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명 | 벨기에 왕국(Kingdom of Belgium)
유럽 북서부의 입헌군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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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브뤼셀 | |||||||||||
면적 | 3만 519㎢ | |||||||||||
인구 | 1027만 4595(2002) | |||||||||||
주요민족 | 55% 플라망인, 33% 왈론인, 그리고 기타 외국인 10% | |||||||||||
주요언어 |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독일어 | |||||||||||
종교 | 가톨릭 | |||||||||||
화폐 | 유로(Euro) | |||||||||||
기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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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산업 | - | |||||||||||
전압 | - | |||||||||||
시차 | - |
- 1. 개요
-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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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독일의 중간, 그리고 북해를 끼고 있는 위치로 인하여 벨기에는 오랫동안 유럽의 전쟁터였다. 13.14세기 때는 직조와 직물 거래의 발전으로 경제적 성장을 이뤘다. 이에 따라 직공들이 길드(예술가와 공예 기술자들의 자치 공동체)를 결성하고 여러 도시에 화려한 길드 하우스를 세우기도 했으나 영국과의 경쟁, 외국산 직물을 거부한 브뤼헤인들의 고집, 해상 교역의 어려움 등으로 플랑드르의 직조업이 쇠퇴하면서 도시들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종교 개혁을 부르짖던 개혁파들이 유럽을 휩쓸던 16세기,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통치자 스페인 국왕 필립 2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교를 받아들였다. 필립 2세가 가톨릭을 고수하기 위해 탄압을 가하면서 종교 분쟁이 일어나, 프로테스탄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교회를 약탈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80여년 동안 지속된 반란으로 네덜란드와 오늘날과 같은 경계선이 만들어졌다 홀랜드(Holland)와 그 연합 지방은 스페인의 통치를 벗어났지만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그 통치를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 후, 200년 동안 벨기에는 끊임없이 외세의 전쟁터가 되었다. 스페인이 물러가면서 오스트리아, 프랑스가 순서대로 침입했으며 1814년에 나폴레옹이 브뤼셀 근처의 워털루 전쟁에서 패하자 네덜란드 연방이 결성되었으며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로 통합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톨릭 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1830년에 독립 국가를 세웠다. 플랑드르 민족주의가 번성하면서 플라망어(네덜란드에서 파생)와 프랑스어 사용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으며, 이 갈등 때문에 결국 나라가 언어권에 따라 분할되었다.
1914년, 벨기에의 중립 정책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게 되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이프레가 지도에서 사라지기도 했고,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에는 전 국토가 3주간의 기습 공격으로 함락되기도 했었다. 전후의 벨기에는 경제 성장으로 인해 번영하게 되며, 브뤼셀 조약에 따라 유럽 연합(the European Union)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본부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 3. 주요 순례지
- 바뇌 성모 발현지
바뇌(Banneux Notre-Dame)는 루베네의 관할 구역에 소속된 작은 마을이며, 아르덴느 고원의 한 부분으로 해발 325m 높이에 자리잡고 있다. 주위는 아르덴느 지방의 아름다운 앙블레브, 베스드르, 에녀의 골짜기들로 둘러싸여 있고, 공업도시인 리에즈에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바뇌는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 주위에 소규모의 경작을 할 수 있을 뿐 아주 가난한 마을이었다.
교회로부터 1km 떨어진 빼뺑스테로 가는 길에는 베코(Beco) 가족의 집이 홀로 서있다. 이 지대는 매우 축축하고 질퍽질퍽하여 '진창(la Fange)'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도로 맞은편은, 벨기에 동부 지역에 뒤덮여 있고 독일 아이펠(Eifel) 숲지대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전나무 숲이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집 앞의 작은 정원에는 조그마한 야채 밭이 있다.
