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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성지안내



1. 개요
이집트는 아프리카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사하라 사막 안에 놓여 있다. 북쪽으로는 지중해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수단에, 서쪽으로는 리비아에동쪽으로는 이스라엘과 아카바만(the Gulf of Aqaba)과 홍해를 접하고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이집트는 고대부터 세계 무역의 핵심이 되었다.

이집트는 100만㎢(386,100평방 마일)을 차지하며, 스페인의 두배, 한반도의 4.5배의 크기인데 국토의 90%가 사막이다. 나일강은 서쪽 사막의모래 언덕과 산악지역인 동쪽 사막을 가로 지른다. 이 두 사막 지역과 나일 언덕 그리고 시나이 반도가 이집트의 주요 네 지역이다.
국가명 이집트 아랍 공화국(Arab Republic of Egypt)
수도 카이로(Cariro, 약 1600만명)
면적 -
인구 6,500~7,000만명
주요민족 이집트인, 베드윈, 베르베르인 등 햄족이 99%
주요언어 아랍어(공용어) (지식층 영어 및 불어 통용)
종교 이슬람교(수니파) 93.7%, 기독교 6.3%(대다수가 동방정교회인 곱틱파)
화폐 이집트 파운드(EGYPTIAN POUND)
2004년 1월 - 미화 1달러는 약 6.14 이집트 파운드
기후
(카이로 중심)
온도/월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최고기온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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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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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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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4
10
* 3~10월은 반팔 셔츠에 가디건, 스웨터가 필요하다.
* 특히 이 시기는 일몰 후에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므로 주의해야 한다.
주요산업 동제품, 의료품, 놋쇠제품, 은제품, 금세공품, 유리제품, 파피루스(종이) 등과 관광산업, 수에즈운하 통행료, 석유수출 및 해외인력들의 외화 획득 등을 들 수 있다.
전압 110볼트, 220볼트
시차 GMT + 2시간(한국이 7시간 빠르다.)
2. 역사
고대 유물들이 말해주듯이 나일강 상류에는 약 60,000년 전부터 인류가 살고 있었고, 고고학적 발견들은 기원전 3300년에 이미 전제정치와 종교문화가 출현했음을 보여준다.
그 이후로 나일 삼각주의 하 이집트와 상류지방인 상 이집트를, 상 이집트의 메네스, 즉, 첫번째 파라오가 통일시켰다. 역사 연구가들은 이집트 역사를 크게 고대, 중대, 새로운 왕국기, 그리고 후대로 나누는데, 이 시기동안 중상류 이집트의 통치는 무력한 통치자들에 의해 분리되게 되고, 이는 중앙 정부의 분열과 나라 전체의 행정 권한의 붕괴를 불러오게 된다. 초기 이집트인들은 절대적 통치자인 파라오의 지배 하에 살았는데, 파라오는 신적인 존재였으며, 오직 파라오의 책임하에 사람들은 종교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이집트 문화의 첫 전성기는 고대 왕국시기(기원전 2755~2255)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는 세 번째부터 여섯 번째 왕조가 포함된다. 특히, 세 번째 왕조는 문화적 신선함과 힘이 꽃피던 황금 시기로 알려져 있는데, 문학과 의학이 발달했으며, 성직자들은 이집트 신화에 성문화되어있는 여러 신들에 대한 여러 흩어진 설들을 재 연구해서 하나로 만들려 했다. 여러 개로 나누어진 주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건축 프로젝트를 감독하기 위해 왕은 새로운 통치체제를 만들었고 최초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중세 왕국시기(기원전 2134~1784)인, 활발한 문화 부흥시대는 11대 왕조인 데반 통치 하에 발전되었는데, 건축은 있는 그대로의 선을 살렸고, 조정된 분할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화려한 장식, 특히 값비싼 보석과 도자기 장식이 생겨났는데, 이중에는 그 유명한 그린 수초로 장식된 파란 유리 하마도 포함되어 있다.

신왕조(기원전 16세기)는 국제적인 정복이 시작된 시기이다. 전사 파라오들은 상류 나일강과 저 멀리 누비아와 시리아를 따라 군사기지를 세우면서 이집트 정치분리를 종결지었는데, 여기서 넘어온 이주자들은 이집트 인구를 크게 증가시켰으며, 동시에 새로운 관습, 패션, 언어들을 소개했다. 페르시아 침입자들은 기원전 16세기부터 알렉산더 대왕의 군사들의 침입이 있던 332년까지 이집트를 손아귀에 넣고 있었는데,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가 죽으면서 그 휘하의 장군들은 그의 왕국을 나누어 가지게 된다. 그 중 프톨레미가 이집트를 차지하게 되고, 기원전 306년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를 건설하면서, 그 자신이 파라오가 되었다.