1933년 발현 당시 베코씨의 가족은 아버지 베코씨와 어머니 루이즈, 그리고 7명의 자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곱 형제 중에서 가장 맏이인 마리에트(Mariette)는 성모 영보 축일이었던 1921년 3월 25일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 날은 또한 십자가가 엄숙히 공경되는 날인 성금요일이었다. 그러나 베코씨네 집에는 십자가조차도 없었다. 약간 투박한 이 가정 안에는 종교는 거의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가족들은 모든 종교적인 의식이나 사회적인 인습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마리에트 역시 가족들의 이러한 무관심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바뇌의 주민 수는 325명. 아직 본당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그곳 사제는 '주임 신부'가 아니라 '지도 신부' 자격이었다.
- 바뇌의 발현 내용과 성모님 메세지
* 첫 번째 발현
1933년 1월 당시 마리에트 베코(Mariette Beco)는 열한 살이었다. 1921년 3월 25일, 7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그녀의 가정은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숲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 바뇌 마을에서도 동떨어져 있고, 길가에서 좀 들어가 있는 아주 허름한 농가였다.
1월 15일 저녁, 아주 깜깜하고 차가운 밤이 내려앉았다. 식구들은 아침에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은 열 살짜리 줄리앵을 기다리고 있다. 마리에트는 창가에 앉아 어둠 속을 주시하고 있다. 갑자기 나타난 밝은 빛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석유 등잔 불빛이 창유리에 반사된 것으로 착각한 그녀는 등잔을 들고 옆방으로 가서 돌아보고 온다. 이내 불안해진 그녀는엄마를 부른다.
"엄마, 저기 정원에 어떤 아름다운 부인 나타나셨어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어머니도 마리에트가 계속 강조하자 의아해 한다. 맏딸 마리에트는 명상가도 아니고 신심 있는 아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무지 기도하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벌써 3개월째 미사에도 교리반에도 나가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도 자세히 바라보니 희미한 형체가 보이는 듯 해서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 드디어 "마녀가 나타났다!" 하고 고함친다.
마리에트는 기도하기 시작, 정원 쪽을 주시하고 있는데 그 부인이 다가오라고 손짓한다. 머리에트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어머니가 놀라 문을 열쇠로 잠가 버리고 나가지 못하게 막는다. 마리에트가 창가에 돌아가 밖을 내다보니 불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 첫 번째 발현의 가장 감동적인 효과는 마리에트의 '회심'이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마리에트는 매주 수요일 아침 7시 30분 미사에 나갔고,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교리반에도 갔다. 자맹 신부는 혼란에 빠졌다. 마리에트가 회심한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 그를 감동시켰다.
우선 첫 영성체 반에서 이미 누락된 것으로 간주했던 그 소녀가 돌아온 것에 놀랐다. 사실 마리에트가 전에 교리반에 나올 때에도 규칙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나쁜 뜻이 있어 그랬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6남매의 맏딸인 그 소녀는 자주 병석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도와 드려야 했고, 아침이면 집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자맹 신부의 충고도 종교 문제에 무관심한 편이던 아버지 때문에 잘 이해되지 않았으므로, 잘 수용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자맹 신부는 마리에트의 첫 영성체를 보류시키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두 번째 이유는, 마리에트의 절친한 친구인 어린 조세핀이 발현에 관해 얘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맹 신부는 그 일을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될 엉터리 소문쯤으로 생각했다.
세 번째 이유는, 마침내 자맹 신부의 마음을 움직였다. 15일 전, 그는 이미 여러 차례 동정녀의 발현이 있었던 보랭(Beauraing)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는 신자들의 신심을 일깨워 줄 만한 징표가 나타나기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1월 8일부터 그 징표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신자들과 함께 9일기도를 시작했다. 그때는 한 냉담자의 회심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교리반은 미사가 끝난 다음에 이어졌다. 자맹 신부가 어린이들에게 질문했다. 그를 놀라게 했던 것은 마리에트가 32번씩이나 결석을 했는데도 질문에 곧잘 대답했다는 점이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실, 마리에트는 첫해 교리반에서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3학기 성적표는 0점이었다. 잘 이해하지도 못할 뿐더러 답을 해도 적합한 답을 할 줄 몰랐다. 그래서 그 아이는 5명 중에서 5등을 차지했다. 한데 이번에는 달랐다. 마리에트가 교리 과목을 예습해 왔던 것이다. 전날 저녁, 그 아이는 친구 조세핀에게 교리 학습에 관한 질문도 했다.
* 두 번째 발현
1월 18일 수요일 저녁 7시, 마리에트는 정원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 소녀의 아버지가 마녀를 쫓아내겠다고 집 주변을 누비고 다니며 시끄럽게 해도 전혀 개의치 않고 무감각해 보였다. 그 소녀의 아버지가 자맹 신부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고 찾아갔으나 없었다. 마리에트는 정원에서 나와 부인이 부르는 길가로 나섰다. 꽁꽁 얼어붙은 땅바닥에 두 번 무릎을 꿇었다. 세 번째 그녀가 무릎을 꿇은 곳은 경사지 근처, 샘에서 나오는 물이 고여 있는 '물구덩이' 앞이었다.
부인이 마리에트에게 말씀하셨다.
"그 물 속에 네 두 손을 담가라."
마리에트는 그 찬 물구덩이 밑바닥까지 두 손을 밀어 넣는다. 손에 쥐고 있던 묵주가 떨어져 나갔고, 그것은 다음 날 다시 찾아왔다. 소녀는 부인이 한 말을 들려 주었다.
"이 샘은 나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마셔라. 또다시 만나자."
같은 날 저녁, 연락을 받은 자맹 신부가 두 신자들을 대동하고 베코의 집을 방문했다. 마리에트의 아버지는 결심했다.
"내일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 하겠습니다."
그것이 두 번째 회심이었다.
* 세 번째 발현
1월19일 목요일, 아주 매섭게 쌀쌀한 날씨 때문에 마리에트는 낡은 외투로 머리를 감싼 채 오솔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다. 저녁 7시. 그녀 옆에는 여섯 사람이 함께 있다.
부인이 나타나신다. 마리에트가 그 부인에게 질문한다.
"아름다운 부인이시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다."
"오,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시라구요!" 하고 마리에트가 되묻는다. 동정녀는 그 소녀를 길가로 해서 샘터로 인도하신다. 마리에트가 다시 질문한다.
"아름다운 부인이시여, 당신은 어제 '이 샘은 나를 위해 마련된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나를 위해서' 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리에트는 순진하게 그 샘이 그분의 것이라 믿으며 지적했던 것이다. 그러자 동정녀는 더욱 환히 웃으며 대답하신다.
"이 샘은 모든 민족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란다."
"모든 민족들을 위해서요?" 라고 마리에트가 묻는다.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
"환자들을 위해서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마리에트가 말한다. 동정녀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또다시 보자."
마리에트는 자기도 이해 못 하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되새긴다. 그리고 같은 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버지를 보자 달려가 포옹했다.
* 네 번째 발현
1월20일 금요일, 마리에트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쉬었다. 전날 밤, 잠을 못 잤기 때문이다. 저녁 6시 45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찾아 입고, 함께 가 달라고 부탁했던 어른들이 가지 말라고 했지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오솔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잠시 기도하고 있을 때였다.
동정녀께서 발현하시자 마리에트가 소리친다.
"오, 부인!" 그리고 부인과 대화에 들어간다.
"오, 아름다운 부인이시여,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웃고 계신 동정녀께서 대답하신다.
"나는 작은 성당 하나를 원한다."
동정녀는 두 손을 드시더니 오른손으로 마리에트를 축복해 주시자, 소녀는 무너지듯 주저앉고 만다. 마리에트가 실신한 것이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집으로 데려다 누인 얼마 후에서야 소녀는 의식을 회복했다.
* 발현 중단
그리고 3주가 아주 조용하게 지나갔다. 1월 21일부터 2월 11일까지, 동정녀께서 찾아오지 않으신 것이다. 그 사이, 사람들은 무관심해졌고 발현 현장 입회자들도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마리에트는 약속을 성실히 지키려 했다. 매일 저녁 7시,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원에 나가 기도했다. 소녀는 묵주기도를 4단, 5단, 6단, 때로는 7단까지 바쳤다. 혼자 있을 때도 침착하게 묵주알을 굴리고 있었다.