프톨레미 통치 하의 이집트는 시리아와 아시아 소국가들, 사이프러스, 리비아, 포에니시아 외의 다른 땅들로 여러 번에 걸쳐 통치권을 넓히면서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유력한 국가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프토레미스의 통치 아래,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문화의 지성의 중심이 되었고,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의 자살로 프톨레미 왕국은 끝이 난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이후 거의 7세기 동안 로마가 이집트를 지배하게 되는데, 로마 황제인 콘스탄틴이 세력을 잡으면서,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고, 서기 313년 교회의 교리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게 된다. 신로마 정통파는 콥트 기독교라 알려져 있는 이집트의 국교와 여러 국면에서 부딪히는데, 이것이 종교 갈등의 시작이다. 결국 나중에는, 콥트교도가 공식적으로 분리되었고, 그들의 우두머리가 알렉산드리아를 지목된다.
서기 641년부터 1517년까지, 이집트는 무슬람교의 지도자 칼리프가 지명한 통치자들의 휘하에 있었다. 1517년, 터키 술탄 셀림은 이집트를 오트만 왕국의 일부분으로써 터키의 소유국임을 공표한다.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집트를 침략하면서, 1801년까지 통치하게 되는데, 이는 이집트에 관한 유럽인들의 관심을 재조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1805년, 알바니안 출신인 오트만의 장군인, 무하마드 알리는 지역 주민들의 협력 하에 권력을 빼앗는다. 무하마드 알리는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이집트 튼튼한 경제적 발판을 세우게 된다. 계속된 전투로, 알리는 이집트 왕국을 아라비안 반도와 수단까지 확대시켰다.

1849년 무하마드 알리의 죽음 이후, 이집트는 점점 유럽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인도로의 가장 빠른 길이 이집트라는 것을 알고 있는 영국은 이집트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영국 제재소를 위한 면의 공급지로서 수에즈 운하로까지 뻗게 된다. 그리고 터키가 1차 세계 대전에 독일 편으로 개입하면서, 영국은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선포한다.

전쟁 후, 이집트는 영국 통치에 반대하는 시위와 폭력으로 가득했다. 계속되던 폭력시위는 1922년 영국이 이집트를 푸아드 1세의 통치아래 독립된 왕국으로 인정하면서 끝이 났다. 현대로 접어들어 1948년, 이집트는 1948년 다른 여러 아랍 국가들과 함께 이스라엘 국가의 건설을 막기 위한 여러 전쟁에 참여했으나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성공적이지 못한 결과를 무력한 정부를 탓하게 되고, 군대는 푸아드의 아들인 파룩 왕을 적대하게 된다. 그러던 와중, 1952년 모하메드 나귀브 장군 휘하의 군대 장교들이 왕을 내 쫓고(낫세르 군사혁명) , 이집트는 1953년 공화국이 성립되어 일단 시리아와 합병한 후 이를 다시 해체하였고 현재 아랍세계의 대국으로서 근대화를 서두르고 있다.
3. 주요 순례지
- 카이로
이집트 북부, 나일 델타의 남단으로부터 10여㎞ 남쪽에 위치한 이집트 수도로 아프리카 대륙의 가장 큰 도시이며, 아랍 세계의 심장부이다.
카이로는 주변에 고대 도시 멤피스, 헤리오폴리스를 포함한다고 해도 이집트에서는 비교적 신도시이다.
7세기에 아랍의 장군이 모스크(회교사원)를 세워 마을을 만든 이래, 차츰 큰 마을로 발전해 갔다. 몇 차례의 이슬람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면서, 도시는 북쪽으로 확대해 갔다. 10세기에 화티마조가 신도시를 건립, 카이로(아라비아어로 엘 카헤라 : 승리의 도시라는 의미)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