* 다섯 번째 발현
2월 11일 토요일, 마리에트는 다시 길가에 나가 두 번 무릎을 꿇었고 샘물에 두 손을 담그고 나서 십자 성호를 그었다. 갑자기 벌떡 일어선 소녀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혼자 집으로 달려가며 울었다. 그녀는 '덜어 준다'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버지에게 질문했고, 동정녀께서 말씀하신 "나는 고통을 덜어 주러 왔다." 고 말씀하신 것이 무엇을 계시하시는지 질문했다. 그리고 5월에나 하게 되어 있던 첫 영성체를 그 발현이 있던 다음 날 했다.
* 여섯 번째 발현
다시 사흘이 지나갔다. 사람들의 호기심도 그만큼 약해져서 2월 15일 수요일, 여섯 번째 발현이 있던 날은 불과 3명이 마리에트와 함께 하고 있었다. 마리에트는 자맹 신부의 요청을 전한다.
"거룩하신 동정녀시여, 지도 신부님께서 징표를 하나 보여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동정녀께서 대답하신다.
"나는 믿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를 믿겠다."
그리고 마리에트를 위해 한 마디 덧붙이신다.
"많이 기도하거라. 또 보자."
마리에트는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며 흐느껴 운다. 동정녀께서 떠나가셨기 때문이다. 동정녀는 소녀에게 비밀 하나를 말씀해 주셨다.
* 일곱 번째 발현
일곱 번째 발현 일인 2월 20일, 몹시 추운 날씨였지만 마리에트는 또다시 눈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여덟 사람에 둘러싸여 묵주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소녀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기도한다. 그녀는 정원에서 나와 길을 걷다가 전처럼 두 번 멈추고 무릎을 꿇고, 샘에 이르러 기도하며 운다. 그 부인이 너무 빨리 떠나가셨기 때문이다. 동정녀 마리아께서 마리에트에게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딸아, 많이 기도하거라."
그날 밤 10시 30분경, 아버지가 마리에트의 방에 들어가 보니, 그녀는 손에 묵주를 든 채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의자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 여덟 번째 발현
마리에트는 마지막으로 동정녀를 뵙기 전, 또다시 10일을 기다려야 했다. 그분은 3월 2일 목요일 발현하셨다. 오후 3시부터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마리에트는 저녁 7시에 우산을 받쳐들고 나갔다. 그녀가 세 번째 묵주기도에 들어갔을 때 갑자기 비가 그렸다. 소녀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두 팔을 벌리고 일어나 한 발짝 가더니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팔꿈치를 땅에 대고 엎드려 흐느껴 운다. 크게 감동을 받은 아버지가 딸을 일으켜 껴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한다. 흐느껴 울며 집으로 돌아온 마리에트는 잠시 후, 동정녀 마리아께서 말씀하신 메시지를 털어 놓았다.
"나는 구세주의 어머니요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많이 기도하여라."
그리고 나서 소녀 위에 손을 얹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잘 있거라.""
이어서 소녀는 결론지었다.
"그 부인이 나에게 잘 있거라 하셨어요. 다시는 그분을 뵙지 못할 거예요."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동정녀께서 나에게 너무 가혹한 말씀을 하셨어요. '잘 있거라!' 하구요." -
발현에 대한 결론
성모님께서 바뇌에 발현하신 사실과 성모님의 메시지는 성경과 오늘의 교회 현실에 정확히 일치한다.
- 아주 가난한 가정의 소녀와 이름 없는 '바뇌'라는 작은 마을의 선택, 성모님 스스로 붙이신 "나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다." 란 호칭은 성경에 나와 있듯이 성모님의 가난함과 소박함을 밝혀준다.
- 기도에 대해 여러번 권고하신 것(세번씩이나)"기도를 많이 하거라" 하고 일러주심)은 성경의 루가 복음에서 예수께서 권장하시는 것과 일치한다. 오늘날 교회는 기도를 많이 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나는 작은 성당을 원한다." 성모님의 겸허한 부탁은 열렬하고 꾸준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 "이 샘은 모든 나라를 위한 것이다." 바뇌의 메시지는 전 세계에 알려야 하는 구원의 기쁜 소식임을 증명해 준다.