12~13세기 아이유부조 시대에는 상공업 도시로 번영, 13~16세기의 마루무구조 시대에는 최고 성수기를 맞았다.
현재 시내에 남아 있는 역사적 건조물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것이다. 18세기말부터 프랑스, 영국 점령시대에 따라 확장, 정비되었다. 카이로 시가는 구 시가, 19세기 중엽 이후의 신시가, 제2차대전 이후의 교외 주택지로 나뉘어져 있다.
구시가는 후스타-트의 서쪽에 수많은 모스크(회교사원)이 있고, 신시가는 타흐리루 광장으로부터 방사상으로 도로가 나있으며, 루쿠 문의 근처에는 정부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 쿠푸(Khufu)왕 피라미드
3대 피라미드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쿠푸(Khufu) 왕의 피라미드는 높이 146.7m, 둘레 230m, 사변길이 186m, 부피 259만 4914 평방 미터로 경사각 51도 50분을 유지하며 정확하게 쌓아올린 세계 최대의 불가사의한 걸작품이다.
이 피라미드를 구성하는 석재는 석회암으로 평균 무게는 2.5톤이며 230만개(일부 학설 268만개 사용 주장)를 쌓아 올렸으며, 내부는 왕의 방, 왕비의 방, 대회랑, 통로, 환기통 등 복잡한 구조로 축조됐다.
이 피라미드의 각 능선은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으며, 각도의 오차는 진북(眞北)에서 5분 정도 밖에 벗어나지 않아 우연한 배열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정교한 건축물이다.
그리스의 역자학자 Herodotus는 약 10만명의 인원이 약 10년간에 걸쳐 건축하였다고 추산했으나 현대 일부 건축학자들은 피라미드 건축의 정밀도 등을 감안 4-5천명의 숙련되고 조직된 기능인들이 건축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건축방식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해명되지 않고 있다.

* Khafre왕과 Memdaure왕의 피라미드
Khafre왕은 Khufu왕의 아들이며, Memdaure왕은 Khufu왕의 손자로서 각 피라미드 높이는 Khafre왕(137m), Memdaure왕(69m) 순이다. Khafre왕의 내부 현실은 지면과 동일한 높이에 있으며, Memdaure왕의 현실은 지하에 있다. Khafre왕의 피라미드 상부에는 외장석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스핑크스
인면수신(人面獸身)으로 유명한 스핑크스는 그리스말로 '나는 모르겠다'는 뜻이고, 아라비아말로는 '공포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러나 터키시대에 사격의 표적이 되어 코가 깎기고, 수염은 영국군에 의해 뽑혀 나가없어진 이후 얼굴이 공포보다는 오히려 경애심이 생길 정도이다.
카프레 왕 미라미드 동쪽에 있는 스핑크스는 머리부분은 파라오, 몸은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거대한 자연석(석회암)으로 길이 57m, 높이 21m로 무덤의 수호신이며, 동시에 제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스핑크스의 건축 연대는 기자 피라미드 건축 연대와 비슷한 시기로 보고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스핑크스 상에 물에 침식된 흔적이 남아있는 점 등을 근거로 기원전 1만년 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스핑크스는 18왕조 Tuthmosis 4세(기원전 1425-1417년 재위)가 꿈에 계시를 받아 당시 모래 속에 파묻혀 있던 스핑크스를 발굴하고 스핑크스 앞에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토토모스 4세는 원래 차남이었으나, 후에 왕이 되었는 바, 이를 출애급기의 모세의 재앙(장자 사멸)과 관련짓기도 한다.

* 성가정 아기예수 피난성당
이집트에는 전설적인 아기 예수 피난 성당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으며 이 마타리야 콥트 성당도 그 가운데 하나다. 요셉 성인이 천사의 말을 듣고 헤로데의 아기들 학살을 피해 예수님과 성모님을 데리고 이집트에 피신하여 잠시 머물렀던 곳(이집트로 올 때와 이스라엘로 갈 때)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파라오의 딸이 모세를 강에서 건져냈다고 전해지는 갈대 늪 옆에 세운 고대양식의 교회이다.
10~11세기에 재건된 이 교회는 예수님 일행이 한달 정도 피난 생활을 하였던 동굴 위에 지어져 있으며, 이집트 초대교회 신자들이 비밀회합을 가지던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이집트 비잔틴 바실리카 양식으로 넓은 회중석과 2개의 통로를 가지고 있는 이 성당의 대리석 기둥은 고대 건축물에서 가져와 사용했으며, 기둥 중의 화강암으로 된 다듬어지지 않은 돌은 가롯 유다를 지칭한다고 한다.
아기 예수 일행이 피난하였던 동굴은 현재 물에 잠겨 있으며, 그 들어가는 입구는 성당 맨 왼쪽의 성소 안에 위치하고 있다.
303년 로마 막시밀리안 황제 때에 시리아 알라사파에서 순교한 Sergius와 Bacchus를 기념하여 세운 성당으로 매년 6월 1일 이들 성인을 기념하고 있다.