- "이 샘은 모든 나라들, 그리고 병든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나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왔다." 성경에서도 병자와 고통받는 이들은 예수님의 대상이었다. 교회는 이들을 돕기 위해 여러 자원 봉사 기관들을 만들어 왔다.
- "나를 믿어라. 나는 너희를 믿겠노라." 는 말씀은 신약성서의 한 귀절과 유사하다. "나에게 머물러라. 나는 너희 안에 머물겠다."(요한 15,4)
- 성모님께서는 마리에뜨에게 네 번이나 말씀하셨다. "물에 손을 담그렴. 이 샘은 나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상징인 '영원히 넘쳐 흐르는 샘' 과 유사하다. "내가 주는 물을 영원한 삶을 주리라." 교황 바오로 6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잉태하신 은혜의 샘이신 성모님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전교의 임무와 세상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힘을 교회에 불어넣어 주셨다."(1964년 11월 21일).
- 성모님께서는 엄숙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구세주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이것은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의 핵심이 되는 메시지일 것이다.(케르크 홉스 주교).
- 부드럽고 사랑스런 목소리로 소녀에게 말씀하신 성모님의 말씀을 잊지 못할 것이다. "너는 위해 기도하마... 안녕...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안녕히." 성모님께서는 그녀에게 비밀도 말씀해 주신다.
- 그리고 성모님은 두 번에 걸쳐 다르게 소녀에게 축복을 내리신다. 우리는 성모님의 이러한 행동 안에서 '가서 모든 이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말해 준 것을 알리라' 고 파견하시는 듯한 모습을 느낄 수 있다. -
바뇌의 마리아 성지
발현 당시는 몇몇 사람들만이 마리에트를 동반했다. 그러나 차츰 많은 군중들이 바뇌로 몰려들었다. 순례지는 비약적으로 신속하게 발전했다. 매일 저녁, 여러 발현 장소에서는 묵주기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 발현 소성당
동정녀께서 원하신 소성당을 건립하기 위해 자맹 신부를 중심으로 연합회가 구성되었다. 교구 주교는 발현이 있었던 정원 안에 소성당을 짓는 데 아무 무리가 없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1933년 8월 15일 6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소성당을 위한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소성당의 건축 양식은 후일 건축사가 결정할 것이었다. 본국에서 채집된 돌로 지어진 소성당은 바람과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슬레이트로 된 큰 뽀족 지붕으로 씌워져 있다.
발현 소성당 안, 동정녀께서 발현하셨던 자리는 쉬에 신부(P.Scheuer)가 구상한 연대 기록표로 새겨진 흰색의 모자이크 작품으로 표시되어 있다.
"HUC Venlens, VoLUIt MatrIs reCLUDere peCtUs."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분은 여기에 오시면서 당신 어머니의 마음을 열어 주시기를 원하셨다."
샘으로 가는 길, 마리에트가 매번 무릎을 꿇었던 자리에는 재생된 바뇌 기장인 흰색의 원형 안 표의 포석들로 표시되어 있다.
* '성모 방문'의 광장 성당
발현 소성당은 너무 협소했지만 순례객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래서 인근에 광장 성당을 마련했고, 이 성당은 1937년부터 사용되고 있다.
현재 광장 성당에는 성모 찬가 마니피캇 제대가 높이 드리워져 굽어보게 되어있다. 양편에 철로 된 두 필의 말이 헌정되었는데 그 하나는 '가난하신 부인'을 사랑했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헌정되었고, 다른 하나는 묵주기도의 주창자인 성 도미니코에게 헌정되었다. 그리고 광장 성당 양편에는 두 개의 큰 성당이, 즉 '메시지'의 성당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 평행을 이루고 있다.