* 모세 기념성당
이집트 전지역에서 출토된 13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으로서 선사시대의 유물, 미술품, 걸작품, 상형문자, 각종 형태의 크고 작은 미이라가 전시되어 있다. 특히 1922년 11월에 영국 카나본 경과 하워드 카터가 발굴한 투탄카멘 왕의 황금 마스크 등 유품 전량이 전시되어 있다.
고대 로마 그리스 시대 때부터 해외로 반출되고 또 이슬람 시대 모스크 건축 자재로 파괴되던 이집트의 고대 유물은 19세기 프랑스인 샹폴리용의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으로 이집트 역사 및 문화의 중요성이 제기 되면서부터 프랑스 학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보호로 체계적으로 수집 관리되기 시작했다.
이집트 국립박물관은 1863년 10월 나일강 수리회사의 건물을 빌려 사용하다가 1886~1901년의 공사 끝에 1902년 시내 중심가인 다닛르리아 광장 북쪽에 위치한 현재의 건물로 이전하였다.
1층 51개 전시실에는 고왕조, 중왕조, 신왕조의 유물과 그리스 로마시대의 유물이(정문 입구에서 시계방향으로) 전시되어 있으며, 2층 전시실에는 Tutankamun왕의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과 이집트 신왕조시대 왕들의 미이라 및 기타 유물들이 보존, 전시되어있다.

* 이집트 국립박물관
이집트 전지역에서 출토된 13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으로서 선사시대의 유물, 미술품, 걸작품, 상형문자, 각종 형태의 크고 작은 미이라가 전시되어 있다. 특히 1922년 11월에 영국 카나본 경과 하워드 카터가 발굴한 투탄카멘 왕의 황금 마스크 등 유품 전량이 전시되어 있다. 고대 로마 그리스 시대 때부터 해외로 반출되고 또 이슬람 시대 모스크 건축 자재로 파괴되던 이집트의 고대 유물은 19세기 프랑스인 샹폴리용의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으로 이집트 역사 및 문화의 중요성이 제기 되면서부터 프랑스 학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보호로 체계적으로 수집 관리되기 시작했다. 이집트 국립박물관은 1863년 10월 나일강 수리회사의 건물을 빌려 사용하다가 1886~1901년의 공사 끝에 1902년 시내 중심가인 다닛르리아 광장 북쪽에 위치한 현재의 건물로 이전하였다. 1층 51개 전시실에는 고왕조, 중왕조, 신왕조의 유물과 그리스 로마시대의 유물이(정문 입구에서 시계방향으로) 전시되어 있으며, 2층 전시실에는 Tutankamun왕의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과 이집트 신왕조시대 왕들의 미이라 및 기타 유물들이 보존, 전시되어있다.
[1층]
1. 고왕조 시대
Memdaure왕과 두 여신의 석상, Khafre왕의 석상, 서기관의 좌상, 촌장의 목상, 귀족(Rahotep) 부부상, 거위 벽화 등
2. 중왕조 시대
Mentuhotep 1세 석상, 귀족(Harhotep)의 분묘 벽화
3. 신왕조 시대
Hatshepsut 여왕의 석상, Tuthmosis 3세의 석상 Hathor신(암소신)의 석상, Akhenaten과 부인 Nefertiti의 석상, Ramses 2세의 석상 등
기타 석관, 목선, 미이라 수술대, 로제타 스톤 모형 등 전시
[2층]
1. 투탄카문 왕의 유물
- 1922년 영국인 Howard Carter가 Luxor 왕들의 계곡에서 발굴한 Tutankamun왕의 유물 전시
- 왕의 전차, 목관, 황금관, 황금 마스크, 알라바스타 항아리, 침대, 의자, 우산 등
2. 미이라실
- Ramses 2세 등 18-20왕조 왕들의 미이라 수구 전시
- 미이라실 입구에는 미이라 수술 도구 및 재료 전시 미이라 수술 방법이 간략히 설명되어 있음
* 이집트 국립박물관 (파피루스)
이집트 국립박물관 입구 중앙의 연못에는 이집트 북부(델타)지방의 상징인 파피루스와 남쪽지방(상 이집트)의 상징인 연꽃이 자라고 있다.
파피루스는 5천년 이전부터 이집트인들에 의해 여러 용도로 쓰였으나 종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700년 이전으로 보인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 이집트 역사에서의 파피루스는 신성한 것으로 상징하는 바가 크다. 햇살모양의 파피루스 꽃이 태양신 아몬 레(Amon Re)를 상징하고 삼각형의 속은 영원성을 상징한다.
파피루스는 성경에 다섯 번 언급되고 있다. The Bible(성경)이라는 단어와 Paper(종이)도 파피루스에서 유래됐다.
* 수에즈운하
1869년 11월 프랑스 사람인 페르디낭드 레셉스에 의해 완성된 길이 173km(처음에는 161km, 1988년 173km로 연장)의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해상운송의 요충지이며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한 운하이기도 하다. 영국에 의해 관리되다가 낫세르 대통령에 의해 국유화됐다.
- 시나이반도
이집트 북부, 나일 델타의 남단으로부터 10여㎞ 남쪽에 위치한 이집트 수도로 아프리카 대륙의 가장 큰 도시이며, 아랍 세계의 심장부이다.
카이로는 주변에 고대 도시 멤피스, 헤리오폴리스를 포함한다고 해도 이집트에서는 비교적 신도시이다.
7세기에 아랍의 장군이 모스크(회교사원)를 세워 마을을 만든 이래, 차츰 큰 마을로 발전해 갔다. 몇 차례의 이슬람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면서, 도시는 북쪽으로 확대해 갔다. 10세기에 화티마조가 신도시를 건립, 카이로(아라비아어로 엘 카헤라 : 승리의 도시라는 의미)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
12~13세기 아이유부조 시대에는 상공업 도시로 번영, 13~16세기의 마루무구조 시대에는 최고 성수기를 맞았다.
현재 시내에 남아 있는 역사적 건조물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것이다. 18세기말부터 프랑스, 영국 점령시대에 따라 확장, 정비되었다. 카이로 시가는 구 시가, 19세기 중엽 이후의 신시가, 제2차대전 이후의 교외 주택지로 나뉘어져 있다.
구시가는 후스타-트의 서쪽에 수많은 모스크(회교사원)이 있고, 신시가는 타흐리루 광장으로부터 방사상으로 도로가 나있으며, 루쿠 문의 근처에는 정부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 이윤무사
이집트어로 ‘모세의 우물’이란 뜻이다. 수에즈 해저 터널에서 빠져나와 홍해를 끼고 시나이반도 30km 쯤 남쪽으로 가면 가운데 대추야자 나무가 둘러서 있는 우물이 있는데, 출애급 후 사흘만에 처음 만났던 마라란 우물이 바로 이 아윤 무사로 추측되고 있다.

* 페이란
홍해의 유전 지대를 끼고 사막을 달리면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씬 광야를 지나게 되고, 남동쪽으로 더 가면 바위에서 물을 솟게 한 ‘모세의 바위’가 있었다고 하는 암벽지대에 이른다. 시나이산을 바라보며 골짜기를 돌면 두 번째로 맞이하는 오아시스 페이란 와디가 눈에 들어온다.

* 시나이산
시나이반도 남부 중앙에 위치한 표고 2,285m의 산으로 모세의 출애급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성산(The Holy Mountain)인 ‘호렙산’으로 하느님의 발현이 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산이다.
성서에서 시나이 산과 관련하여 맨 처음 등장하는 사람은 모세이다. 모세는 나이 마흔에 이집트인을 죽이고 미디안 곧 시나이 반도로 피신해서 미디안 사제인 이드로의 딸 시뽀라와 결혼을 하고 장인의 양떼 돌보기 40년만인 나이 여든에 ‘호렙 산’, 곧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뵈었다.
“ 야훼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떨기에서 불꽃이 이는데도 떨기가 타지 않는 것을 본 모세가 ‘저 떨기가 어째서 타지 않을까? 이 놀라운 광경을 가서 보아야겠다’ 하며 그것을 보러 오는 것을 야훼께서 보시고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리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하시고는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출애 3, 2-6)