자맹 신부는 바실리크 대성당을 건축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 목적으로 연합회가 창설되었고, 1947년 교구장이 와서 첫 주춧돌을 놓아 기공식을 집전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옥외에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광장 성당을 중심으로 여러 건축물들을 짓기 위해 그 계획은 취소되었다.
* 샘
샘물의 유출량은 현저하게 증가되고 있다. 이 샘은 겨울에 저장해 두기 위해 끌어 왔던 것이다. 오늘날 순례객들이 손을 담글 수 있게 만들어 놓은 큰 수반은 1958년 설치되었다. 그 옆에 나란히 설치되어 있는 수도꼭지들은 샘물 수급을 용이하게 돕고 있다. 샘의 상징은 제대의 궁형으로 된 창문 위에서 읽어 볼 수 있는 연대표를 상기시키고 있다.
"Fons UnUs ChrIstUs JesUs hUnC aLMareCLUDIt."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샘으로서 동정녀께서 우리에게 그 입구를 열어 주고 계신다." 이다.
*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 성당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 성당은 5천 명의 순례객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성당으로 1984년 문을 열었다. 그 외형은 거대한 천막을 연상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성서에 언급되어 있는 만남의 장소, 장막을 암시한다. 구약의 장막은 여행 중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조립식으로서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났다. -
발현 이후
* 삼매화
발현 소성당의 삼매화는 마리에트의 설명에 따라 루이-마리 자맹 신부의 숙부인 레옹 자맹(Leon Jamin)에 의해 실현 되었다.
이 삼매화는 강한 요구에 따라 예술가로 하여금 5번씩이나 다시 시작하게 함으로써 고충을 겪게 했다. 초벌을 보았던 마리에트는 "오! 흉해요! 너무 할머니 같아요! 나를 혼동시키려고 일부러 그러신거죠? 내가 본 부인의 발은 저렇지 않았어요! 라고 말했다. 세 번째 작품을 본 소녀는 "좀 괜찮아졌네요!" 하면서 연필을 가지고 손들이랑 너무 목이 팬 블라우스, 너무 긴 벨트 등 몇몇 부분을 수정했다.
"이런 푸른색도 아니고 이런 흰색도 아니었어요!"
네 번째 작품을 보면서 소녀는 그 귀여운 손으로 눈을 비볐다.
"네, 저런 눈을 보았더랬어요! 긴 원피스의 그림자!" (화가나 사제 모두 동정녀가 외부의 조명을 받지 않고 내부에서 발산하는 조명을 받고 있다는 것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 확인
이미 1942년, 그리고 1947년에 리에즈 교구 주교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께 대한 공경을 인정했다. 1949년 8월 22일, 리에즈 주교는 여덟 차례 발현의 실상을 망설이지 않고 인정했다. 그 같은 주교의 뒷받침은 그 사실을 온 세계에 널리 알리고 발현에서 유래되는 은총을 전파하며, 이곳 성지순례에 좀더 활기를 불어넣어 불 목적으로 자발적인 운동을 촉진시켜 주었다. 신학위원회가 결성되었고, 3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현재 4개의 잡지들이 대중을 목표로 출판된 서적들을 홍보하고 있다. 아울러 성지 순례와 환자들의 숙박소들에 대한 안내를 돕고 있고, 멀리 있는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소식들, 종종 놀라운 소식들을 전달하고 있다.
많은 벨기에 주교들과 외국 주교들이 소속 교구의 신자들을 대동하고 바뇌를 찾아 순례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1985년 5월 21일 바뇌를 친히 방문해 주셨다. 그 동안 이곳을 찾아왔던 수백만의 다른 순례객들처럼 교황도 발현 소성당에서 기도하셨고, 소성당에서 샘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으셨고, 샘물에 두 손을 담그셨다.
그날 교황님이 집전하신 미사에는 만명 이상의 신자들이 참석했다. 교황님은 환자들과 장애자들, 집시들을 접견하셨다.
- 출처 -
바뇌,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 . 오귀스트 뢸 지음, 김정옥 옮김. 성바오로수도회
바뇌 현지에서 입수한 성지안내 인쇄물