모세는 하느님의 지시대로 이집트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동족을 이끌고 시나이 산에 이르렀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나이 산 앞에 진을 치고 있었고(출애 19~24장), 모세는 하느님과 말씀을 나누기 위해 시나이 산으로 올라가(출애 19, 3 : 24, 9) 그곳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십계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 계명을 전하려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고(출애 19, 14), 시나이 산에서 40일을 보내기도 하였다.(출애 24, 18)

또한 엘리야 예언자는 북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 왕이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고 이세벨의 영향으로 바알 우상을 섬기자 호된 질책을 했다. 이에 이세벨 왕비가 엘리야 에언자를 해치려고 하자 엘리야는 시나이 산으로 도망을 갔다.(1열왕 19, 9-15)

‘모세산(Jebel Musa)’이라고도 하는 시나이산은 성서 상으로 이집트 나일 삼각주 지역과 가나안 사이에 있다는 것 외에는 뚜렷한 단서가 없어 학자들간의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시나이 반도 남부에 위치한 고산지대로 보고 있다. 시나이 광야의 주변 지형은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높은 지대로 시나이산, 캐더린산 등 해발 2000m가 넘는 산들이 즐비하지만 하나같이 화강암의 돌산들 뿐이다.

* 가타리나 수도원

250년경 데치우스 황제(249~251)의 박해를 피해 알렉산드리아 지방에서 피신해 온 이집트의 그리스도인들은 시난이 반도 남부의 가장 큰 오아시스인 페이란 계곡(Wadi Feiran)에서 공동생활을 하였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남쪽 2km 떨어진 해발 2,070m 높이의 세르발 산(Jebel Serbal)을 시나이 산으로 여겼다. 하지만 페이란 계곡은 로마 군인들에게 쉽게 발각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수도자들은 좀 더 산 속 깊은 곳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근처에 샘이 있는 시나이 산기슭에 정착한 그들은, 샘가에 자라고 있던 떨기나무를 호렙산의 모세(출애 3, 4)와 연관지으면서 이 장소를 신성시하기 위해 성당과 망대 등을 건설하였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공적으로 인정한 뒤에는 성모 마리아 기념 성당이 세워졌고, 6세기 중엽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가 제국의 남쪽 변방인 시나이 반도를 지키기 위해 일종의 전략적인 요새로서 이곳에 대규모 요새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수도원은 548~565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것이다. 7세기에 이슬람 군대에 의해 시나이 반도가 점령되었을 때 이 수도원은 보호를 받았는데, 아마도 이때부터 아랍인들은 수도원 남쪽의 해발 2,285m 봉우리를 ‘예벨 무사(Jebel Musa)' 즉 ’모세의 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 같다.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해발 2,642m의 산봉우리를 ‘가타리나 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1000년경 이곳에서 가타리나 성녀의 유해가 발견되면서부터였다. 콥트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250년경에 태어난 가타리나는 알렉산드리아의 귀족 출신으로 본명은 도로테아였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가타리나라는 세례명을 받았는데, 수도자 생활을 하다가 막시미아누스 황제(286~305)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몇 세기 후 시나이 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의 꿈에 두 명의 천사가 성녀의 시신을 알렉산드리아에서 가타리나 산으로 옮기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수도자들이 성녀의 유해를 성당의 제대 옆으로 모신 뒤부터 성 가타리나 수도원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3세(717~ 741)가 726년에 내린 성화상 공경 금지에 관한 칙령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수도원의 구내 박물관에는 희귀한 고대의 성화들이 수백 점 남아 있다. 또 10세기 이전에 쓰여진 3천여 종이나 되는 고대 성서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고, 세계 최초의 그리스어 성서인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이 19세기 중엽 이곳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독일의 티션도르프(L.F.K. Tischendorf, 1815~1874)가 1844년부터 15년 간에 걸쳐 탈취하다시피 빼돌린 이 소중한 성서는 현재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사본은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과 함께 최초의 신약성서의 사본으로 손꼽히는 매우 귀중한 것이다. 오늘날 시나이 산을 찾는 순례자들은 해발 1,500m 지점에 위치한 성 가타리나 수도원에서 오르기 때문에 실제로 걷는 거리는 약 800m 정도이다. 마지막 750여 개의 돌계단을 올라 정상에 오르면 성 삼위 일체 성당과 이슬람교 사원이 있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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